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문집을 만들며 - '공감교육'을 향하여
제44화 김국태 / 인천가현초교·인천교육연구소
나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다. 담임으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늘 겨울방학이 되면 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학급문집을 만드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우정을 나누는 1년간의 생활을 학급문집에 담아보는 것이다. 초임시절에 학급문집을 만들게 된 계기는 제자들에게 생애 잊지 못할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 오래 남을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욕심도 컸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학급문집은 학급운영의 결산서 같은 느낌이다. 학급문집은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아도 교사의 학급운영 철학과 실천이 잘 드러나고, 교실에서 하는 다양한 교육활동의 과정과 결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모아 둔 아이들의 글과 일기장을 읽으면서 지난 학급운영의 이모저모를 되돌아보게 된다. 학급뿐만 아니라 학교, 가정,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가 담기니까 겉보기에는 아주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아도 얼마나 큰 것인가 알 수 있다. 나는 올해 새로운 아이들과 어떤 학급운영을 할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떤 학급활동을 꾸준히 벌일 것인가, 하는 작은 주제를 나름대로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주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가 크다.
지금 1학년 아이들의 글과 일기장을 쭉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 배움에서 체험의 중요성, 배움과 삶이 하나 되는 의미, 학부모의 건강한 학교 참여, 책 읽어주기의 효과, 놀이를 통한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모습이 발견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글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몇 가지의 키워드가 지난 일 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이기고 싶다’, ‘꼭 일등을 하고 싶다’, ‘진 것을 복수할 것이다’, ‘이겨서 인정받고 싶다’ 바로 이말 들이다. 학교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1학년 아이들의 마음속에 ‘경쟁과 인정’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구나! 라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는 올해는 최소한 ‘경쟁과 인정’의 키워드를 ‘공감과 연대’의 키워드로 바꿔보려고 한다. 3월에 시작되는 학급 운영의 설계도에 공감과 연대의 측면을 반드시 반영하고자 한다.
공감은 타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은 곁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곧장 같이 따라 운다. 심리학자들은 바로 이런 사실에 주목했고 이를 ‘초보적인 공감적 고통’으로 표현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내부에 선천적으로 공감 본능을 타고 났다는 증거일 것이다. 최근에 최재천 교수에 의해 번역된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2017, 김영사)를 보면, 사실 영장류를 비롯해 조류 등 다양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 연구를 통해 동물과 인간이 선천적으로 공감 본능을 타고 났으며, 그로부터 비롯된 이타성과 공정성의 발현은 결국 종의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며, 생존을 위한 경쟁과 투쟁이 자연법칙이라는 믿음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윈의 ‘열등한 자는 도태되고 생존 조건에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세상도 약육강식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부정적 사태들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세상은 전쟁과 테러,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그것을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교육도 마찬가지로 ‘경쟁과 선발’의 원칙을 고수하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부정적 사태들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한 패러다임은 과학과는 무관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프란스 드 발은 단언한다.
“나는 공감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데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을 본다. 그렇다면 공감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될 확고한 특성이며, 따라서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프란스 드 발이 한 말은 지금 한국 교육에 몸을 담고 있는 나에게 매유 유효한 메시지이며 귀를 기울여야 할 시대의 요청이다. 내가 진정한 의미의 학급공동체를 이루고 싶다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공감)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 기저를 이루는 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공감능력을 심어 줄 수 있을까? 사실 공감은 가르치거나 훈계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공감해 줌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2010, 민음사)는 말한다. 아울러 공감이 확대되면 다른 사람의 곤경이나 형편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느끼게 되고, 동시에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아의식이 강화되고 심화되는 역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나의 일부를 확인하고 너는 내 안에서 너의 일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므로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조자 할 수 없다고 재러미 리프킨은 강조한다.
나에게 학급문집을 만들면서 보내는 겨울방학은 공교롭게도 똑같은 제목의 책 프란스 드 발과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두 권으로 이어졌다. 동일한 제목의 두 책이 주는 메시지를 통해, 3월 새로운 학년에서는 공감의 본성을 믿고 아이들에게 공감해 줌으로서 시작되길 희망한다. 아울러 올해에도 계속해서 <말랑말랑 애덜 이야기>에 그 공감의 흔적을 남기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