아우구스티누스와 용수보살의 깨달음

[최원영의 책갈피] 제187화

2024-12-16     최원영

 

 

사람의 본능 속에는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더 오르고 싶어 하는 탐욕이 있어 때로는 그에 따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예쁜 것은 모두 내 것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삽니다. 31살까지 그렇게 살았던 남자의 이야기가 《고전혁명》(이지성 & 황광우)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그는 문제아였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남의 밭에서 과일을 훔쳐 먹던 문제학생이었다. 가는 곳마다 난폭한 짓만 골라서 했다. 그나마 좋아하는 일은 희곡을 쓰는 일이었다.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동거해서 아이까지 낳은 여인을 버렸다. 방종과 방탕, 탐욕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이 남자가 초대 그리스도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라니 놀랍기까지 하다.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서른두 살 때였다.

방탕과 방종이 쾌락을 느끼게는 해주지만 안정감은 주지 못하고, 그나마 쾌락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삶을 후회하며 눈물 흘리던 어느 날 밤, 이웃집에서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그에게 “책을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라고 하는 듯이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그 목소리가 신의 계시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생각 없이 성경책을 펼쳤다. 이렇게 그는 성경말씀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훗날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전한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가 자리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가진 인간, 스스로를 자신이 경험한 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변화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은 탐욕과 쾌락이라는 본능에 따라 살았습니다. 쾌락을 맛보는 그 순간만큼은 쾌락이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지만 사실 그의 삶은 뼛속까지 곪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바꾸어준 것은 지혜로운 책이었고, 그 책을 통해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고, 깨달은 대로 살았기 때문에 행복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존경받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걸어온 길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동양인을 만나보겠습니다.

명문가 출신으로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호기심도 많았다.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은신술’을 익혔다. 투명인간이 된 거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모른다. 참 재미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갔는데, 병사들의 삼엄한 경비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갖은 장난을 다 치던 어느 날, 넘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왕의 후궁과 시녀들을 범한 거다. 그러나 누가 그랬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한번 경험한 쾌락의 극치는 그를 매일 왕궁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왕궁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생겼다. 후궁 한 명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왕이 이 사실을 알자 왕궁은 난리가 났다. 이제 범인을 잡아야만 한다. 그러나 투명인간을 잡을 재간이 없다. 투명인간의 짓일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현명한 신하가 꾀를 냈다. 왕궁으로 이어지는 모든 출입구에 모래를 뿌려놓도록 했다. 몸은 숨길 수 있겠지만 발자국은 남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그와 친구들은 그날 밤도 왕궁에 들어갔다.

가까스로 그는 달아날 수 있었지만 친구들은 모두 잡혀 죽고 말았다. 친구들의 죽음을 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재앙의 씨앗이 자신의 ‘욕망’이었음을 말이다. 욕망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본질임을 깨달은 거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위태롭게 했고 친구들을 죽이기까지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깨달았다.

이 사람이 우리가 자주 들었던 ‘용수보살’입니다. 이 사람으로 인해 불교는 자신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소승불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기의 깨달음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승불교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의 내면 안에서 자신을 갉아먹는 기생충과 같다는 것, 즉 모든 재앙의 뿌리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그를 가장 훌륭한 스님의 한 분으로 거듭나게 한 겁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탐욕과 쾌락이라는 욕망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지 않아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또한 있습니다. 이 마음을 꺼내 쓰면 아름다운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용수보살의 이전 삶이 전자의 삶이었다면, 지혜의 책인 성경책을 들거나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의 삶은 후자의 마음으로 살았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삶은 재앙의 뿌리가 되지만, 후자의 삶은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