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심도직물 사건의 현장, 성당의 십자가는 그대로인데…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협약 연재] 인천 민주화의 현장을 찾아서 (3)
굴뚝만 남은 공장터
“그땐 거기서 강화사람들 다 먹여 살렸어.”
골목길에서 만난 두 할머니의 첫마디는 벌써부터 탄식조다.
“한 천 명 있었을까. 여기 사람들 다 다녔으니까. 엄청 컸어. 강화는 다 직조야. 다른 공장은 없었어.”
“먹고 살만했지. 사람들이 오고가고 했으니까. 지금은 다 없어졌어. 저기 가면 굴뚝하나 남아 있잖아. 그거 그냥 그대로야.”
마실가는 할머니들을 배웅하고 골목을 나오니 한구석에 황토빛 굴뚝이 동그마니 서 있다. 김상용 순절비 뒤편이다. 예전엔 답답함을 느낄 만큼 꽉 막힌 동네였는데 지금은 시원하게 탁 트인 공간이 됐다. 굴뚝 밑에 서 있는 표지석을 보고서야 이곳이 근래까지 직물공장이 있던 곳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공장 건물은 이미 철거됐고 그 자리에는 주차장이 조성됐다.
여기는 참 흥미로운 장소다. 조봉암이 나온 강화초등학교, 백범 김구와 인연이 깊은 합일초등학교가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서로 멀리 마주보며 자리를 잡았고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의 옛 비석 등이 주변을 감싼다. 그리고 낮은 언덕 위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고뇌가 오롯이 담긴 성공회 강화성당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강화도 심도직물 공장은 규모나 명성보다 종교가 어떻게 참담한 노동 현실을 맨눈으로 보게 됐는지, 그 기원의 공간으로서 중요하다. 가르침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투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체화시키는, 인천 가톨릭교회 노동자 운동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현장이다.
〈유일하게 남은 심도직물 공장 굴뚝〉
“공장 안에 교회를 세우자”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JOC와의 관계다. 쥬네스(Jeunesse : 젊은), 우브리에(Ouvriere : 노동), 크리디안(Chretienne : 기독교)의 불어 약자인 JOC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다른 이름이다. JOC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벨기에 출신의 요셉 까르댕 추기경이 1925년 처음 만들었다. 평신도들이 항상 교회의 선두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까르댕 추기경은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곧 혁명이다.”라는 말로 JOC 활동의 본질을 설파했다.
한국에 JOC가 처음 등장한 건 1958년. 서울교구에 처음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부터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심도직물 JOC 회원 등이 집단 해고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보다 앞서 심도직물에 섬유노조 심도분회가 결성된 건 1967년 5월 14일이었다. 이 일을 공장에서 근무하던 강화 본당의 JOC 회원들이 주도했다. 당시 주임신부였던 전 미카엘신부가 JOC를 지도하고 있을 때다. 1200여 명의 종업원 중 900여 명이 조합에 가입하자 회사측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1968년 1월 초까지 JOC 회원을 비롯한 16명의 노동자들을 심도직물과 인근 공장에서 해고했다. 동시에 김재기 사장 등은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는 항의와 함께 반공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을 가한 후 공장을 폐쇄했다.
이어 1월 8일,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이 모여, 전 미카엘 신부의 사상이 의심스러우며 앞으로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7개항의 결의문을 작성하고 이를 각 중앙일간지에 발표했다. JOC 전국연합회와 인천교구는 즉시 조사단을 구성해 강화도에 사람을 파견한다.
〈심도직물 공장터 안내 비석〉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목자
천주교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전 미카엘 신부와 교회에 대한 공격이 도를 넘어서자 1월 18일, ‘특별메시지’를 발표하며 각 본당 미사 때 낭독해 줄 것을 신자들에게 호소했다. “교회가 강화에서 발생한 사건에 접하여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노동자들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라고 입장을 밝힌 나 주교는 전 미카엘 신부를 옹호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행동이 정당한 권리의 행사임을 강조하였다.
“전 신부님은 그의 활동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사과할 까닭이 없습니다. 전 신부님은 노동청년회 회원들에게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침으로써 신부다운 활동을 하였습니다. 만일 노동청년회 회원들이 공장 종업원 각자의 권리로서 노동조합을 조직함에 대하여 비난받았다 하더라도 이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 행사인 것입니다.”
한편, 당시 JOC 총재를 맡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도 나길모 주교와 함께 임시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주교단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의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나길모 인천교구장의 ‘특별메시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천주교측의 입장 표명이 계속 이어지자 정치권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도직물의 창업주로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재소 공화당 의원(강화·김포)은 ‘우리도 금명간 성명서를 내서 진상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신민당 김은하 의원은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에 착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노동자들의 집단 해고 문제가 정치 문제로 비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강화직물협의회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천주교측에서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 사과를 계속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1월 22일 강화직물협의회는 이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하며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지난 결의사항을 철폐하겠다고 천명한다. 그리고 2월 16일, 천주교측의 요구를 전면 수락한 후 일간신문에 ‘해명서’를 발표했다. 강화도 출신 국회의원과 관련됐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1968년 1월 20일자 천주교회측 수습대책위원회의 성명에 접하고 교회당국 및 지오씨의 이념과 전 신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시적 감정에서 취한 경솔한 것이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폐회는 그동안 본의아닌 사회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심심사과하오며 위 결의 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이미 해고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는 동시에 앞으로는 상호 충실한 대화의 길을 통하여 노사협력을 기하고 증산에 더욱 힘쓸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복직과 여성 노동자의 혈서
이로써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처우는 달라진 게 없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몇 개월이 지난 1968년 8월 16일, 강화도의 상호직물에서 동료에게 노조법을 설명하고 있던 한청자가 이를 목격한 공장장에 의해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회사측은 결근계를 위조해 한청자가 스스로 출근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고,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던 한청자는 손끝을 잘라 혈서를 썼다.
“저는 근 10년이라는 세월을 상호직물에서 근무한 사람입니다. 제가 성숙하게 자라온 내집 같은 상호 직물을 망치려고 노동조합 운동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연약한 여성이지만 쓰러져 가는 회사와 뿔뿔히 흩어져 일하는 우리 노동자와 손과 손을 마주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합하여 회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뜻대로 안되고 파괴주의자, 공산당 너무나 가슴이 미어지는 소리들이 저의 귀에 들릴 때 … 아무리 비천하고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이지만 우리의 존엄성과 가치를 찾으려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것입니다.”
상호직물은 같은 해 8월 27일 30여 명의 노동자들을 회사 운영난을 이유로 무더기 해고했다.
〈혈서로 쓴 호소문을 들고 있는 한청자(<노동청년> 62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이후 JOC는 스스로의 존재 방식에 대해 다시 자각해 갔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와 종교와의 관계를,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를, 교회 속에서의 인간 문제를 신앙과 사회 정의에 근거해 주체화시키려는 노력을 이어 갔다.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으로 얻은 JOC의 깨달음은 앞으로도 계속 현실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심도직물 공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