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생각
[소통과 나눔의 글마당] 김병태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나의 누나는 키가 컸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날 며칠을 조르고 졸라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학교 졸업 후 한 3년은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동생들을 거두면서 살았다.
한번은 서울에서 손님이 온 적이 있었다. 누나가 편지를 보내서 여자 국가 대표 농구선수 박00 선수가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우리 누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농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확인한 차 왔지만 그 선수는 누나가 173㎝로는 안 되고 나이도 있어 선수로 입문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누나는 가지 못하게 되자 실망만 안고 말았다.
그 후 집에 잘 있었는데 누나의 친구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명절 쇠러 왔을 때 누나는 친구 따라 소리 소문없이 서울로 가버렸다. 그 시절 사람이 필요했던 곳이 구로공단의 방직공장과 가발공장이었는데, 누나 친구는 가발공장을 다니고 있어 누나도 가발공장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누나는 일하고 있다고 한참 지난 후에야 연락을 해왔다.
그 시절 가발공장은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많이 생겨났지만,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직공들의 봉급을 몇 달씩 연체하는 곳이 많았고 또 어떤 곳은 사원들 봉급을 못 줘 사장이 야반도주하는 곳도 있어 누나도 여기저기 이직을 많이 하였다.
내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누나가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형이 입대하기 전까지 뒷바라지를 했고 나 역시 입대할 때까지 누나의 도움으로 살았다. 얼마 받지도 못하는 봉급으로 가까스로 동생들과 생활했고 내가 군에 임대하자 기숙사가 있는 회사로 옮기어 갔다. 내가 군에서 훈련 받을 때에는 없는 돈에 자신이 쓰기도 빠듯할 텐데 배곯지 말고 빵이라도 사서 먹으라고 우편으로 소액환 5천 원짜리를 붙여 주었는데, 현금이 아니라서 뺏기지도 않았지만 쓰지도 못하고 나중에 휴가를 나와서 썼던 기억이 난다.
휴가를 맞아 누나한테 찾아간 적이 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경기도 성남에 있는 단대리” 라는 곳이었다. 별로 대우도 좋지 못한 곳에서 그래도 배운 것이 그 뿐이라 가발 공장에 발을 디딘 후 누나는 헤어 나질 못하고 있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시골집에서는 혼기가 넘은 누나에게 시집을 가라고 성화를 부리지만 그게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명절에 시골에 갔다가 선을 본 모양인데 다른 것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키가 누나에 비해 너무 작아서 많이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매형 되실 분의 구애에 할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 하신 말씀이 “내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딸은 시골에 시집 안 보내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였고 푹푹 한숨을 쉬는 모습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결혼 후 매형은 가까이에서 처가 집 일을 자기 일 같이 처리해 주어 멀리 있는 아들들 보다 낫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 누나는 젊은 시절 고생만 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만 하다 좋은 시절 다 보냈다. 그래서 복을 받았는지 결혼해서 슬하에 일남 이녀를 두고 남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계시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팔십이 내일모레이고 허리 수술을 한 후유증이 있어 건강이 제일 문제다. 젊어서 누나의 도움을 받았으니, 무언가 보답해야 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지금껏 고맙다고 말 한마디 못 했다. 이제야 그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누님 정말 그때 고생 많이 하셨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 간에 무언가 틀어졌는지 소식들이 뚝 끊어져 왕래도 없는데 생각난 김에 오늘은 누나에게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들어 보고 싶다. 구심점이 있어야 만나기도 하는데 말로만 만나자, 하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부모님이 없으니, 형제간도 별 볼 일 없어서 진 것같이 너는 너 나는 나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다보다 더욱 서먹서먹해져 전화하기도 멋쩍어지고 무슨 일이나 있어야 꼭 전화하는 사이가 되어 버려 씁쓸한 마음만 든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형제간에 소식이라도 전해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