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꾼

[문학의 향기] 정민나 / 시인

2013-01-10     정민나
사진 19.JPG
“삶이 삶다운 것은 이 삶을 삶답게 하지 못하는 것들의 무게를 의식할 때이다.” 라는 경구가 떠오르게 하는 책! ‘인력거 꾼’에 나오는 인간 삶의 상승도, 하강도, 몰락도 전진도 없이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아찡의 삶은 마치 근원이 없는 세계에 잠시 비춰졌다 사라지는 흔적 같았다.
전체적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여도 그 세계와는 동 떨어진 미미한 타자로서 살 수 밖에 없는, 경계의 벽 앞에서 생명의 연쇄는 보이지 않는다. 한계의 연속선상에서 주인공은, 이 생애의 불연속성에 대해 그리고 별다른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뭇생명에 대해 떠올려 보게 한다.
누더기와 짚을 깔아놓은 잠자리에서 찌그러진 문을 열고 나와 쪼빙(떡)으로 요기를 하고 일을 하러 가는 시간과 풍경은 누추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단함과 지지부진한 삶에서, 살아있음에 대한 사랑이나 긍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리 밀쳐지고 저리 밀쳐지는 하루살이 같은 악착같음과 시장바닥의 고함소리 같은 것들이 섞여 피폐한 현실만이 보일 뿐이다.
그나마 아찡 생애의 미미한 움직임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남경에서 온 막차 손님을 태우고 일원이라는 넉넉한 노임을 받아내고 나오는 길에 바로 미국 해군을 만나 팔레스 호텔까지 가서 이십 전짜리 은전 한푼과 동정 열두 푼을 받아낸 일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소위 ‘존재’와 ‘생성’으로 대변되는 강한 인간의 형상이라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하루살이 인력거꾼은 ‘전망’이나 ‘꿈’ 같은 그림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밧줄 타는 사람’도 되지 못한다. 밧줄 타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변화와 변신을 추구하여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는가? 비록 구체적인 전망과 확신을 가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모험을 향해 한 발짝 발을 떼기라도 한 인물이다.
매일의 달음질이 자기도 모르게 억압된 상태로 사회의 역동성 속에 얽혀 들어간다면 무슨 의미와 기쁨이 있을까? “몸과 몸이 행동을 통해 서로 관계하면서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 때 미물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끌기 시작한지 3년 만에는 모두 죽는다.”는 순사부장의 말에서 확인되듯 아찡은 세계와 절대적으로 격리된 타자의 삶을 살다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서 필자는 하루살이 삶과 같은 불연속성과 익명성을 읽게 된다. “살아있다는 증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f1 주룩주룩 비가 새고 있었어요
f2 우물우물 다 식은 먹이를 뜯어 먹고 있었어요
f3 킁킁 냄새만 맡다가 기린처럼 서서 잠을 잤어요
가만히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림자 벗을 수는 없을까 무조건 굶어 보다가 허물을 벗을 수는 없을까
f4 살금살금 다가섰고
f5 초롱초올 빛나기도 했지만
난폭하게 낚아채는 그림자 순진한 초식동물과 잠복한 악어 양면을 가진 시간의 모서리에 찔리기도 했어요
f6 아프게 후루룩
f7 무심히 폴딱폴딱
f8 시끄럽게 윙윙윙
많은 개구리가 지나가고 많은 별들이 지나간 얼굴은 쉽게 잡히지 않았어요 술술술 바람으로 빠져나가고 줄줄줄 빗소리로 새어나가고
f9 붉은 물고기였다가
f10 짙푸른 종다리였다가
f11 오렌지 바나나 백합이었던 건 잠시
밟으면 쨍! 여러개의 둥고선으로 퍼져 나갔어요 지층마다 검은 줄무늬 옷을 갖게 되었어요
 
필자의 졸시 -<시베리아 암컷 호랑이 - 시간 혹은 함수 구하기> - 함수(function)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호랑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호랑이의 사소한 생태적 특징 속에 지루한 일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비를 맞는 호랑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호랑이는 그 옛날 야생의 숲에서 자유로웠던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마치 ‘인력거꾼’에 나오는 아찡의 삶처럼 반복되는 일 속에서 감정의 표정 없이 하루살이 같이 살아가는 존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형태와 개성을 가진 고유한 존재이다. 마치 밟으면 쨍! 퍼져 나가는 등고선처럼 붉은 물고기였다가 짙푸른 종다리였다가, 오렌지, 바나나, 백합 등 그 감각의 이면에는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시 공간과 같은 생명이 존재한다.
시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등고선’은 호랑이의 검은 줄무늬 옷을 환기 시킨다, 계량적인 분석이 가능하여 지형을 보다 과학적으로 계측 분석할 수 있는 연결선이 등고선인 것처럼 순진한 초식 동물과 잠복한 악어 사이에서 분열하던 호랑이가 줄무늬 옷을 갖게 되면서 호랑이의 온전한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못한 채 쓸쓸이 죽어가는 아찡을 보면서 그것이 1920년대의 삶이든 지금,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든 또 그곳이 중국 상하이든 우리가 구원해야 할 진리는 동일자와 보편자 보다는 타자와 개별자에 속하는 하층 민중에 관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