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송 기자에서 서울방송 사장까지, 인천 출신 송도균 앵커
[인중제고 사람들] (78) 송도균 SBS 전 사장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송도균(宋道均, 1943~ ) SBS 서울방송 전 앵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를 방송사 사장을 지낸 인물로서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평생을 언론인, 방송인으로 지내왔어도 실제 시민들과 대면한 시간은 크게 길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뉴스 앵커로서 정확히 1996년 10월 14일부터 이듬해 6월 27일까지 불과 8개월 두 주일 동안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아갔던 정도이니 깊이 각인이 되지 않았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그 앵커 시절조차도 이미 근 30년 전에 지나가 버렸으니….
그러나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연만(年晩)한 분들은 혹 그의 얼굴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가 시민 대중이 즐겨 채널을 맞출 만한 흥미로운 프로보다는 정치인과의 현안 대담이나 시사 토론 프로의 사회를 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관련 MBC TV 프로였던 <통일 전망대> 첫 진행자로서의 기억도 얼마간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캄캄한 장막 저쪽의 북한 동포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하는 궁금증에 대한 대답으로서 당시 제법 관심을 끌었던 프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는 할 수 없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역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까닭에 그에 대해 ‘앵커’라는 호칭으로 글을 쓰는 것이 과연 어울리는 것인지 스스로 의아스럽기는 하나, 이쯤에서 그의 언론인 첫 입문부터 평생 방송인으로 살아온 이력들을 살펴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송도균 앵커는 황해도 연백 출신이다. 인천에서 성장해 1963년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오고, 이어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70년 옛 TBC 동양방송 공채 7기 기자로 입사하면서 방송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동양방송 입사 후 그는 10년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기자로서 두루 경험을 쌓는다. 그러다가 1980년 11월,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동양방송이 KBS에 통합되면서 KBS 외신부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이듬해 1981년, 또 한 번 MBC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MBC 방송은 신군부에 의한 강제 통폐합 조치는 면했지만, 주식의 65%를 KBS에 넘김으로써 KBS의 자회사(子會社) 격이 된 상태였다.
MBC로 옮겨 4년 세월을 지낸 1985년 7월, 송도균 앵커는 보도국 외신부장이 된다. 그리고 1986년 2월에 보도국 보도제작부장, 연이어 3월에 보도국 정치부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1987년 2월에는 MBC TV 밤 9시 <뉴스 데스크> 이득렬 간판 앵커가 물러나면서 후임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송도균 앵커가 시청자의 눈길을 끈 것은 이해 8월 26일 밤 <뉴스 데스크> 시간에, 당시 민정(民正), 민주(民主) 양당 중진 4인을 초청해 가진 시국 토론 프로 <긴급 여야 토론> 사회자가 되면서였다. 당시 공영방송인 KBS와 MBC 모두 편파 보도 시비에 휘말려 있던 가운데, 전날 KBS의 방송에 이어 MBC도 뉴스 시간에 그 시비에 대한 해명성(?) 프로로 내보낸 것이었다. 이 같은 미묘한 정치 보도 문제였기 때문에 베테랑 송도균 정치부장을 사회자로 내세워 양당의 주장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방송으로 양당의 불평성 발언을 “굴절 없이 전달했다”는 평가와 함께 “공영방송체제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로 진행 형식의 새로움과 함께 ‘TV가 저런 내용도 방영할 수 있구나’ 하는 평범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켜주었다”는 당시 일간 신문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프로가 방영되고 이듬해인 1988년 3월에 들어 그는 보도국 정치부장 겸 해설위원이 된다. 사내에서 이미 그의 방송인으로서 특장점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이후 1988년 6월에는 보도국 TV 편집1부장으로, 그리고 11월에는 간판 앵커 교체로 인해 생긴 공백 며칠간 <뉴스 데스크> 진행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1989년 3월, 부국장대우 북한부장으로 승진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통일 전망대> 프로그램의 첫 사회자로서 방송에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송도균 부국장의 진면목이라면 역시 정치 시사 프로그램의 사회자, 토론자로서 모습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차분하면서 논리적이고 명쾌한 언변으로 깔끔하게 사회를 봄으로써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1990년 MBC 방송 보도국 부국장 시절, 당시 민자당(民自黨) 최고위원이었던 김영삼 위원 초청 관훈(寬勳)클럽 토론회 패널리스트로 참가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그 당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의 회동으로 탄생한 통합신당 민자당의 창당 배경과 정국 운영 등에 대해 세간에서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토론회였다.
곁가지로 흐르는 이야기이지만, 이 토론회 당시 주최 측인 관훈클럽 총무가 인천 출신 원로 언론인 신용석 씨였고, 송도균 부국장은 신 총무의 인천중학교 3년 후배라는 인연이 있음도 밝힌다.
1992년 SBS로 옮겨서도 그의 시사 프로 사회와 토론 주특기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1995년 2월 22일에 방영된 ‘정치 선진화의 조건 - 특집 토론’ <행정구역 개편과 지방자치제> 진행에서부터, 5월 29일에 방영된 <‘95 4대 선거 인천시장 후보 특별회견> 패널리스트, 6월 9일 경기지사 후보 특별회견 패널리스트, 6월 18일, 정원식, 조순, 박찬종 세 후보 초청 <서울시장 후보 100분 대토론회> 사회로 활약했던 것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앞서 7월 <여야 3당 대통령 후보 초청 TV 토론회> 자문위원회 위원 역할과 별도로 김종필 자민련 대통령 후보 토론회 사회를 맡았고,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에는 SBS 방송이 단독 주관하는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 진행을 맡아, 20일 첫날 조순 민주당 후보, 21일 이인제 국민신당(가칭) 후보, 22일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 23일 김종필 자민련 후보, 24일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 순으로 연속 5일 동안의 토론회 사회를 통해 오랜 기자 생활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현직 앵커로서의 능숙한 진행 능력을 발휘해 절제 있으면서도 매끄럽게 토론회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기자에서 사장이라는 직함에 오르기까지 마지막 방송 언론인 인생 마지막을 장식한 그의 SBS 시절로 돌아가 보자. 송 사장의 MBC로부터 이직 사실은 1992년 1월 10일, 문득 ’SBS 서울방송 보도국 국장직무대리 발령‘ 기사가 각 일간지에 실림으로써 세상에 알려진다.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KBS와 MBC를 상대하기 위해서 후발 SBS로서는 당연히 오랜 취재 경험과 보도 제작 경력이 풍부한 핵심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해결책이 곧 송도균 보도국장 직무대리 영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날짜가 1991년 12월 9일, SBS TV가 개국 첫 방송을 송출한 지 꼭 한 달 만인 이듬해 1992년 1월 10일이었다.
송도균 보도국장 직무대리는 SBS 입사 1년 만인 1993년 2월에 보도국장으로 승진하고, 1994년 12월에 보도국 이사대우 해설위원장이 된다. 이후 1996년 8월부터 이사대우 보도본부장 직무대리 직책을 맡고, 10월에 드디어 SBS TV 간판 뉴스프로그램인 평일 저녁 8시 ‘뉴스 8’의 얼굴이 된다.
이로써 1970년 구 동양방송 입사를 시작으로 26년 동안의 방송기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카메라 앞에 직접 나서서 뉴스를 전하는 앵커 역을 맡은 것이다. 이것은 SBS의 보도 프로그램 강화를 위해 첨병 역할을 자임한 것이었다. 물론 사측에서는 보도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인 보도본부장을 TV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중량급 앵커’에 의한 ‘뉴스의 중량감’을 강화한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뉴스 8’ 앵커로 뛰어든 송도균 보도본부장의 첫 일성은 “나열식 뉴스를 지양하고 소비자 중심으로 진행”한다는 방향 언급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지론인 ‘앵커의 자질’ 을 밝힌다. “난해한 기사를 평이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 혼란스러운 사회나 사건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를 것, 또 시청자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와 어법을 몸에 익힐 것.” 매일 저녁 시청자 앞에 나서는 뉴스 앵커가 잊어서는 안 될 필수 지침이요, 금언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SBS가 종래 부장급 앵커의 뉴스 방송에서 일약 이사급 앵커를 등장시키는 파격에 따라 당시 신문에서는 세 방송사 간에 벌어질 뉴스 경쟁에 대해 “뉴스 삼국지(三國志) 대권을 둘러싼 방송시간의 경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니 “시청률 싸움 뉴스 삼국(局)지”니 하는 등의 표현을 쓰면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생각해 보면 1996년 10월 당시, 방송가의 화제는 어찌 보면 송도균 보도본부장의 ‘앵커 등장 건’이 몰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뿐만 아니라 이듬해 3월 3일, 다시 한번 뉴스 전쟁의 불이 붙는다. SBS가 저녁 뉴스 방송시간을 8시에서 1시간 늦춰 KBS와 MBC처럼 9시로 옮기는 것이다. SBS가 타 방송과의 차별화를 내세워 개국 당시부터 방영해오던 8시 저녁 뉴스를 밤 9시로 옮기면서, 기존의 KBS, MBC와 치열한 3파전 시청률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곁가지 이야기를 한다면, 그 당시 SBS 9시 뉴스 주인공 앵커가 바로 송도균 아나운서와 여성 아나운서 한수진 씨였다. 공교로운 것이 송도균 아나운서는 제물포고등학교 7회 졸업생 인천 인물이고, 한수진 아나운서는 그 선친이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낸 고 한영국(韓榮國) 선생이라는 점에서 이 뉴스팀 앵커 두 사람이 인천과 직간접의 인연을 가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SBS의 메인 뉴스 방영 시간 변경은 불과 3개월여 만에 환원되고 만다. 시청률 저조가 그 원인이었다. ‘SBS 뉴스 하면 오후 8시를 떠올린다’ ‘타사보다 1시간 빨리 볼 수 있어 좋았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앵커 자리를 물러나 보도본부장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12월, 이사대우에서 정식 이사 편성본부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1998년 8월에는 곧바로 상무이사 기획편성본부장으로 승진한다. 1998년 11월에 들어 보도본부장으로 재차 자리를 옮겨 앉았다가 1999년 3월에 마침내 최고 경영자인 사장에 선임되는 것이다.
이로써 송도균 사장은 방송사의 대표 자리가 정권과 연관되는 허다한 선례를 깨고 순수 SBS 내부 직원 승진의 첫 사례로서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이 기록은 SBS 서울방송은 물론, 한국 방송사(放送史)에도 한 자취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송 사장은 취임 일성으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시민의 여망에 어긋나지 않게 국민정신을 순화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구현하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 편성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는 방송 기본 방침을 밝혔다. 경영 측면에서도 급변하는 사회와 시대 변화에 선도적,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사세 확장을 꾀할 것을 천명한다.
사장으로서 첫 사업은 취임 3개월에 이루어진다. 6월에 SK상사가 소유하고 있던 골프 채널 지분 51%를 인수한 것이다. 송 사장은 이를 통해 ‘위성방송 채널과 연계해 골프를 주력 스포츠 분야로 삼아 종합스포츠 채널로 전문화함과 동시에 코스닥 등록’을 목표로 내세움으로써 공중파 방송사들의 케이블TV 인수 경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1999년 7월, 송도균 사장은 2000년 1월부터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다는 또 하나의 야심작을 내놓는다. 이를 위해 8월 말경에 방송사 최초로 인터넷 벤처회사를 설립할 계획도 발표한다. 인터넷 방송은 2001년부터 시작될 디지털 방송에 대비해 콘텐츠 확보에 주력한다는 이야기이다. ‘지상파 방송을 통해 구축한 프로그램을 인터넷 방송과 케이블 TV에 활용, 다채널 시대에 대비해 매체력을 극대화한다는 의욕적인 구상이었다. SBS는 9월 13일에 앞당겨 사내 TV 주조정실에서 ’디지털 TV 방송국‘ 개국식을 가지는 것이다.
방송 자문변호사제도 도입 역시도 송도균 사장의 경영 마인드를 엿보게 한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자문변호사제를 도입함으로써 프로그램과 관련한 개개인 사생활 침해 사례를 사전에 예방함으로써 공정하고 책임 있는 방송을 구현한다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방송 현장의 실무에 통달했고, 방송사 경영 능력까지 두루 겸비했다는 송도균 사장은 2005년 2월 후임 사장 취임으로 상임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6년간의 사장 재임 기록을 세운다. 혁신적 적극 경영을 펼쳤으면서도 큰 잡음이 없던 재임이었다.
송 사장은 방송 언론과 관련한 여러 사외 기구의 직책도 수행했다. 1991년 관훈클럽 감사를 시작으로 통일자문위원, 1996년 한국방송기자클럽 부회장, 2001년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 운영위원,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2003년 6월, 제10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2008년 3월, 방송통신위원회 초대 부위원장, 2012년 OECD장관회의 준비위원장, 지역방송발전위원회 위원장, 2013년 2월, KT 사외이사를 거쳐 KT 이사회 의장, 2018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밖에 대학 강단에도 서서 2000년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내고, 2005년 사장 퇴임 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언론정보학부 정보방송학과 석좌교수 등을 지내기도 했다. 2007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양심과 신의와 학식을 남아(南兒)의 생명으로 강조하신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의 창학 이념을 몸에 익혀 참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출신 언론인은 상당수에 달한다. 송도균 사장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고작 별명 하나가 있을 뿐인데, SBS 사내에서 불리던 ‘흑송(黑宋)’이 그것이다. 보도국장 시절 종씨인 백발(白髮)의 송석현 보도부국장과 구별하기 위해 직원들이 지어 부르던 별명이라고 한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출신인 고 송도익(宋道翼) 전 서울광고기획 부사장(서울카피라이터스 회장)은 제물포고등학교 1년 후배이자 친아우이고, 유명 성우 송도순(宋道順)은 6촌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