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유택(幽宅)에 다녀오다

[문학의 향기] 최일화 / 시인

2013-05-19     최일화
지난 4월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모르는 분으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최일화 선생님? 송상원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불쑥 메시지 드려 죄송합니다. 다름아니오라 97년 작고하신 이효윤 형님 묘소에 막걸리 한잔 따라드리고 싶은데 장소를 몰라서 여쭤보려구요. 제 핸드폰번호 010-7553-6676 입니다. 편하신 시간에 전화 한번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 분이 누구일까. 나는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이효윤 시인을 알게 된 경위, 시인의 생존 시 어떻게 어울려 지내 왔는지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산소에 한번 다녀오고 싶은데 산소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이효윤 시인을 검색하다가 내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 '한 무명시인을 회상하며'를 보고 나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시인의 기일이 5월 9일이니 그때 만나 같이 산소엘 들르는 걸로 합시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일이 가까울 무렵 나는 그 분의 페이스북에 메시지를 띄웠다.

"송상원 님 안녕하세요? 이효윤 시인 친구 최일화입니다. 친구의 기일이 5월 9일입니다. 한번 묘소에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시간 되시면 5월 9일 기일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댁이 어디신가요? 저는 만수 6동입니다. 제 차에 동승하셔서 다녀오셔도 됩니다. 그날 아니어도 저는 시간이 많으니 연락주세요. 제 전화번호는 010-4860-3657입니다."

그렇게 해서 송상원씨와 나는 5월 9일 만났다. 송상원씨가 차를 몰고 부천에서 직접 우리 집까지 왔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묘지로 향했다. 문학청년시절 인천의 신포동 막걸리집에서 이효윤 시인을 자주 봤다고 했다. 워낙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선생님으로 호칭하고 싶었으나 시인이 "괜찮다. 그냥 형이라고 해라." 해서 형이라 부르며 따랐다는 것이다.

그 후로 바쁜 일이 이어져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오랜만에 시인의 집을 방문했더니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었다고 하더란다.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냥 세상을 떠난 게 안타까워 늘 죄책감을 갖고 13년을 살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차를 몰고 서구청에서 관리하는 공원묘지로 향했다. 도로도 새로 나고 아파트단지도 즐비하게 새로 들어서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인근에 대한항공 아파트가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결국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야 겨우 공원묘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효윤 시인이 떠난 지 16년, 엊그제 16주기가 지났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죽었을 때 이어령 평론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의 질문에 답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용을 잊어버렸지만 시인은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을 읽는 독자가 있는 한 죽었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효윤 시인이 죽은 지 16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유택에라도 찾아가 막걸리 한 잔 따라주고 싶은 독자가 있는 한 그는 아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의 묘지는 다른 무덤들 사이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사방이 5월의 신록으로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는 공원묘지는 어느 계절보다 화사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금방이라도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시인의 묘지석엔 '詩人原州李公孝允之墓'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묘지석 옆면엔 '제 5회 인천문학상 수상/ 수상작 다시 휴전선에서' 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송상원씨는 형언할 길 없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따르며 문학의 향기를 맡게 해준 선배 시인을 이렇게 죽은 지 16년 만에 고인으로 만나보는 그 마음이 어떠했으랴. 나는 사실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송상원 씨가 무척 고마웠다. 그것은 내가 이효윤 시인을 잘 알고 그의 만년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을 알고 그의 가난과 소박한 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는 후배를 보았을 때 내 마음도 뭉클했던 것이다.

송상원 씨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이제 묘소의 위치를 알았으니 종종 찾아뵙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시인의 후배로 인해 모처럼 친구 시인의 무덤을 다시 찾아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한편 걱정스러운 일도 있었는데 그 공원묘지 각 무덤 옆에는 묘지의 연고자는 구청에 신고해달라는 팻말이 하나씩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 공원묘지 자리가 재개발 지역으로 확정된 것 같았다. 물론 이효윤 시인의 미망인이 생존해 있고 두 자녀가 있으니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묘지가 또 다른 곳으로 이장되거나 혹은 어느 납골당에 봉안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잠시 쓸쓸한 바람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던 것이다.

이효윤 시인도 이제 많이 잊혀지고 있다. 새로 등단한 시인들이나 인천으로 이주해온 문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임에 틀림없다. 함께 술 먹던 선후배 동료 문인들에게도 이효윤 시인은 점점 먼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시인을 그리워 하는 한 지순한 후배를 만난 것을 나는 아주 즐거운 일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송상원 씨는 페이스북에 이효윤 시인의 시 한 편을 곁들여 다시 글을 올렸다.

"어느 무명 시인을 기리며……

오전 형을 뵌 것이 17년만이었습니다. 결혼 몇 달 전 집사람과 형님 댁에 찾아가 인사하곤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말 한마디 서로 못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속으로만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말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형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습니다. 16살 나이 차가 웬만한 삼촌뻘 정도로 형이라 부르기 쑥스러웠지만 워낙 격의없이 대해주셔서 저와 친구들은 그냥 형이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형을 처음 만난 것은 군 입대를 위해 휴학하고 지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긴 머리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처음 특이하기도 했고, 그맘때 누구나 그랬듯이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밤을 새우곤 했으니까요. 하루는 신문꾸러미를 옆에 끼고 찾아와 신문에 실린 당신의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당신께 저는 커피 몇 잔 서비스로 드렸고요. 이후 몇 번의 술좌석 후 자연스럽게 댁까지 찾아가 항상 따뜻했던 형수님과 사랑스런 아이들과도 안면을 익혔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동인천 시내에서 두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내려 또 걸어갔던 경서동, 지금은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주물공장, 골프장, 학교, 농지, 군부대 등 참 여러 사연을 안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먼 곳 강진의 자이당(自怡堂) 할아버지를 흠모하던 형은 그곳 경서동에서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빈집’을 냈습니다. 오늘 형이 머무는 곳을 알려주시고 함께 동행 해 주신 최일화 선생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선물로 주신 시집과 수필집 정말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빈 집 1

밤길 떠난 바람은
돌아오지 않고
아침 문을 여는 코스모스에
핏기가 없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나뭇가지 끝으로
간간이
새 소리만 들려올 뿐,
 
햇살 맞으며 들길 가던
이슬 자리에
서리가
수은주의 눈금을 물고 내려와 있다
 
빨갛게 취해 넘어가던
노을이
오늘은 허전한
뒷모습,
 
산모롱이를 돌아 흐르는
조그마한 강으로
빈 배가
노 저어가고 있다.
- 이효윤 詩 "
 
나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송상원씨를 통하여 고 이효윤 시인을 다시 회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효윤 시인은 1997년 작고한 인천의 시인이었습니다. 아주 빼어난 서정시를 쓰며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꼬장꼬장하게 자신의 철학과 지조를 지키며 시세계를 펼치던 시인이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한 메시지를 발견한 건 지난달이었습니다. 이효윤 시인의 후배인데 산소라도 찾아가 막걸리 한 잔 올리고 싶다며 내 의견을 물어왔던 것입니다.
 
아마 인터넷에서 이효윤을 검색하다가 내가 쓴 이효윤에 대한 글을 발견하고 연락을 해왔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잠시 먹먹했습니다. 16년 전에 작고한 시인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 유택이라도 찾아가 보고 싶어 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있다는 것이 내게 작은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곧 전화를 했지요. 5월 9일이 16주기기 되니 그때 한번 시간을 내 다녀오자는 내용이었지요.
 
그래 오늘 만나 함께 시인의 유택을 다녀왔습니다. 여러 해 만에 다시 찾아가는 길은 새로 생긴 많은 도로와 건물들로 결국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송상원씨는 소주 한 병과 안주꺼리를 준비했고 우리는 함께 시인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묘비의 한 쪽 면에 새겨진 '제 5회 인천문학상 수상' 이라는 글자가 5월 햇살에 선명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랜 만에 세상 떠난 친구와 해후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작고한 가난한 시인의 무덤에 술 한 잔 따라주고 싶은 한 중년 남자의 그 마음이 오월의 훈풍처럼 따뜻했습니다. 육신은 멸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옛 현자들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 고운 마음씨는 세상의 다른 곳에서도 항상 꽃을 피우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송상원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렇게 송상원씨와 나는 오랜만에 시인의 유택을 다녀왔다. 다시 한 번 시인의 명복을 빌며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며칠 후에 썼던 나의 시 한편 올려 시인을 추모하려 한다.
 
哭 이효윤
 
효윤아, 자네가 정말 갔구나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내가 자네를 다시 볼 수 없는 것 말고
친구들이 자네 없이 술을 먹어야 하는 것 말고
그래 우리가 좀 허전하게 지내야 할 일 말고
그래 아직 어린 자네의 두 아이들도
이제는 영 다시는 자네를 못 보는 것 아니냐
다시 한 번 자네와 가고 싶던 강진,
그 월출산 남쪽 자락 시원한 계곡물
그토록 자네가 자랑하던 자네의 고향마을을
나는 또 언제 다시 가보기라도 할 것이냐
누구와 함께 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소주 한잔 다시 기울일 수 있단 말이냐
고향을 지키다가 너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너의 맏형은
효윤이가 없어도 강진에 오면 들르라고 하더구나
저 남쪽의 빼어난 풍광 속에 태어나
인천의 한 변두리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무명의 시인으로 삶을 마칠 때까지
자네의 꿈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자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십여 년이 넘게 사귀어 왔으면서도
아니 자네 생애의 마지막 십여 년을 함께 했으면서도
자네의 속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 했구나
만나면 웃고 떠들고 술 퍼마시기에 바빴지
자네의 시조차 바로 읽지 못 하였구나
어쩌면 자네가 행복했을지도 몰라
이 세상에 살면서 운전대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컴퓨터 자판 한번 두들겨 보지 않았지만
분명 자네는 행복했을 거야
세상의 불의에는 꼬장꼬장하게 저항의 날을 세웠지만
그 앙상한 몸뚱어리를 해가지고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지
젊은 나이에 사경을 헤매면서도
누구에게도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으니
연명할 소주 몇 잔이면 족하였으니
자네는 시에 취해 술에 취해 환한 복사꽃에 취해 살다가
그 꽃길 속으로 꿈길을 가듯 잠기어 든 거야
시인의 순수를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
자네의 대쪽 같은 울분은 바로 우리들의 울분이 아니겠는가
가물가물 그리운 자네의 사투리
눈물겨웠던 병고와 가난 이제 다 놓고
훨훨 주선이 되어 자네는 떠나고
우리는 또 술을 먹고 세미나를 열고
문예지를 발간하고 총회를 하고
                       -필자의 졸시, 1997.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