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공단으로, 6월 민주화항쟁과 인천(2)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협약 연재] 인천 민주화의 현장을 찾아서 (5)
2014-07-01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항쟁의 이정표, 부평역 광장과 부평대로
텅 빈 거리,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맑은 노랫소리가 물방울처럼 떨어져 흩어졌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날에 오오 참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6월의 하늘을 뚫고 나온 오후의 햇살이 멀리 도로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실루엣을 아지랑이처럼 흔들고 있었다. 고요함과 외침이, 분노와 희망이, 대립과 포옹이 1987년 6월의 부평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교에서는 자율학습이 중단된 채 학생들이 귀가를 서둘렀고, 일찌감치 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TV에서 전하는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내리면, 어디선가 최루탄 냄새가 흘러 와 주택가 골목까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두려웠지만,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리로 나섰다. 6·10 대회 이후 스무 날 가까이 사람들을 불러낸 건 오후 6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애국가 소리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처음부터 국기하강식을 항쟁의 신호로 이용했고, 이 시간이 되면 군중들 속에서 애국가를 외쳐 부르는 소리가 하나 둘씩 퍼져나가며 집회가 시작됐다.
텅 빈 거리,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맑은 노랫소리가 물방울처럼 떨어져 흩어졌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날에 오오 참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6월의 하늘을 뚫고 나온 오후의 햇살이 멀리 도로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실루엣을 아지랑이처럼 흔들고 있었다. 고요함과 외침이, 분노와 희망이, 대립과 포옹이 1987년 6월의 부평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교에서는 자율학습이 중단된 채 학생들이 귀가를 서둘렀고, 일찌감치 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TV에서 전하는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내리면, 어디선가 최루탄 냄새가 흘러 와 주택가 골목까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두려웠지만,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거리로 나섰다. 6·10 대회 이후 스무 날 가까이 사람들을 불러낸 건 오후 6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애국가 소리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처음부터 국기하강식을 항쟁의 신호로 이용했고, 이 시간이 되면 군중들 속에서 애국가를 외쳐 부르는 소리가 하나 둘씩 퍼져나가며 집회가 시작됐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표한 ‘6·10국민대회 행동요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부평역 광장과 그 앞의 부평대로는 6월 항쟁 내내 애국가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항쟁의 이정표였다.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백마장 입구, 영아다방사거리, 청천시장, 개선문예식장 앞 도로 등지에 서로 어깨를 잡은 시위대들이 끝없는 행진을 이어갔다.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국가를 꿈꾸며, 정의가 살아있는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도도하게 물결치듯 흐르는 거대한 민중의 힘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6월 10일 부평대로에는 나무십자가가 꽂혔다. 박종렬 목사에 따르면, 십정동에서 사전 회합을 가진 종교계 인사들이 부평역으로 이동, 목사 한 명이 십자가를 들고 부평대로에 나서면서 국민대회가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곧 북구청(지금의 부평구보건소)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같은 시간, 노동자로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윤경세는 동아백화점(지금의 롯데백화점) 앞 골목에서 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속칭 ‘다다구미’라고 부르는 주택밀집구역이다. 빼곡하게 맞닿아 있는 주택들 사이로 작은 골목길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광복 후 평화촌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불렀지만 ‘다다구미’에 밀려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한때 평화를 고대하던 마을 안에서 사람들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삼삼오오 모여 배회를 계속했다. 대회 직후 여기에 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대우자동차로 가자는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대우자동차는 상징적 공간일 뿐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공장지대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위대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인천지역 6월 항쟁의 주요 집결지였던 부평역 일대. 넓은 광장은 사라져 없어졌고 고층빌딩이 주변에 들어섰다〉
6월 18일 열린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 궐기대회’도 부평역 광장을 대회 장소로 정했고 6월 26일 개최된 ‘6·26국민평화대행진’의 최종 집결지도 부평역이었다. 경찰의 원천 봉쇄로 광장이 폐쇄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장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온 도시가 시위 군중들의 집결지였고 집회는 동시다발적이었다. 이렇게 모인 시위대는 시간이 지나면 부평공단 쪽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잔업에 발이 묶인 노동자들도 시위대와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6월 25일부터 발행을 시작한 소식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공장으로 가는 길, 백마장 입구
백마장(白馬場)은 일제강점기의 하쿠바쵸(白馬町)라는 지명이 조선시대 지명인 마장면(馬場面)과 교묘하게 결합돼 남게 된 식민지 시대의 잔재다. 부평역에서 대로를 따라 부평공단으로 가려면 반드시 백마장 입구를 거쳐야 한다. 부평역과 함께 이곳에서 시위가 동시에 시작되기도 하고 거리위에서 대중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6월 18일도 마찬가지였다. 백마장 입구에서는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가 모여 앉아 대중집회를 열었다.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6월 21일 호외를 발간해 인천지역에서 있었던 대중들의 연설을 발빠르게 모아 전했다.
잔업 특근에 시달리며 하루 16시간 이상을 노동해도 10여만 원밖에 받지 못한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현정권이 잘못인가? 노동악법 철폐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이런데 있다가 혹시 잡혀가지나 않을까 무척 많이 떨었다. 지금도 무섭다. 그러나 학생·시민이 다함께 모여 민주화를 외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마구 뛰고 참을 수 없어 뛰어왔다. 학생들을 존중한다. 그대들이 앞장서 달라. 그러면 모든 시민들도 따를 것이다. 큰절 한번 하겠다. 집에 갈 때 경찰이 나를 잡아갈지도 모르니 학생들 사이에 앉아있다가 같이 가겠다.
(〈정의평화〉 호외 4,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1967년 6월 2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시민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들 간절했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울분을 끝없이 토해냈다.
백마장 입구에서 서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철마산, 혹은 원적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나온다. 그 중간쯤에 산곡동 영단주택지가 있다. 영단주택은 1941년 조선주택영단이 설립되면서 만든 노동자들의 집단주택지다. 일제강점기에는 인근에 있던 일본의 군수공장, 즉 조병창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다. 연이어 미군이 주둔하면서는 미군부대 노동자들과 속칭 ‘양공주’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후 부평공단이 들어서고 대부분의 미군이 다른 지역으로 떠난 후에는 공장의 근로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1987년 6월, 부평공단을 향하는 시위대는 여전히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영단주택지를 빼놓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일부는 대로를 향해 그대로 달려 나갔다.
〈산곡동 영단주택지 전경. 6월 항쟁 당시 시위대는 사진 전면 도로를 따라 영아다방 사거리로 향했다〉
노동자들의 공간, 영아다방 사거리와 청천시장
청천동은 노동자들의 공간이다. 부평역 앞에 모인 시위대가 청천동으로 향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6월 10일은 국민대회에 참가하는 걸 막기 위해 공장들이 잔업을 늦게까지 시키는 바람에 노동자들은 밤 9시 경이 되어서야 ‘노동 3권 쟁취’, ‘민주노조 결성’, ‘잔업철폐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후 부평공단 일대에서는 항쟁 기간 동안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청천시장, 청천사거리, 효성사거리로 이어지는 도로는 밤 늦게까지 구호와 연설이 끊이지 않았다.
부평은 노동자들의 도시다. 그만큼 권력에 맞서는 시민들의 저항 정신이 꽤 오랫동안 지속돼 온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 이유에선지 6월 18일, 경찰은 유래없는 폭력 진압으로 청천동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최루탄 추방의 날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최루탄이 이곳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주택의 담장을 넘고 산으로 도망치며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이날은 청천동 쪽에 모여 있던 시위대 속에서 ‘오늘밤 자정을 기해 인천시내 전역에 정전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횃불을 만들며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평은 노동자들의 도시다. 그만큼 권력에 맞서는 시민들의 저항 정신이 꽤 오랫동안 지속돼 온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 이유에선지 6월 18일, 경찰은 유래없는 폭력 진압으로 청천동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최루탄 추방의 날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최루탄이 이곳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주택의 담장을 넘고 산으로 도망치며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이날은 청천동 쪽에 모여 있던 시위대 속에서 ‘오늘밤 자정을 기해 인천시내 전역에 정전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횃불을 만들며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일동’ 명의의 유인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1987년 6월, 부평역 광장, 백마장 입구, 청천시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해방구였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도로 위에서 발족식을 개최하기도 했고, 개선문 예식장 앞에서는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재자 허수아비 화형식이 열리기도 했다.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어도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물을 떠다주고 김밥과 음료수를 건네줬다. 주머니를 털어 동전을 쥐어주고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줬다. 울분과 대립이 거리를 메웠어도 서로에 대한 관용과 믿음이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었다. 적어도 시민들은 그랬다.
6월 항쟁은 6·29선언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갑작스런 끝맺음이었으나 거리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중이 떠난 자리를 이제 노동자들이 다시 채워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6월 항쟁은 6·29선언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갑작스런 끝맺음이었으나 거리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중이 떠난 자리를 이제 노동자들이 다시 채워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부평 개선문 예식장은 지금은 모두 헐려 공터가 됐다〉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에서 배포한 6·26평화대행진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