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는 끝났고 총여는 폐지됐다
[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널' 활동가
2018년 5월 19일, 몰카 편파 수사에 분노하는 여성들이 모였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몰카 범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던 법원이 ‘홍대 누드 크로키 몰카’ 사건에만 강력한 대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몰카 범죄로 재판에 넘겨진 열 명 중 네 명은 집행유예나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대법원이 제출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와 관련한 1심 결과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1심에 부쳐진 809명 중 41.4%인 335명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고작 10.5%(85명)였다.
심지어 작년에는 몰카범들이 더 낮은 형량을 받았다. 한국 여성변호사협회가 올 5월에 공개한 ‘2017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지원 방안 연구’를 살펴보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1심 양형은 벌금형이 72%, 집행유예가 15%, 선고유예는 7.5%로 나타난 걸 알 수 있다. 그중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불과 5.3%였다. 다시 말해 재판에 넘겨진 피의자 100명 가운데 5명 정도만 실형을 선고받는다는 뜻이다. 심지어 촬영물을 유포한 경우에서조차 징역형이 선고된 경우는 66건 중 18건(27.27%)에 불과했다.
홍대 사건을 제외하면 하루 17.7명 발생한다는 몰카 범죄에서 대부분 피의자는 남자였고 대부분 피해자는 여자였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지난해 5~12월 상담한 206건을 집계한 결과, 몰카 범죄에서는 여성 피해자(여성 93.7%, 남녀 공동 3%, 남성 3.3%)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몰카 범죄로 압수수색, 구속수사를 받은 경우는 홍대 사건이 유일했다. 몰카로 고통받았던 수천, 수만 명의 여성 피해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정당한 법적 절차가 남성 피해자에게만 실현되고 있었다. 여자들은 당연히 불공정수사에 분노했고, 5월부터 6차례에 걸쳐 편파수사를 시정하라고 시위했다. 처음엔 1만 명 남짓이던 시위 인원은 3만 명으로, 6만 명으로 늘어났고 지난주 12월 22일 마지막 시위에는 11만 명이 모였다.
하지만 탄핵까지 연결된 촛불시위와 달리, 불편한 용기는 11만 명이나 모였지만 눈에 띄는 제도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홍대 몰카 피의자는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 지난 12월 20일에 열린 2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고, (사진이) 여러 사이트에 유포돼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라며 양형 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물론 이는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재판부가 불법 촬영 피해자의 고통보다 “초범이다”,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라는 가해자의 변명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 생각하면, 이건에만 유달리 강경한 처벌을 내리는 게 당혹스러울 뿐이다.
12월 22일 6차 시위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여성 시위는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를 반기는 건 축배가 아닌 줄줄이 폐지된 총여학생회(총여)의 잔재다. 2010년 들어 총여는 서울에서만 한국외대(2010년), 건국대(2013년), 중앙대(2014년), 홍익대(2015년) 순으로 줄줄이 폐지 절차를 밟았다. 모두가 같이 학생회비를 내는데 여학생만 투표할 수 있고, 여학생의 권익만을 생각하는 단체가 있는 게 남녀 불평등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왜 여성이 사회적 약자냐.”는 의문은 결국 많은 남성이 여성 혐오가 뭔지 모른다는 것을 반증한다. 최근 래퍼 산이가 ‘페미니스트’ 노래로 논란에 휩싸이자 자신은 절대 여성 혐오하지 않는다고 밝혔는데, 이 또한 그가 여성 혐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증거다.
올해 동아대, 단국대, 광운대, 동국대, 성균관대에서 총여가 폐지됐고, 한양대, 서강대, 경희대에서 총여가 공석으로 돌아서며 사실상 폐지 상태가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천국의 부조리를 설명할 때 사과 상자를 예시로 들었다. “사과 상자를 열어봤을 때 윗줄이 모두 썩었으면 아랫줄도 썩었을 거로 생각하는 게 합리적인 유추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조리가 모두 사라진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다.” 이러한 러셀의 논리는 대학 내 여성 혐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회 온갖 곳에서 여성 성적 대상화, 몰카 범죄, 고용 불평등 등 여성 혐오가 넘치는데 학내라고 다를 리가 없다. 거기만 특별히 남녀 평등한 유토피아일 리가 없다.
실제로 2011년 고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도를 넘었었다. 많은 이가 남자 3명이랑 같이 놀러 간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뻔하지 않냐며, 피해자를 인격모독 하는 등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전가했다. 소설가 공지영에게 공식적인 비판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학내 심각한 여성 혐오는 2016~2017년 단톡방 성희롱 사건으로 신문지상 1면을 여러 번 차지했다. 2016년 7월 서울대, 8월 서강대, 2017년 2월 홍익대, 6월 고려대 등 널리 알려진 사건만 해도 대여섯 개가 넘는다. 바른미래당 장정숙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국내 106개 대학에서 발생한 성범죄 사건은 적발된 것만 320건에 달했다. 선후배나 교수-학생 등 수직적인 대학 문화 등을 고려하면 공론화되지 않은 범죄는 더 많을 거라고 추정된다.
이는 지난 12월 12일에 폭로된 대학생 연합 요들 동아리 ‘알핀로제’의 20년 전통 ‘여학생 경매’만 봐도 명백하다. 공공연하게 같이 잠자리하고 싶은 여학생 순위까지 매길 정도로 동아리 내 성추행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으나, 전통이란 이름으로 성범죄는 포장되고 미화되고 있었다. 문제가 공론화된 후에도 가해자들은 진정성 없는 사과 몇 마디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심지어 피해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들을 역으로 고소하려고도 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 학내 비상대책위가 세워졌으나, 총여처럼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기에 대책위는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건이 폭로된 지 2주가 넘었는데, 알핀로제 성희롱 사건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중이다.
시위는 끝났고, 총여는 폐지됐고, 전방위로 퍼진 미투 운동은 폭발적인 시작과 다르게 하루하루 수그러들고 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미투를 받쳐줄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는 총여가 없고 사회에는 여성노동조합이 없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은 혈혈단신으로 성범죄 문제를 폭로하고, 그에 따른 역풍을 가림막도 없이 온몸으로 맞고 있다. 만일 우리가 피해자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일을 멈춘다면, 간신히 피어난 여성 혐오를 막으려는 움직임은 제도의 부재 속에 처참하게 막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가슴 속에 불편한 용기를 품고 여성 혐오에 맞서야 한다. 시위는 끝났고 총여는 폐지됐지만, 우리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