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류 중독자 치료, 어언 40년 외길
[인중제고 사람들] (72) 마약 중독 치료 전문의 조성남 원장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마약류 중독자 치료, 어언 40년 외길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바로 그들 중국인과 인접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뙤놈들’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쿠리,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을 내어 형님도 한 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덩어리였다.”
소설가 오정희의 대표작 ‘중국인 거리’의 한 구절이다. 한때 우리는 마약하면 ‘아편’을 먼저 떠올렸다. 구한말 중국인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아편은 이 땅에 가장 먼저 유입되어 남용된 마약류다.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 중에서 아편에 중독된 자가 많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의료시설 미비로 인하여 농촌 지역에서는 양귀비를 몰래 경작했고 아편 중독자는 급속히 증가했다. ‘룸펜’과 더불어 ‘아편쟁이’는 당시 소설이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아편에 이어 필로폰이 등장했다. 5, 60년대 일본 정부가 필로폰 제조 단속을 강화하자 야쿠자 조직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필로폰을 제조했던 한국인 기술자들을 찾아냈다. 한국에서 필로폰을 제조하게 하고 이를 일본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대마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섬유용으로만 재배되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5년경부터 도취감을 일으키는 물질로 전파되어 대마 담배 흡연자들이 생겼다. 주한 미군 기지촌을 근거지로 대학가와 연예계에 대마 흡연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1975년 대대적인 단속을 전개해 유명 가수들이 구속되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 터졌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향락문화가 극에 달하였고 일본으로 밀수출하던 필로폰이 국내에 퍼지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검찰이 필로폰 공급책을 강력하게 단속하면서 국내 유통이 어렵게 되자 가격이 폭등하였다. 청소년들은 값싸고 구입이 용이한 대체재에 손을 댔다. 본드, 신나, 부탄가스 등을 흡입하는 아이들이 증가하였다.
2000년대 급격한 개방화와 국제화 추세에 따라 외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확대되었다. 마약도 취향이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필로폰에서 구미 등 선진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야바, 엑스터시 등 신종마약류가 국내에 밀반입되어 외국인과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야간 업소와 대학가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한해 마약류 투약자 40만명
마약(Narcotics)은 그리스어 Narko(to make numb, 감각을 없애는)에서 유래한 단어다. 정신 마비, 진통, 다행감, 탐닉 등 의존과 남용을 유도하는 성질을 지니고,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심각한 보건 사회적 폐해가 발생하는 약물을 의미한다.
이제 마약은 간판이나 메뉴판에 버젓이 적혀 있는 일상 용어가 되었다. ‘마약핫도그’ ‘마약떡볶이’ ‘마약김밥’ ‘마약국밥’ 등 중독될 만큼 맛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음식에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심지어 마약침대, 마약텐트, 마약의자 등과 같은 것도 등장했다.
‘마약’이란 단어가 자극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는 바람에 웃지 못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경남경찰청의 어느 마약범죄수사관이 현장에서 겪은 일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어느 날 한 초등학생의 부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마약 사범이 체포됐다는 뉴스를 TV로 보던 아이가 “왜 맛있는 것을 파는 사람이 잡혀가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마약’은 맛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 이제는 ‘마약’이란 표시를 금지하는 식품표시광고법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짜’ 마약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마약 사범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젊은 층과 여성층의 확산이 가속도가 붙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우리나라 전체 마약류 투약자는 40만530명으로 추정됐다. 입건된 마약사범을 근거로 그 숫자의 30배 정도를 고려해 전체 투약자로 추산한 것이다. 이는 인천 연수구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다.
유치원 때부터 ‘SAY NO’ 교육 강조
조성남 원장은 우리나라 마약류 중독자 치료와 법정신의학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전문가다. 4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약물 중독자를 치료한 마약중독자 치료의 일인자로 그의 이름 앞에 ‘마약 중독자들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다.
조 원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 충무로로 향했다. 서울(남산)유스호스텔 아래 필동 골목 카페에서 그와 마주했다. 그날 그는 유스호스텔에서 3일간 진행된 ‘답콕(DAPCOC)’ 연수교육 수료식을 막 마치고 내려온 길이었다. 답콕(DAPCOC·Drug&Addiction Prevention Center On the Campus)은 대학교를 중심으로 마약류 오남용 예방 교육 활동을 이어오는 민간단체다.
최근에 보도된 ‘대학 마약 연합동아리’ 사건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을 비롯해 명문대생들이 포함된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13개 대학의 수백 명이 마약 연합동아리를 조직했다. 회원은 직접 면접을 봐서 선발했고 기수별로 동아리를 운영했다.
이들은 2022년 12월부터 1년 동안 동아리에서 만나 마약을 구매해 십 수차례 투약하다 검찰에 적발되었다. 그들은 서울에 ‘아지트’ 성격의 아파트까지 갖췄다. 아지트 외에 놀이공원, 뮤직페스티벌, 고급호텔, 제주도, 태국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모여 투약했다.
“우리 사회는 학생들이 하는 음주, 흡연을 한때의 호기심으로 관대하게 봐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술과 담배는 마약중독과 같은 약물중독에 이르게 하는 입문 약물(gateway drug)로 술과 담배를 하는 아이들이 약물중독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게 현실입니다. 외국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SAY NO’ 교육을 합니다.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세뇌 교육을 받는 것이죠. 그래야 약물의 유혹이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절할 힘이 생깁니다.”
그는 단 한 차례만 손을 대면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된다는 것을 유치원에서부터 예방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원장과의 두 시간 가량 인터뷰를 통해 ‘이게 정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할 정도 믿기지 않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새삼 관심을 갖고 보니까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약류와 관련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미군 부대 옆의 유년 시절
조성남은 1957년 인천 부평 신트리에서 태어났다. 도심지는 아니었지만 주변에 큰 공장들이 있었던 영향인지 마을에 요정이 3개가 있을 만큼 번잡했다. 5세 때 인근 동네로 이사했고 부평동국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좀 있었다”다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남녀 혼성반이었던 4학년 때까지는 여자애들의 몰표로 언제나 반장으로 뽑혔다. 5학년부터 남자반, 여자반으로 갈라지고 나서부터는 반장에 계속 떨어지고 부반장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조성남의 선조들은 부평 인근의 박촌(당시 김포군) 지역에서 큰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부친은 6.25 참전 용사였고 중사로 제대했다. 전역 후 부평의 미군 부대와 인연을 맺었다. ‘경원’이라는 인력용역회사를 차리고 미군 부대에서 일할 사람들을 공급했다. 그 덕에 친척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미군 부대에서 일할 수 있었다. 변변한 직장이 없던 그 시절 미군 부대에서 일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에 취업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말로 미군 부대에서 똥 치울 사람 한 명만 모집해도 장사진을 쳤던 시절의 이야기다.
가을이 되면 가끔 미군들이 마을에 와서 추수 작업을 돕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탈곡기 작업을 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탈곡기는 그들에게 매우 신기한 농기구이자 놀이 기구였을 것이다. 어느날 한 미군이 어린 조성남에게 선물을 하나 줬다. 손에 착 붙는 작은 주머니칼이었다. 오랫동안 부평 소년 성남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애지중지했던 ‘미제’ 물건이었다.
고교 시절에 배운 탁구의 효용
부친의 ‘유망한’ 사업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성남은 곧 첫 번째 경쟁 사회에 뛰어든다. 바로 중학교 입시였다. 부평에도 중학교가 있었지만 부평 아이들의 희망은 동인천 쪽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반에서 1, 2등 하는 아이들은 무조건 인천 최고의 명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목표로 공부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침마다 라면을 먹고 오전 6시에 등교했다. 당시 라면은 지금처럼 그냥 한 끼 떼우는 허접한 음식이 아니었다. 아직 라면이 대중화되기 전으로 수험생 아들을 위한 최고의 먹거리였다.
귀한 라면 먹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담임 선생님은 그에게 상인천중학교 원서를 내밀었다. 당시 배다리 근처에 있던 상인천중은 인천고와 함께 교정을 쓰던 학교였다. 담임은 인천중보다는 합격 안정권의 상인천중을 권한 것이었다.
중학교 진학으로 부평을 벗어나 매일 배다리로 등교했다. 당시 배다리는 인천의 중심가로 사람도 많았고 처음 보는 가게들도 즐비했다. 학교를 파하고 가끔 버스를 타지 않고 부평 집까지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다. 십정동을 거쳐 갔는데 그때 인천이란 도시의 공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2학년 때 학교가 당시 교외였던 간석동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다시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 풍경을 지겹게 보게 되었다.
1972년 제물포고(19회)에 진학했다. 마침내 제대로 된 동인천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은 기차 타고, 어느 날은 버스 타고 집과 학교를 오고 가는 먼 길이었지만 공부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교문에 들어섰고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었다. 매일 밤 10시가 되면 자유공원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선도 방송이 나왔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이 방송을 들으며 매일 동인천역으로 내려갔다.
그렇다고 공부만 했던 범생이는 아니었다. 운동을 무척 좋아했다. 고2 때인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땄다.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난리가 났다. 이 분위기는 곧바로 탁구 열풍으로 이어졌다. 마침 동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오르는 언덕길 주변에 탁구장이 많았다. 그도 틈만 나면 라켓을 쥐었다. 그때 갈고 닦은 탁구 실력은 후에 국립법무병원에서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핑퐁은 중독자들의 마음을 여는 최고의 치료제였다.
동인천 탁구장에는 한쪽 구석에 미니당구대가 있었다. 틈틈이 큐대도 잡았다. 제고 학생들은 당구도 학구적으로 했다. 교실 칠판에 당구대를 그려 놓고 “쓰리 큐션이 어떻고, 각도가 어떻고…” 토론을 자주했다. 그 덕에 대학교 1학년 때 당구 실력이 300이었다. 이 또한 의사 시절에 한몫했다. 온몸에 문신이 그려진 조폭 출신 중독자들과 당구를 치면서 그들의 마음을 히네루(회전) 시키고 혹은 마세이(찍어치기) 하는데 나름 역할을 했다.
인천 출신인 그는 바다를 뒤늦게 접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부평벌과 후에 중학교를 다니던 동선이 바다와는 몇 걸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송도유원지로 소풍 갔을 때다. 그것도 갇혀 있는 바다를 본 게 고작이었다.
그가 배를 처음 탄 것은 고3 때다. 그 사연도 재미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여자 담임 선생님(김현숙)을 무척 따랐다. 그 선생님이 다시 4학년 때 담임이 되었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 때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그 담임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는 옹진군 시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만사 제쳐두고 그 일행에 끼었다. 남자는 조성남뿐이었다. 그때 그는 제대로 된 바다를 보았고 처음 배를 탔다.
“의사 중 최고는 정신과 의사”라는 그 한마디
그에게는 4살 터울의 큰 누나가 있다. 누나 친구 중 제물포고를 졸업(15회)하고 연세대 의대에 진학한 권상옥 선배가 있었다. 조성남은 그에게 과외를 받았다. 선배는 틈만 나면 프로이드, 칼융 등의 철학을 언급했다. ‘이빨’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입담이 좋았다. 조성남은 그에게 쏙 빠졌다. 그의 과외 선생님은 “의사 중 최고는 정신과 의사”이라고 자주 열변을 토했다. 성남은 의대에 진학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작 권상옥 선배는 본과 1학년 때 ‘내과’를 택했다. 내과 전문의가 되어 나중에 원주기독병원 교수가 되었다.
조성남은 고려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전공으로 신경정신과를 택했고 우리나라 정신과의 본산인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다. 군의관으로 공군에 입대해 서울 대방동에 있는 국군항공의학연구원에서 신경정신과장으로 근무하고 전역했다.
1987년 충남 공주에 법무부 산하에 치료감호소(현 국립법무병원)가 설립되었다. 그곳의 의료부장이 고려대 의대 10년 선배였다. 88년 4월 제대하고 5월에 바로 치료감호소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환자는 마약중독으로 조현병을 앓아 6개월 딸을 살해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범법정신질환자들과 마약류중독자들을 치료하는 최일선에 서게 되었다.
국립공주정신병원 의료부장(1999~2002)으로 근무한 후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국립부곡병원 원장(2002∽2011)을 역임하였다. 그 병원에는 약물중독진료소가 부설되어 있어 마약류 중독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했다. 2011년 명예퇴직 후 을지대학교 중독재활복지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그 대학에서 운영하는 강남을지병원 원장을 맡아 병원 내에 중독브레인센터(Addiction Brain Center)를 개설하여 중독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였다. 2019년 첫 직장인 국립법무병원의 원장으로 복귀하였다.
우리나라에 약물중독재활센터(DARC) 처음 도입
그는 오래전부터 마약 치료 인프라 확대를 주장해 왔다. 알코올·도박 중독자처럼 마약 중독자도 ‘중독’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며 마약은 발굴과 치료가 쉽지 않아 인프라와 지원체계가 중요하다고 늘 강조한다.
중독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만성질환으로 마약류 중독자들을 교도소에 잡아넣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치료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치료로 재범을 줄이는 것이 처벌하는 것보다 약물중독 억제에 효과적입니다. 투약자 강력처벌은 세계적으로 이미 실패한 것으로 증명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투약자들을 구치소·교도소로 보내는 데 대마(투약)로 들어간 사람이 출소 뒤 필로폰을 합니다. 투약자가 판매상이 돼서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데 결국 처벌이 약물중독을 확산하게 합니다. 치료가 따라오지 않으니 자기들끼리 ‘말뽕’(약물을 할 때 기억을 서로 말하면서 약물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행위)을 하는 등 교도소·구치소는 ‘약물중독재발학교’ 역할만 하는 꼴입니다.”
그는 마약류 중독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현 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1996년부터 그가 치료하던 중독자들을 매월 두 번째 화요일에 만나는 ‘이화모임’을 가져오다가 2004년 공식적으로 단약자조모임(NA, Narcotics Anonymous)을 결성했다. 현재 10개의 자조모임에서 200여 명이 매주 회복모임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2012년 회복자들이 운영하는 약물중독재활센터(DARC, 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 개설을 기획하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우리보다 앞서 70여 개의 다르크를 운영하는 일본 측과 연결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다르크에서는 약물 중독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스스로 재활치료를 한다, 함께 생활하는 중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깨달으면서 과거의 생활방식을 수정해 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치료했던 회복자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매우 예민한 금기 사항이지만 그들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기꺼이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이다. 회복자 가운데 순간적인 ‘욕구’의 갈림길에서 그와의 긴급한 통화로 인해 위기를 넘긴 사례는 적지 않다.
조 원장은 열악한 치료관리 체계를 극복할 묘안으로 한때 마약 중독자였다가 치료·재활로 회복한 뒤 마약 치료사 교육을 받은 ‘회복 강사’의 활용을 줄곧 제안했다. 회복 강사는 본인이 경험했기 때문에 환자 이해도가 높고, 진심 어린 독려로 환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전문가보다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그에게 치료를 받고 중독에서 회복한 사람들이 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획득하고, 정신보건전문요원 수련을 받아 중독치료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전과 5범의 여성도 있다.
2018년 조성남 원장은 을지대학교 중독재활복지학과 교수(을지중독연구소 소장)로 재직할 때 국내외 25개 언론 및 문화예술단체가 공동 주관하는 ‘대한민국 무궁화 평화대상’ 사회공헌의료 마약퇴치부문에서 최고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2022년 ‘제18회 제고인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고인상’은 제물포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모교를 빛낸 동문을 선정해 시상하는 포상이다.
그는 현재 국립법무병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시 은평병원 마약관리센터 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센터는 지난해 10월 지자체 최초로 개소한 마약 전문 치료센터다. 현재 대한법정신의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중독포럼 공동대표, 식약처 마약류안전관리심의위원, 법무부 성폭력약물치료자문위원회 위원 등 마약 관련 분야에서 전방위로 활약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던진 그의 한마디가 인천으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이제는 열세 살짜리 아이가 30분 안에 마약을 손에 쥘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