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과 양심의 정신으로 이끈 스마트 회계 개혁

[인중제고 사람들] (70) 김영식 전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 이희인 / 작가

2025-01-13     이희인

 

‘공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직업, 공인회계사 

자신의 이름을 인류 최초로 기록에 남긴 사람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 ‘쿠심’이 그다. 쿠심의 직업은 왕이나 제사장, 이름을 떨친 장군도 아니고 시인이나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 새겨져 우리에게 전해진 쿠심은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계수하는 사람, 회계 정보를 관장하는 사람, 오늘날로 치면 ‘회계사’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최고의 투자가로 꼽히는 워런 버핏이 회계를 기업의 언어라 일컬었듯이, 회계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 산업과 금융의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다.

해방과 전쟁 이후 오랫동안 빈곤을 면치 못하던 대한민국이 20세기 후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 글로벌 리더의 반열에 오른 배경에는 기업들의 경제 활동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이러한 초고속 성장을 뒷받침하고 견인하는 다양한 제도와 조직이 제 역할을 수행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의 투명성을 높여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도운 회계업 역시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중요한 영역이었다.

그 눈부신 성장의 한가운데, 임직원 4,300명 규모의 우리나라 최대의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의 CEO를 지내고, 얼마 전까지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역임한 김영식 동문(제물포고등학교 19회)이 있다. 회계 산업과 공인회계사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기업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헌신해온 김영식 회장은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의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변호사, 의사, 세무사 등 인접 전문직 중에 ‘공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직업이 있던가요? 오로지 회계사라는 직업에만 ‘공인’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그만큼 신뢰와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직업이라는 거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가며 김영식 회장은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가르친 ‘양심’의 덕목이 지난 45년간 공인회계사 일을 해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거듭했다. 곡절도 사연도 많았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김 회장이 말한 첫 일성은 “초등학교 때 공부를 아주 싫어하던 아이였어요”였다.

 

공부 대신 트럼펫을 불었던 초등학생 시절

김영식이 나고 자란 곳은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청이 자리한 중앙동 부근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인천에서 공무원을 하던 부친과 황해도에서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피난 내려온 모친 사이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영식은 특히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신 모친의 사랑을 늘 기억한다. 말을 안 듣고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어린 아들에게 모친은 학교에 가지 말라며 눈앞에서 가방을 통째로 아궁이에 던져 태운 일도 있다.

 

1979년

 

그럼에도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김영식의 초등학교 성적은 신통할 리가 없었다. 한 학년이 1,500여 명에 달했던 신흥초등학교에서 김영식의 성적은 중하층에 속했다. 반에서 분단과 자릴 정할 때, ‘수우미양가’ 성적순으로 했는데 김영식은 ‘양’ 정도의 자리였다.

당시 김영식이 흥미를 갖고 몰두한 것은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부는 일이었다. 일단 멋있어 보였다. 당시 신흥초등학교 밴드부는 인천은 물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으로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며 합주를 했다. 미8군 행사 덕분에 미국 국가도 배웠다. 규율도 엄격한데다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밴드부 선생님 탓에 그 많은 합주곡들을 외워 연주해야 했다.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경기가 있을 때면, 선수들 입장가는 물론 애국가, 퇴장가까지 연주했다. 그런 중요한 행사를 마치면, 1천원 가량의 수고비를 받은 밴드부 선생님이 어린 밴드부원을 학교 앞 중국집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곤 했다.

 

음악을

 

공부보다 음악, 미술 같은 것을 좋아했던 소년 김영식도 6학년이 되면서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며 성적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과외 하는 친구를 따라가 처음으로 과외 수업을 받았는데, 이런 소소한 노력들 덕분인지 졸업 무렵엔 반에서 20등 정도까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양’ 분단에서 ‘수’ 분단 끄트머리까지로의 진출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이전보다 공부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됐고, ‘공부가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자각을 했다.

 

제물포고등학교에서 배운 평생의 교훈

김영식은 그렇게 당시 인천은 물론 전국에서 명문으로 통하던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제물포고등학교에 오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똑똑하고 우수한 친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제고 다닐 때, 친구들이 정말 열심히들 공부했어요. 워낙 똑똑한 친구들이 많아서 친구들 곁에 앉아있다 보면 저절로 공부를 하게 됐죠. 제고 도서관도 아주 좋았잖아요.”

김영식이 흥미를 느끼며 잘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지창희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쳤는데, 엄청나게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으로 어떻게든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려 애쓰셨다. 그 덕분에 김영식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학을 좋아하고 잘하게 됐다. 이 무렵 형성된 수학에 대한 관심이 이후 회계사의 길을 선택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사교성이 좋은 김영식은 주변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제물포고등학교 19회 친구들과도 ‘진하게’ 사귄 편이다. 호주에 살고 있는 신형식이나 서울 사는 김현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초등학교 동창 심재선 같은 친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는 막역한 사이다.

그땐 깨닫지 못했지만, 제고 3년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있었다. 학교의 모토였던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정신이 그것. 회계사를 하며 제고가 가르친 ‘학식’과 ‘양심’의 덕목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양심’은 회계사의 직업윤리가 됐다.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혜안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문맹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학식’과 ‘양심’을 강조하신 것에 심오한 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고에서 시행하고 철저히 지켜왔던 무감독 고사, 주변에 말하면 다들 놀라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공인회계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매년 1,200명 정도의 수습 회계사들에게 교육할 기회가 있는데 그때마다 무감독 고사 얘길 합니다. 회계업의 가장 중요한 덕목도 ‘양심’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리 잡은 ‘양심’은 제고인들이 사회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힘입니다. ”

김영식은 ‘양심’의 덕목을 발전시켜 직원들에게 ‘3C’를 강조해 왔다. 양심(Conscience)과 배려(Consideration), 상식(Common sense)이 그것이다. 양심을 근간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상호 배려의 원칙, 그리고 상식에 입각한 생각과 판단이야말로 회계사의 중요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회계사가 아닌 ‘회개사’라는 말이 있어요. 회계사라는 직업이 매일 자신의 일을 반성하고 ‘회개(regret)’하는 사람, ‘regret man’이란 거죠.”

 

고려대학교

 

회계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곡절 많았던 대학 시절

197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영식의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입학 한 달 만인 1975년 4월 8일 18시를 기해, 학교에 긴급조치 7호가 내려졌다. 유신헌법 반대 데모에 적극적이던 고려대학교에만 특별히 내려진 휴교령이었다. 데모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친구가 참가자로 오인받아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의협심 강했던 김영식 역시 선배와 친구들 권유로 입학 뒤 한두 번 시위에 참가했는데, 그 당시 경찰 카메라에 찍힌 사진 한 장이 이후 계속 그를 괴롭히게 된다.

회계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런 과정과 맞물려 있다. 회계학 수업을 담당한 조익순 교수가 긴급조치 7호가 발동한 당일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강행한 것이다.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들에겐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신입생 김영식도 수업에 출석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캠퍼스에 수방사 군인들이 깔려 있었다. 김영식은 그 길로 종로에서 삼화고속버스를 타고 인천 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친구와 선배들이 그날 경찰에 잡혀갔다.

김영식은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이 없으므로 수업을 이어가겠다던 회계학 교수님의 소신에 반해 회계학 수업은 물론 회계학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3학년 때부터는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며 본격적으로 공인회계사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4학년이던 1978년 초여름 공인회계사 자격시험에 도전, 8월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10월 2일 삼일회계법인에 입사했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타 대학에 비해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많았지만, 제물포고 출신 중에는 8회, 9회에 각각 1명씩 있을 정도로 회계사 선배가 드물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김영식은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1975년 찍힌 사진이 화근이었다. 성북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하숙집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김영식이 누구를 만나고 몇 시에 들어왔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학생, 회계사 공부만 한다”고 응수하며 김영식을 지켜줬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지금도 고마운 은인으로 남아 있다.

사찰은 회계법인에 입사한 뒤에도 이어졌다. 대학 졸업 전에 입사한 김영식은 남은 학사과정을 모두 치러 졸업을 해야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찰을 담당한 형사가 인천 집까지 찾아와 시험도 보지 못할 상황이 되자, “중간고사를 못 보면 회계사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항의했고, 결국 형사 동행하에, 학교에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졸업식

 

1979년 10.26.과 12.12., 80년 광주항쟁 등 불안한 시국이 계속되면서 병역을 해결하는 것도 문제가 됐다. 사찰을 받아온 처지에 군에 입대하는 것이 위험하게 여겨졌다. 몸무게 43Kg의 약한 체력에 시력도 면제 기준을 넘어섰지만, 고학력의 김영식은 줄곧 ‘을종’ 현역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1981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4개월 보름 동안 동사무소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20대 청춘이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 경제의 위기와 도약을 함께 해온 회계사 시절

삼일회계법인 입사 직후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방위병을 마친 뒤 머리가 채 자라기도 전에 중요한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1983년 삼성전자가 처한 반덤핑 관세 이슈를 담당해 처리한 일은 그의 능력을 일찌감치 보여준 사례다. 당시 삼성전자가 수출한 컬러TV에 대해 미국이 덤핑 관세를 50% 가까이 부과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영식은 6개월 넘게 삼성전자로 파견을 나갔다. 당시 삼성은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문화였지만, 김영식의 퇴근은 밤 12시에나 가능했다. 그 결과 미국 상무성과의 다툼에서 덤핑 관세를 차츰 낮추어 나중엔 제로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처럼 삼성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에 전문 서비스를 제공해 기업들의 회계 정보에 신뢰성을 더함으로써, 외국 자본을 조달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주요 기업들의 해외 자본시장 진출을 돕는 자문 서비스를 담당했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무렵, 국내 기업의 회계 투명성을 높여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도운 셈이다. 이러한 글로벌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김영식은 1989년 10월부터 2년간 PwC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에 삼일 최초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된다.

 

삼일회계법인

 

김영식의 활약이 또 한 번 빛을 발한 것은 IMF 금융 위기 때였다. 기업과 경제의 체질 개선이 절실한 시기에 김영식은 삼일회계법인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기업 구조조정 서비스를 진행하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 구조조정을 위한 실사 및 평가 업무와 기업매각 자문, 해외 투자유치 자문 업무는 국가 경제의 새 판을 짜는 작업이었다.

김영식은 이 외에도 공공부문과 민간 비영리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정부투자기관 평가위원, 국민연금 기금운용 실무평가위원을 맡아 다양한 정부 부처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CJ나눔재단, 삼성복지재단, 고려중앙학원의 감사 등 민간 분야에서도 회계 전문가로서의 재능 기부로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영식은 2003년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 2003년 제4회 감사대상 공인회계사 부문 대상, 2004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회계업이라는 전문 분야에서 우리 경제가 겪은 위기와 도약의 한가운데를 돌파해 온 성과였다.

 

최대 회계법인의 CEO, 그리고 한국공인회계사회 협회장의 길로

회계법인의 핵심 서비스는 회계감사와 세무 자문, 재무 자문의 영역으로 나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세 분야 공히 전문성을 쌓아온 김영식은 2008년부터 3년간 삼일회계법인의 세무 부문 대표를 거쳐, 2011년부터 3년간 회계감사 부문 대표를 맡게 된다. 세무 부문 대표 역임 시에는 600여 명의 세무 전문가들과 함께 다양한 조세 문제에 대한 전문 서비스와 함께 정부 조세 분야 정책 수립에 필요한 전문지식도 제공했다. 회계감사 부문 대표를 맡으며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이 국내 시장에 안착하고 기업의 재무 정보 공시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2014년 7월 삼일회계법인 부회장을 거쳐, 2016년에는 삼일회계법인의 제4대 대표이사 CEO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CEO

 

김영식은 CEO 취임사에서 ‘스마트하고 믿음직하며 질서 있는 삼일’을 통해 ‘행복한 삼일’을 만들겠다는 경영철학을 내놓았다. 구성원들에게는 큰 열정과 바른 사고방식, 스마트한 지식을 주문했다. 이러한 경영철학이 토대가 되어 삼일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에 부족함 없는 조직이 된다면 임직원들이 행복해질 것이고, 임직원의 행복은 곧 그 가족, 고객, 그리고 사회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김영식 CEO의 이러한 행복경영은 성과에 치중하기보다 임직원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많은 기대감을 낳았다. 그렇게 이어진 행복경영은 평소 15%의 높은 퇴사율이 2년 만에 10%대로 떨어지는 성과로 나타났다. 현장 실무 회계사들을 위한 다양한 시도로 업무 환경을 크게 개선한 삼일회계법인의 변화는 타 회계법인들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회계업계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기도 전인 2014년, 삼일회계법인은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의 회계 서비스 공식 후원사가 됐다. 삼일이 소속 전문 인력을 현장에 파견해 회계 및 재정의 총괄 지원, 마케팅 전략 수립 지원 등을 통해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에 공헌한 것도 CEO 시절 그의 이력을 장식한다.

회사 내의 중책을 맡은 와중에도 김영식 대표는 한국공인회계사회의 홍보이사(2001~2007)와 대외전략위원장(2012~2016) 등을 역임하며, 회계 산업과 공인회계사의 위상을 높이고 업계 숙원 사업을 해결하는 데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2020년 6월 협회 최초의 모바일 투표를 통해, 쟁쟁한 후보자들을 물리치고 한국공인회계사회(한공회)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간의 활약과 공적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2020년에 이어 2022년 또 한 번의 모바일 투표에서도 회원들의 신임을 얻어 한공회 회장에 재임하게 된다.

재계와 정계에 두루 인맥이 두터웠던 김 회장은 회계 개혁의 성공을 위해 기업과 감사인 간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며, 업계 내부의 단합을 이끌어내 고품질 회계 감사가 이뤄지도록 힘썼다. 기업 규모에 맞는 적정 수준의 표준감사 시간을 책정하고, 감사 보수의 산출 근거도 제시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회계 투명성 확보를 위한 법, 제도 마련 등 회계 개혁의 제도 정착에도 주력했다. 대형 회계법인, 중견 및 중소 회계법인, 개인 감사반 회계사 간의 상생 협력에도 힘쓰는 한편, 한국공인회계사회 업무의 디지털 전환을 위해 20년 만에 전산 시스템을 개편하고 통합 플랫폼을 도입하는 등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스마트 회계 개혁’을 이끌었다.

김영식 회장은 2022년 한국공인회계사회 창립 68주년을 맞아 “국가경쟁력을 선도하는 회계 투명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한국공인회계사회의 비전 2030’으로 선포하고, 한국공인회계사회 영문 이니셜인 ‘KICPA’에 착안해 전문지식(Knowledge), 도덕성(Integrity), 상호협력(Collaboration), 공익 기여(Public Interest), 책임(Accountability) 등 다섯 가지 핵심 가치를 명문화했다.

 

조직의 리더로 살아가는 일

지난해 6월, 김영식 동문은 4년간의 한공회 회장 임기를 마치고 삼일회계법인으로 복귀했다.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10월 31일 여의도 FKI 타워에서 열린 ‘제7회 회계의 날’ 행사에서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40여 년 동안 철저한 윤리의식을 기반으로 감사 품질을 최우선 하는 정도감사를 수행해 국내 기업의 회계 투명성을 높여 국가경쟁력 강화에 이바지 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2024년

 

자기희생을 솔선해 보여줘야 한다는 김영식 동문의 리더로서의 철학이, 1조 원이 넘는 매출액과 임직원 수 4,300명 규모의 삼일회계법인은 물론, 2만7천 회원의 거대 조직인 한공회 수장의 역할을 수행해 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한공회 회장 퇴임 후 삼일회계법인의 전임 CEO이자 상근고문으로 돌아온 김 동문은 비록 현장에서 직접 뛰지는 않지만, 본인이 2년 전 선포했던 한공회 비전과 핵심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김영식 동문은 회계사 업무 이외에도 평소 건축과 미술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이들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왔다. ‘저 건물은 왜 저렇게 지었을까?’ 건축가의 생각이나 철학을 알아보기 위해 현대 건축에 대한 전문가 수업(AMP 과정)을 수강했고, 틈틈이 해외 유명 건축물을 답사했다. 현대 건축의 거장인 프랭크 게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일본의 건축가들인 안도 다다오나 이타미 준을 비롯해,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2018년 영국의 유명 건축가인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빌딩으로 회사를 이전할 때는 회사 내부 인테리어 작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직원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보람된 경험으로 기억된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인터뷰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AI 기술이 회계산업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물었다. “그래도 회계업의 가장 중요한 일들은 결국 인간이 하는 것 아닐까요?” 돌아온 대답은 명확했다. 사람이 하면 며칠씩 걸리는 계약서 요약 같은 일을 AI는 순식간에 놀라울 정도로 잘 수행한다. 그래서 회계업계에도 AI를 활용한 감사 업무의 효율화를 꾀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으로 활용될 뿐이라는 얘기다. 회계의 기준을 만들고 결정적 판단을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초의 회계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쿠심’으로부터 AI가 인간의 영역을 위협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능력은 변함없이 위대한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