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있으라’는 아버지 - 박완서 <배반의 여름>
[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2회
2015-04-15 이한수 선생님
세월호가 침몰하고 꽃다운 영혼들이 구천을 떠돈 지 한 해가 되었습니다. ‘가만 있으라’며 죄 없는 자식을 수장시킨 애비로서 이 회한(悔恨)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평생 잊지 않으마 되새기며 조사(弔詞)를 바칩니다. 못난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며 영령(英靈)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남은 생, 죄값을 치르듯 아버지 노릇 되찾으라는 숙명으로 받들겠습니다.
보통,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아버지와의 갈등 문제는 아버지의 권위 의식 때문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동소설, 청소년소설이 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장통으로 다루는 건 그만큼 이 문제가 전형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아버지를 죽여야만 한다는 알레고리(비유)는 정신분석학으로 그 의미의 타당성이 상당한 정도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권위와 충돌하게 되고 그 권위를 넘어서거나 좌절하는 패턴에 따라 어른으로서의 인성(人性)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그 아버지를 떠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동화가 주로 유아의 기아(棄兒) 불안을 모티프로 한다면 대부분의 성장 소설은 아동 청소년의 자립 동경을 모티프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처음 타자와 맺는 관계는 당연히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일 수밖에 없으니 분리 불안과 자립 동경은 엄마와 나 사이에 끼어드는 아빠 또는 형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나는 게 당연합니다. 이런 갈등의 양상은 분리 불안을 넘어 자립 동경으로 심리적 성장을 해나가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일반적이고 누구나 다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인데 이 아픈 경험을 어떻게 겪느냐에 따라 이후 심리 상태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 시기의 정서적 경험은 참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너무 강한 아이는 자립 동경이 제대로 싹트지 않아 유아적 발상을 늦도록 갖고 있을 수 있고, 버림받은 공포가 너무 심각할 경우에는 자칫하면 대인공포증으로까지 심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좀 더 크면 부모와의 심리적 분리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 생기는 갈등을 잘 소화하지 못해도 심리적 자아에 그늘이 집니다. 그러니 간접 경험을 통해 심리적 격동을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이런 점에서 심리 치유의 유효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성장을 그린 작품으로 [배반의 여름]을 추천합니다. 아버지의 헛된 권위가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좀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외면해선 안 됩니다.
그 학교엔 놀이틀말고도 풀장이 있었다. 여름 방학에도 풀장만은 개방을 하는 모양으로 늘 물이 충충하게 고여 있었다. 해질 무렵의 풀 속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푸른 색을 하고 있었고, 귀신의 감은 머리가 휘감겨오는 것처럼 음습하고도 냉랭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풀 가에는 가지를 않았다. 그 헤아릴 수 없이 충충한 깊이에서 나를 끌어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유난히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거의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수위실에서 잡담을 하던 아버지가 미끄럼틀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심한 장난을 한 뒤라 온몸이 땀으로 끈적끈적했다.
아버지는 등에 찰싹 달라붙은 내 티셔츠를 들추고 통풍을 시켜주며, 짜아식 집에 가서 목욕하고 자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풀장이 있는 데로 갔다. 아버지와 같이라면 풀도 조금쯤은 덜 무서웠다. 아버지는 건장한 몸집과 솥뚜껑 같은 손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풀 가로 걷고 나는 안측으로 걸으면서도 겁이 나서 아버지에게 꼭 매달렸다.
별안간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나는 비병을 지르면서 아버지에게 엉겨붙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가볍게 털어냈다. 나는 물속으로 조약돌처럼 풍덩 빠지며 낄낄낄 하는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얼마 동안을 물 속에서 죽을 기를 쓰고 허우적댔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풀장 가의 손잡이를 붙잡고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목 위가 물 밖에 나왔는데도 발이 땅에 닿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허리를 비틀고 낄낄대고 있었다. 마치 웃음이 사례가 들린 것처럼 격렬하고 괴롭게 아버지는 낄낄댔다.
순간 나는 아버지가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보고 죽은 누이동생을 더 사랑했고, 그래서 내가 살아남은 게 미워서 나도 누이동생처럼 물에 빠져 죽기를 바랄 수이도 있다고 나는 내 추측에다 제법 논리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것은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풀도 나를 배신했다. 늘 헤아릴 길 없이 충충한 깊이로 나를 겁주던 풀이 내 한길도 안 되는 깊이일 줄이야.
배신당한 충격과 분노가 도리어 나에게 수영을 배울 용기가 되었다. 그해 여름 처음 나는 자진해서 동네 교회당에서 가는 하계 캠프에 참가해서 수영을 익혔다.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물에 대한 공포감에 도전하다가 어느 틈에 물개처럼 자연스럽게 물과 친해졌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앙심도 저절로 풀렸다.
박완서의 [배반의 여름]은 아이가 크면서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아기를 벗어나면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마련인데 주인공 아이는 수영을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강압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아버지 권위 이면의 볼품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받들어 오던 아버지가 실상은 보잘것없는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실망을 하고 심하게는 배신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번쩍이는 단추로 장식되어 있는 아버지의 제복은 경비원 복장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아이의 배신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 학생이 되면서 존경하게 된 유명인이 보잘것없는 경비원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는 얘기로 끝을 맺어 우리 사회 권위의 본질이 뭔가 하는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못난 아버지 이야기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 도둑>도 참 좋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전거를 도둑질 하다가 붙잡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장면은 땅에 떨어진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도 괜찮습니다. 소주 두 병을 도둑질하다 걸리자 아들한테 덮어씌우고는 손버릇 고친다며 뺨까지 때리는, 정말 한심한 아버지를 그려 허황된 권위자 아버지의 전형을 또 하나 보태었습니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과 한국의 소설 <자전거 도둑>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는 성장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비는 아들을 키워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아비들은 이 운명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버지의 가르침을 좇으면서 아버지를 딛고 넘어가야 하니까요. 좋은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딛고 넘어가도록 키우는 것처럼 아비도 자식에게 밟혀야 비로소 번듯하게 일어선 자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아들의 철없음을 일깨워주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하나같이 재수 없다고 한탄을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제 몸 하나 감당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정한 게 이 사회 현실이라고 가르쳐 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나서서 외치기보다 제 자식 하나라도 살아남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자식 경쟁력 확보에 투자해 오지 않았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자리에 ‘가만 있으라’ 윽박지르면서 어찌 제 잇속에만 그리 밝으냐고 나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러니 이 땅에 아버지들은 정신이 온전하기 힘듭니다. 저 재수 없는 세대들을 웅변으로 일깨우려고 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지양 극복되어야 할 지난 세대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서서 일갈하자니 염치가 없고 물러나 관조하자니 세태가 꼴사나우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이런 염치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숨 막혀 죽을 지경인데 ‘가만 있으라’니요.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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