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는 내 인생의 자서전

[독자칼럼] 김희중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회원

2019-03-01     김희중





1972년 3월 1일, 나는 일본 이와데현 가마이시에 소재하는 신일본 제철 가마이시 제철소에 5개월째 연수 중이었다. 야간 근무 실습을 하고 돌아와서 아침을 먹고 눈을 붙여야 하는데 공연히 잠이 오지 않아 독신료의 뒤뜰을 서성거리며 어김없이 3.1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침 텃밭에서 나오던 주방의 다카하시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한마디 한다.

“김상은 야간 근무하고 들어왔으니 자야 할 텐데, 콧노래 부르는걸 보니 무슨 좋은 일있어?”
 
대답 대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해 주는 밥을 100여일 넘게 먹고 있었다. 나이 오십이 넘은 다카하시 아주머니는 일본인들 중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노래를 부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본인인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와 근접한 일본은 그 옛날에는 우리의 문화를 가져다 꽃 피우기도 했고 우리를 침범하여 고통을 준 나라이다. 1945년 패퇴한 일본이 돌아간 후, 이 땅에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가 재건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일본이 공급해 주는 과정에서 일본은 재기할 발판을 얻게 되었지만 우리들에게 찾아온 것은 굶주림이었다.
 
일본과는 절대 화해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승만 정권은 1960년 4월 19일 전국으로 번진 민주화 운동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4월 26일 대통령은 하야를 하였다. 이 의거로 민주화를 내건 장면 정권이 세워졌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들의 난립으로 장면 정권은 힘을 잃고 결국 5•16군사 정변을 초래했다. 정권을 잡은 까만 썬그라스의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는 혁명공약을 내세웠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들과 정치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대통령은 그가 내건 네 번째 공약인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굶주린 시민들”을 위한 노력은 아끼지 않았다.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잘 사는 나라에 가서 돈을 빌리려고 한 점이나 63년에서부터 77년까지 간호사 일만 천 여 명과 광부 팔천여명을 서독으로 보낸 일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금액이 년 간 5000여 만 불이 되고 이는 GNP의 2%에 달했다. 어떻게든 가난만은 물리치겠다는 굳은 의지는 당시의 박정희로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굴욕외교’라는 국민적 저항을 힘으로 막고 대통령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지 않고 당장 발밑의 불을 끄려는 소견으로 이 조약은 점차 한일 무역적자를 가져오는 불평등한 조약이 되었다. 이것은 강점기 일본에 착취당한 한국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위안부들의 사과와 배상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경제부흥’이라는 단일한 목적주의와 편파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조약은 이후에 우리가 기술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애를 써도 산업체들 뒤에서 원천 기술을 움켜쥐고 있던 일본이 부품류들을 거의 독점하는데 어떠한 통제도 할 수 없게 한 쓸모없는 협약이 되었다. 영악한 일본인들이 ‘한일 협정’시 이를 분명하게 명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일 무역적자는 점점 커져갔다. 세계가 일본을 에코노믹 에니멀이라고 부를 정도로 염치를 모르는 일본은 이후 우리를 발판으로 부흥하게 되어 세계 2위의 외화보유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하튼 이 탈 많은 ‘한일협정’시 우리나라는 무상 3억, 장기저리차관 2억, 3억이 조금 넘는 상업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푼돈이었지만 말 그대로 종자돈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포항종합제철’이라는 기간 산업체에 투자되었다. 그 자금의 일부로 내가 일본에 보내졌던 것이다.
 
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였으나 졸업을 해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기계직을 선택해서 포스코에 응시했던 게 운수대통 이었다. 포항의 독신료에서 우리들 기간직 3기 신입사원들 70여명은 사관생도식 집합교육을 받았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부서배치를 받고도 맡겨진 업무에 대한 교육과 연수를 받았고 보내질 나라의 언어를 익혔다.
 
1971년 10월 27일 나는 포항 종합제철(주) 제선부 제선공장 기계기술원 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며 하네다행 비행기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용광로에 지시된 원료를 장입하고 열을 가하여 녹여서 선철을 만들어 내는 시설을 운전하는 업무를 맡고 이 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 뭉개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흥분과 머릿속에 가득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감까지 겹쳐서 내 심장은 조그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보통 3개월의 연수가 고작이었는데 나는 6개월의 조업연수 후, 설비납품업체에 가서 우리가 설치해서 사용할 기계들을 사전 시운전하고 점검하는 업무까지 주어졌기에 햇병아리로서는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한일협정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도우모 아리가도우 고자이마스’를 입에 달고 살았다. 1970년 11월부터 1971년 10월까지 회사 연수원에서 하루에 평균 3시간 정도를 매일 일본어를 배우고 같은 해 11월에 연수를 받으러 일본에 왔다. 1년을 배웠으니 일본어가 서툴긴 했지만 일을 배우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일터에서 일본인들의 우월감에서 오는 거드름이나 핀잔은 무조건 모르는 척했다. 젊었기에 참기 어려워 부글거리는 화나 열등감을 억누르며 겉으로는 진지하게 감사하는 몸가짐을 유지했다. 그들의 기술을 배워 익혀서 애초에 뜻한 일을 차질 없이 성공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8시간씩 4개조가 3교대를 했다. 나는 매일 원료장입호퍼에서부터 컨베이어 벨트로 실려가서 100미터가 넘는 높이의 로정장 입구까지 시설 점검을 했다. 섭씨 1300도가 넘는 고온의 열풍을 만들어 용광로의 옆구리에 삥 둘러 뚤린 하구로 불어넣는 세 개의 남근모양의 열풍로와 송풍설비, 출선구를 나오는 쇳물을 유도하여 선철괴를 만드는 주선기까지 꼼꼼하게 검사했다. 섭씨 1300도의 열풍으로 철광석과 다른 부원료들을 녹여내는 용광로는 BFG(용광로 가스)를 발생시킨다. 이 가스는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가 있어서 조심해야한다.

교대 근무전에 우리는 모여서 체조를 하고 안전의 맹세를 외친다. 하나, 자기의 안전은 자기가 지킨다. 하나, 결정된 일은 절대 지킨다. 하나, 연락신호는 확실히 한다. 하나, 오늘도 재해 제로로 가자.

6개월의 기간은 일본인들과 헤어지기 섭섭한 감정도 은연중에 들게 했다. 처음에는 그들과의 관계가 어색했고, 돌려세워놓고 자기네들끼리 우리를 비웃는 것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말이 서툴러서 못 알아듣는 척 했을 뿐이다. 이런 소소한 감정적 손상을 일에 몰두함으로서 치유했다. 그들의 기술을 속속들이 배워 내 속에 옮겨 놓겠다는 의지는 점점 새롭게 변해가는 기계 설비와 함께 투지로 변해갔다.
 
가마이시를 떠나기 전, 쉬는 날에 나를 가마이시 다이부쓰(해변을 바라보는 대형 부처님 상)에 안내해 주었던 애짱(료의 사무보조 아가씨), 걸찍했던 다카하시 아주머니, 나에게 와다시노 죠카마치(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가라오케의 에미코짱, 크리스마스 단스파티에서 만났던 제선공장의 다카코가 그리고 료의 관리인 아오야마상, 노조위원 에구찌상, 그리고 나의 카운터파트 고마스 시로 주임이 조그만 송별파티를 해 주었다. 아직도 그 얼굴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일본 사람들은 ‘정치’나 ‘나라’,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을 떠나 인간대 인간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존재들이다. 간혹 과거사에 대한 속죄의 뜻을 개인적으로 표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메이커를 순회한 후 귀국하자 나에게 제1고로 기계설치공사 보조감독을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나는 곧 공사현장을 점검하면서 기계운전 작업표준을 만들어갔다. 1973년 6월 8일, 우리는 첫 쇳물을 성공적으로 뽑아냈다. 이 사업의 주역은 따로 있었고 우리는 조역이었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결과를 보았다. 섭씨 1,000도가 넘는 쇳물을 보며 나 같은 여러 조역들은 하나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포스코는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기간 중의 기간산업이었다. 포스코의 강철로 현대중공업이 대형원유운반선을 건조했다. 조선산업은 다시 여러 부품의 제조업체들을 만들어 냈다. 신발, 의류, 전기•전자등의 분야가 기반을 닦고 커지기 시작했다. 자동차생산도 시작되고 우리는 포니를 수출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근면하게 일을 했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이제는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강점기 동안 일본에 착취당한 우리 노동자들은 개인자격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시작했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소녀상 사업을 세계적인 사업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국교정상화와 함께 맺은 ‘한일 협정’시 모든 배상은 끝났다고 주장을 해왔다. 아베정권이 들어 선 이후, 한일 관계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경색 되었다.
독도를 자기네 땅 다케시마라고 하며 돌려달라 하고, 동해를 ‘일본해’라 하고, 전쟁을 포기했던 나라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재무장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기도 한다.
 
2015년 우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를 부인해오던 아베정권이 비가역적합의를 전제로 10억옌을 내어놓았을 때 우리 정부는 위안부 협정타결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위안부에 화대를 지불했고 우리정부는 포주가 되어 이를 받은 샘이었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원하던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강제노역의 손배소도 1,2심에서 패소한 채, 최종 대법원의 판결이 계속 미뤄지며 시효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즈음 수 백 명의 우리 아이들이 수장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탄핵당하고 투옥되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10억옌으로 만든 화해 치유재단을 해체했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비난을 하고 나셨다. 돈은 돌려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법원은 그동안 미뤄오던 손배소에서 우리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판결을 정부차원에서 비난하며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심지어 최근에는 해상 초계기로 우리 군함에 위협비행하며 시비를 걸어오기도 한다. 이들에게 우리 정부는 재무장의 구실을 줄 수 없어 단호한 대응을 망설이고 있다. 때마침 진행 되고 있는 북미회담을 바라보며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성찰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우리는 길고 험난했던 일제 강점기를 이겨내고 배고프고 서러웠던 20세기를 허리띠 졸라매고 이겨왔다. 이제는 은퇴한 우리보다 더욱 분발하는 후배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