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화해하다

(17)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2017-01-31     은옥주

 

설날 아침 조금 일찍 일어나 딸네 식구들이 오면 먹일 떡국도 끓이고 전도 좀 부치고 설날 채비를 하고는 잠깐 거울 앞에서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에는 엄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껌뻑이며 보고 또 보아도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꼭 찝어 어디라고 말할 수 없이 전체적인 느낌과 함께 표정까지 똑같은 내 모습이 어쩌면 엄마하고 이렇게 닮았을까!

나는 엄마를 참 닮고 싶지 않았고 40대 이후 간간히 엄마를 닮았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내가 어디가 엄마 같으냐고.” 펄쩍뛰며 강한 부정을 했었었다.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엄마는 목소리도 크고 몸도 크고 간도 크고 대장부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많이 고용하여 큰 사업을 벌이고 온통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놀러 한 번도 안가고 남산동 집과 명동 가게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 맥주 한잔 얼큰히 마시고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며 해준 이야기 한 자락이다.



<출처 : http://m.blog.daum.net/mojjustice/8703571>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늘 “니가 고추를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겠노.” 하셨고 어느날 엄마를 불러서 앉히더니 엄마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서 자리를 잡으면 온가족이 다 돌아올테니 먼저 가서 기다려라 하셨단다. “너는 아들같은 딸이니 나는 너를 믿으마.” 엄마는 정말 집도 가족도 친구들도 떠나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난생 처음 고국이라는 한국에 오니 너무 산천도 낯설고 사람도 낯설고 처음 본 남자(우리 아버지)와 결혼이란 걸 했는데 그 남자도 너무 낯설었단다. 그 후 바로 아기가 생겨 입덧을 심하게 하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헛구역질만 났단다. 어느 날은 이웃집에서 초대해서 멍석을 깔고 마당에서 밥을 먹는 중 그 집 애기가 똥을 싸 “워리~ 워리~” 하니 강아지 한 마리가 와서 냉큼 그 똥을 먹더란다. 자기는 그 뒤로 된장국을 절대로 못 먹겠더란다.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 그리웠고 집이 그리워 정말 많이 울었고 슬펐었단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뱃속의 아기에게도 정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가 엄마 뱃속에 있던 때 6.25가 났단다. 그때, 엄마는 서울 돈암동에서 살았는데 남자들은 다 잡아가기 때문에 아버지는 먼저 피신을 하고 엄마는 만삭이 된 몸으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온 사방이 총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에 간이 콩알 만해져서 있는데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 공산군 2명이 따발총을 들고 서있더란다.


그 사람들은 그 따발총을 만삭이된 배에다 딱 갖다대며 “남편이 어디있는지 말해.” 고 소리를 질렀단다.

엄마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벌벌 떨며 “아노.. 아노..” 하고 더듬거렸단다. 그러자 “이거 쪽빨이 아냐? 재수없이.” 하고 소리를 지르던 그 사람들은 구둣발로 방안에 들어가 온 집안을 뒤지더니 남편이 왔을 때 알리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을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부터 엄마는 드러누워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어서 벌벌 떨며 며칠을 버티다가 그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 짐을 잔뜩 실은 트럭 꼭대기에 자리를 하나 얻어 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배가 남산만하니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고 제일교포2세라 말도 그리 수월하지 않아서 어려웠다고 한다. 한번은 너무 소변이 마려워 잠깐만 세워달라고 임신 중이라 자주 소변이 마렵다고 했더니 그냥 거기서 싸라고 못 세운다고 하며 트럭이 안 세워주고 달리는데 죽어도 자기는 거기서 쌀 수가 없더란다. 그래서 울면서 사정했더니 세워주어 잠깐 내려와 소변을 보고 다시 트럭 꼭대기로 가려니 너무 짐을 높이 쌓아올려서 간신히 밧줄을 붙들고 올라가고 있는 중에 트럭이 출발하여 달리더란다.
 

엄마는 손이 꽁꽁 얼어 밧줄을 놓칠 것 같아 죽을힘을 다해서 붙들면서 제자리로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는 순간 갑자기 벼락같이 “타닥”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꼭대기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휙 날아가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며 피가 낭자하게 흘러 죽었더란다.


트럭이 달리는데 굴다리가 있어서 그 밑을 지나가며 그대로 부딪혀서 사고가 난 것이다.

엄마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 그 후로 트럭위에도 못 올라가고 밧줄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서 대구까지 내려왔는데 나중에 내려서보니 입었던 치마도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리고 내복만 입고 있더란다. 엄마는 그때부터 결심했단다.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거야.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야 말거야. 이 나라에서 절대로 살지 않을 거야.’


6.25가 끝나고 사회는 안정이 되기 시작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은 안 되었고 엄마는 오로지 집에 돌아갈 일념으로 아기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다정하지도 않고 냉정하여 참 섭섭하고 외로웠는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소 씩씩하고 대담하고 그런 엄마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커다란 아픔이 있었구나 하고 엄마가 많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었다.


일본식 발음이라 친구들이 ‘아이노꼬’(혼혈아) 라고 놀림을 받는 것이 싫어서 엄마를 학교에도 못 오게하고 같이 외출하기도 싫어했는데 어학에 소질이 많은 엄마는 나중에는 사자성어를 써가며 아무도 제일교포라고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발음도 정확했는지 모른다.


사춘기 시절 엄마를 많이 미워하기도 하고 가끔은 말대꾸를 하며 덤벼들다가 몇차례 얻어맞았던 기억이 나고 어머니날(그때는 어버이날이 아니고 어머니날이었다.) 빨간 카네이션을 달고 ‘어머님 은혜’ 라는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친구들이 목이 메여 울면서 엄마를 생각하는 걸 보고 ‘나는 하얀 색(엄마가 돌아가신 아이가 다는 꽃 색깔) 카네이션을 달아버릴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만큼 엄마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혹독하고 추웠던 IMF를 마주했을 때,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고 느꼈는데 마치 지하실이 또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이제 다시는 맨땅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 있을 때 나는 내속에 있는 엄마를 깨워 일으켰다.


참 신기하게도 공주과인 내속에는 거칠고 강인한 엄마를 닮은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 같다.

아주 믿었던 사람들이 차갑게 돌아서고 만만하게 본 사람들이 마구 들이대고, 때로는 사모님, 선생님 하던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함부로 대할 때 가슴이 뛰어 밤을 하얗게 새우며 절망과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를 때 나는 고함치며 싸우던 엄마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의 분노에 대해서 이해가 가기 시작했었다.


그 많은 종업원들을 다스리려면 그런 종류의 의사소통법이 필요했었을 것이 공감되었고, 무섭게 야단치고 때로는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엄마가 나는 거칠고 쌍스러워보였고 참 싫었었는데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상대하는 경험을 해보면서 내가 나에게 놀랐다. 내가 그렇게 욕을 잘하고 거친 사람이라는 것을...


피난길의 엄마가 죽을힘을 다해 꽁꽁 언 손으로 밧줄에 매달려 자기목숨과 나의 목숨을 동시에 구한 강인함처럼 나도 어떻게든 버텨내야한다는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내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에 매달려 나와 내 아이들을 지켜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거울 안 엄마를 닮은 내가 싫지 않다. 외모도 성격도 심지어는 물려받은 당뇨병 까지도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분이라고 내재화된 엄마의 모습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껴안게 된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부모와 비슷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부모를 이해하게되고 또 화해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지독하게 너무 열심히 살던 우리엄마는 자기 몸 돌보지 않고 일만하다가 결국 당뇨합병증으로 오랜 시간 투병하며 고생하시고, 그리고는 엄마의 소원(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이제야 엄마의 상처에 마음을 포개얹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엄마는 없다. ‘엄마. 참 힘들었지? 고향도 부모형제도 정말 보고 싶었지? 그래도 엄마는 그것 다 이겨내고 참.. 열심히 사셨네. 나도 엄마 닮아서 참 열심히 살고 있어. 엄마. 나중에 만나러 갈게.. 기다려요.’

나는 머리맡에 걸어둔 환하게 웃는 40대의 엄마사진에 말해주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엄마를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