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편 미자(微子)
제 18편 미자(微子)
이 편은 자왈(子曰)로 시작하는 장(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1,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미자는 떠나갔고, 기자는 종이 되었으며, 비간은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은나라에는 인자(仁者)가 세 사람 있었다.”
<해설> 미자(微子)는 사마천의 『사기』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은나라 최후의 왕인 폭군 주(紂)의 배 다른 형(庶兄)이다. 그러나 『여씨춘추』 「중동기(仲冬紀)」의 설명은 다르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미자는 이름이 계(啓)로 은의 최후의 왕 주와 동모(同母) 형제라고 한다. 그러나 미자의 생모가 미자를 낳았을 때는 아직 첩(妾)의 신분이었다. 이후 미자의 생모가 정처(正妻)가 되어 아들을 하나 더 낳았는데 그가 바로 은의 최후의 왕 주(紂)이다. 미자는 비록 선왕(先王) 제을(帝乙)의 장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가 첩의 신분으로 있을 때 낳았기 때문에 왕의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결국 왕의 지위는 그 어미가 정처가 되어 낳은 주에게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미(微)는 봉국(封國)의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爵位)다. 미자는 주(紂)왕에게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 미자는 은의 멸망을 예견하고 조상의 제사를 보존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망명을 택한 것이다. 마침내 은나라가 주에 의하여 멸망당하자, 주 무왕(武王)에 의해 송(宋)나라에 봉해져 은나라의 제사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은 고주의 마융에 의하면 주(紂)의 아저씨 뻘 되는 당내(堂內) 친척(諸父)이다. 기자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머리를 풀어 헤쳐, 미친 것처럼 가장하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노예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후일 주 무왕(武王)에 의해 조선(朝鮮)에 봉해졌다고 한다. 비간(比干)도 주의 학정(虐政)에 간언을 올렸으나, 폭군 주는 성을 내며 “내 듣자하니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 있다고 한다더라…”고 하면서 그의 배를 갈라 죽였다고 한다.
미자, 기자, 비간은 모두 주(紂)의 폭정을 간(諫)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자는 망명을 택하였고, 기자는 종이 되어 숨었으며, 비간은 끝내 간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세 사람이 각각 행동을 달리하였으나, 모두 종족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기에 공자가 인자(仁者)라고 한 것이다.
2, 柳下惠爲士師 三黜. 人曰 子未可以去乎. 曰 直道而事人 焉往而不三黜. 枉道而事人 何必去父母之邦.
유하혜가 사사(士師) 벼슬을 하였으나, 세 번이나 쫓겨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당신은 이래도 이 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곧게 도를 지켜 남을 섬긴다면, 어디에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도를 굽혀 남을 섬긴다면, 어찌하여 부모의 나라를 떠나겠습니까?”
<해설> 유하혜(柳下惠)는 노(魯)나라의 대부이다. 위령공 13에서 현인(賢人)으로 소개되고 있다. 사사(士師)는 사법관이다. 출(黜)은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유하혜가 벼슬자리에서 세 번이나 쫓겨나자, 주변에서 노나라를 떠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유하혜의 대답이 일품이다. 원칙대로 남을 섬긴다면 어디에 간들 쫓겨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칙을 굽힌다면 이곳에서도 받아들여질 텐데 굳이 부모의 나라를 떠날 이유가 있겠느냐?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곧은 도(道)를 버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말이 중간에서 끝난 듯한 느낌이 든다. 신주(新注)의 호인(胡寅)은 유하혜에 대한 공자의 평(評)이 뒤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3, 齊景公待孔子曰 若季氏則吾不能 以季孟之間待之. 曰 吾老矣 不能用也. 孔子行.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를 붙들며 말하길 “계씨만큼 대우하지는 못하겠지만, 계씨와 맹씨 중간 정도로 대우하겠소.”
다시 말하길 “나는 늙었소. 등용할 수가 없소.”
공자께서 떠나가셨다.
<해설> 대(待)는 가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사기』「공자세가」에서는 지(止)로 썼다. 계씨(季氏)는 노나라의 국정을 전횡하고 있던 계손(季孫)씨다. 계맹(季孟)은 계손씨와 맹손(孟孫)씨다. 삼환(三桓) 중 계씨가 가장 세력이 컸고, 맹씨가 가장 작았다. 계씨와 맹씨의 중간 정도로 대우한다는 것은 공자에 대한 예우를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다산(茶山)은 以季孟之間待之의 대(待)는 희뢰(餼牢)로써 예우하는 것으로, 신분에 따라 뇌례(牢禮)의 수(數)를 달리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옛날에 손님을 대접할 때 가장 까다롭게 따지는 것이 음식상인데, 각각 신분에 따라 그 음식의 수효를 달리하였다는 것이다. 공자에 대한 뇌수(牢數)를 계씨와 맹씨 중간 정도로 한다는 뜻이다.
『사기』에서는 이 사건을 공자 나이 30대 후반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청(淸)의 염약거(閻若璩)의 『사서석지속(四書釋地續)』에 의하면 경공 33년의 일로 그때 경공의 나이는 이미 60에 달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공은 처음에는 공자를 중용하려고 생각했으나, 훗날 마음을 바꾸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사기』에서는 당시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안영(晏嬰)이 방해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망한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고 만다.
4,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제나라에서 여자 가무단을 보내왔다. 계환자가 그것을 받고 삼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공자께서 떠나셨다.
<해설> 여악(女樂)은 여자 가무단이다. 계환자(季桓子)는 노나라의 대부로, 삼환(三桓)의 으뜸인 계손씨이며, 이름은 사(斯)다. 계강자(季康子)의 아버지로 노나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노나라 정공(定公) 14년, 공자 나이 56세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공(定公) 14년 공자는 56세의 나이로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 중략 … 얼마 후 공자는 노나라의 정사를 문란케 한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 따로 걸었으며,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다. 사방에서 읍으로 찾아오는 여행자들도 관리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모두 잘 대접해서 만족해하며 돌아가게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말하였다. “공자가 정치를 담당하면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다. 노나라가 패자가 되면 우리가 가까우니 먼저 침략 당할 것이다. 어찌 먼저 땅을 떼어 주지 않는가?” 여서(黎鉏)가 말하길 “청컨대 먼저 그를 저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지해서 되지 않으면 그때 땅을 떼어 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는 미녀 80명을 선발하여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락무(康樂舞)를 가르쳐 화려하게 꾸민 말 30사(駟)와 함께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여악(女樂)과 말들을 노나라의 도성 남쪽의 고문(高門) 밖에 벌려 놓자, 계환자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두 세 차례 가서 살펴보고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이에 각 지역을 순회한다고 노나라 임금에게 말하고는 그곳에 가 하루종일 놀면서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자로가 말하길 “선생님께서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하길 “이제 곧 노나라의 교제(郊祭)가 있을 것이니, 만일 그때 제사에 쓴 고기를 대부에게 나누어준다면 나는 머물러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자는 결국 제나라의 여악을 받아들이고 사흘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교제를 지냈으나 제사에 쓴 고기 또한 대부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사기』의 기록이 과연 사실 그대로인가는 의심스럽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논어에는 어디에도 공자가 노나라 사구(司寇)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하면서 이 자랑스러운 사실을 간과했을 리 없다. 또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사구의 직에 있으면서 재상의 일을 대행하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공자는 왜 소정묘(少正卯)를 죽일 때처럼 단호하게 재상으로서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또 계환자가 무슨 자격으로 노나라 임금에게 보내온 여악을 자신이 받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공자가 노나라 사구 벼슬을 했고, 그 때 이런 저런 일을 했다는 기록들은 아마 훗날 공자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설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크릴(H. G. Creel)은 이 장을 후세에 가필(加筆)된 위작(僞作)으로 보고 있다.
5,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 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辟之 不得與之言.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며 말하기를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하여 덕이 그리 쇠퇴해졌나? 지나간 일은 탓할 수 없지만, 닥쳐올 일은 쫓아갈 수 있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것은 위태롭다네.”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하였으나, 급히 달아나 피해 버려, 말씀을 나눌 수 없었다.
<해설> 접여(接輿)는 초나라 사람으로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세상을 피하였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의하면 성은 육(陸) 이름은 통(通), 접여는 자(字)라고 한다. 그러나 청(淸)의 유보남(劉宝楠)은 성이 접(接)이요 이름이 여(輿)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청의 조지승(曹之升)은 색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논어에 기록된 은사(隱士)들은 대개 그 사건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즉 헌문 41에 나오는 신문(晨門)은 문(門)에서 그 이름을 땄고, 이 편 6장의 장저(長沮), 걸익(桀溺)의 저(沮), 익(溺)은 나룻터(津)에서 그 이름을 땄으며, 7장의 장인(丈人)은 지팡이(丈)에서 그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접여 또한 그가 공자의 수레(輿)에 접(接)하였기 때문에 접여(接輿)라고 이름지은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주장이나 고증할 방법은 없다.
봉(鳳)은 공자를 비유한 말이다. 공자를 성인(聖人)을 상징하는 새인 봉황에 비유한 것은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何德之衰는 그런 공자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천하를 주유하고 다니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往者不可諫은 이제껏 헛되이 정치에 뜻을 두고 천하를 주유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탓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來者猶可追는 앞으로 닥칠 일은 쫓아갈 수 있다는 말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치에 뜻을 두지 말고 은거(隱居)하라는 뜻이다. 이(已)는 지(止)로 그만두라는 뜻이고, 이(而)는 어조사이다. 하(下)는 하차(下車)로 수레에서 내린다는 뜻이다.
접여는 높은 학덕을 갖고서도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둔지사(隱遁之士)다. 그런 그가 공자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왜 그렇게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고 애쓰고 다니느냐고. 이미 지난 일은 탓하지 않겠으니, 이제라도 단념하고 세상으로부터 은거하라. 지금 정치에 종사해 봤자 목숨만 위태로울 뿐이라고.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말을 나누려고 했으나, 접여가 달아나는 바람에 말을 나눌 수 없었다. 공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아마 자기가 왜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도가(道家)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크릴(H. G. Creel)같은 사람은 진위(眞僞)를 의심하고 있다.
6,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자로로 하여금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보게 하셨다.
장저가 말하기를 “저 수레에 앉아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로가 말하길 “공구이십니다.”
“노나라 공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오.”
걸익에게 물었다.
걸익이 말하길 “그대는 뉘시오?”
“중유입니다.”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천하가 다 그렇게 가고 있소. 이를 누가 바꿀 수 있으리오. 당신도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걸익은 씨앗을 흙으로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공자에게 가서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탄식하시며 말씀하시길 “새나 짐승과는 함께 떼지어 살 수 없는 것이거늘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설> 장저(長沮), 걸익(桀溺)은 모두 은둔지사(隱遁之士)다. 耦而耕은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가는 것이다. 집여(執輿)는 수레의 고삐를 잡는 것이다. 원래 자로가 고삐를 잡았으나, 나루터를 물으러 수레에서 내렸으므로 공자가 대신 잡았다. 是知津矣은 공자가 천하를 여러 번 주유하였으니,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장저가 공자를 기롱(譏弄)한 말이다.
도도(滔滔)는 큰 물이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誰以易之는 어느 누가 이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이(而)는 여(汝)로 당신이다. 辟人之士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로, 공자를 말한다. 辟世之士는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로 걸익 자신을 말한다. 우(耰)는 씨앗을 흙으로 덮는 것이며, 철(輟)은 그치는 것(止)이다. 무연(憮然)은 탄식하는 것이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는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야지, 새나 짐승을 벗삼아 산 속에서 은거하며 지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는 천하가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다면 내가 굳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가 어지럽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선왕(先王)의 도(道)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사는 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장저, 걸익의 도가(道家)적 세계관과 세상에 참가하여 도를 실천함으로써 백성을 평안케 하려는 공자의 유가(儒家)적 세계관이 잘 대비되고 있다. 공자가 보기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지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다. 또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 백성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다면 굳이 나서야 할 이유가 없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다. 이상은 주자(朱子)의 해설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다산(茶山)의 해설은 다르다. 다산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 의하면 誰以易之의 지(之)는 주자처럼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신을 가리킨다. 즉 걸익이 세상으로부터 은거하여 살려고 하는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겠다고 한 말이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는 걸익의 그러한 입장을 전해들은 공자가 그에 동조하면서 자신도 이 장저, 걸익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살겠느냐고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말이다.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는 지금 천하가 무도(無道)하여 내가 세상으로부터 은거하고자 하나, 만일 세상이 유도(有道)하다면 나도 내 입장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즉 군자는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자신의 학덕을 보이나, 도가 없으면 은거하는 법이니, 지금 세상이 무도하여 내가 은거하고자 하나, 만일 유도(有道)하다면 나도 내 입장을 고수하여 세상에 나아가 나의 도(道)를 펼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주자와는 달리 공자가 세상으로부터 은거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낸 말로 보고 있다.
7, 子路從而後 遇丈人以杖荷蓧.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雞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明日子路行以告.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潔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던 중 뒤에 처졌다가, 지팡이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어깨에 걸친 노인을 만났다. 자로가 묻기를 “영감님께서는 우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하길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을 구분할 줄도 모르면서, 누가 선생이란 말인가?”
노인은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을 맸다. 자로는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다. 노인이 자로를 붙잡아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먹게 하고는,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이튿날 자로가 공자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은자일 것이다.”라고 하시며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다시 만나보게 하셨다. 자로가 도착해 보니 노인은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하길 “벼슬을 하지 않으면 의(義)가 없어집니다. 장유(長幼)의 예절도 없앨 수 없는 것인데, 군신(君臣)의 의(義)를 어찌 없앨 수 있단 말입니까? 내 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오히려 큰 인륜을 어지럽히고 계십니다. 군자가 벼슬길에 나아감은 의(義)를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해설> 장인(丈人)은 노인이다. 하(荷)는 어깨에 걸치는 것이고, 조(蓧)는 대바구니다. 사체(四體)는 사지(四肢)다. 분(分)은 변(辨)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는 자로가 농사일에는 종사하지 않고 쓸데없이 선생을 쫓아 멀리 돌아다니는 것을 책망한 말이다.
식(植)은 세워 놓는 것, 운(芸)은 김을 매는 것, 공(拱)은 두 손을 마주 잡는 것이다. 子路拱而立은 자로가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예를 표한 것이다. 欲潔其身而亂大倫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은거한다고 하면서, 어찌 세상의 큰 대의(大義)인 군신간의 의는 부정하느냐는 말이다.
이 노인도 마찬가지로 은둔지사다. 노인은 자로를 비난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선생이라고 하면서 싸다니고 있느냐고. 자로는 뜻밖의 말에 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인의 말에 대꾸도 못하고 그저 공손히 서 있었다. 그런 자로를 노인이 집에 데려가 융숭히 대접하고는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아마 자로의 공손함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는 자신의 두 아들을 자로에게 인사시켰다. 세상으로부터 은둔해 사는 이 노인도 장유의 예절은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로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공자가 자로를 다시 보냈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을 남긴다. 군자가 벼슬에 나서는 것은 입신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의 의(義)를 행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집안에서 장유(長幼)의 예절은 지키면서 어찌하여 천하의 큰 대의(大義)인 군신의 의(義)는 무시하려고 하느냐? 당신은 자기 한 몸 깨끗이 하려고 세상의 큰 인륜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니냐? 군자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은 의(義)를 행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세상에서 도(道)가 실행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자로의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인의 일가족이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가운데 혼자 한 독백일 수도 있다.
5장부터 여기까지 모두 도가(道家)적 은자(隱者)들과 공자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은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간의 사회 생활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공자가 도를 실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기들처럼 은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난세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처세술이리라.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그들과 다르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인간 세상에 사는 한 인간의 일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자에게는 출사(出仕)의 이유가 된다. 인간 세상에서 무엇보다 큰 가치는 천하 만민과 더불어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제 한 몸 깨끗이 하기 위해 세상일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 큰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다.
8, 逸民 伯夷 叔齊 虞仲 夷逸 朱張 柳下惠 少連. 子曰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 謂柳下惠少連 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 其斯而已矣. 謂虞仲夷逸 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일민(逸民)은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백이와 숙제였다.”
유하혜와 소련에 대해 말씀하시길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동이 사려에 맞았다. 오직 이렇게 살아갔다.”
우중과 이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숨어살면서 말을 하지 않았으나, 몸가짐을 깨끗이 하였으며, 세상을 버리는 것이 시세에 맞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는 다르다. 할 것도 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해설> 일민(逸民)은 높은 덕을 갖고서도 세상으로부터 은거해 사는 사람이다. 우중(虞仲)은 주자에 의하면, 주나라의 창업자 문왕(文王)의 중부(仲父)인 중옹(仲雍)이다. 태백(泰伯)의 아우로 태백과 함께 왕위를 사양하고 오(吳) 땅으로 숨어버려, 아우인 계력(季歷)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문왕은 계력의 아들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태백 1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다산의 『논어고금주』나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은 『사기』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를 인용하여 중옹의 증손(曾孫)으로, 주나라 무왕(武王) 당시 오(吳)나라의 군주였던 주장(周章)의 아우라고 한다.
이일(夷逸)과 주장(朱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하혜는 위령공 13, 미자 2에서 나온 바 있다. 소련(少連)은 『예기』 「잡기(雜記)하」편에 동이(東夷) 사람으로 거상(居喪)을 잘 치른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
윤(倫)은 세상의 도리, 려(慮)는 사려(思慮)다. 중(中)은 들어맞는 것이다. 방언(放言)은 치언(置言)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폐(廢)는 세상을 버리는 것, 권(權)은 권도(權道) 즉 시세(時勢)다.
백이와 숙제는 주왕(紂王)의 무도한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또 주 무왕의 은 정벌에 반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으니,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백이를 가리켜 맹자는 『맹자』 「만장하」 1에서 성인 중의 맑은 사람(聖之淸者)이라고 하고 있다. 유하혜의 경우는, 미자 2를 보면, 어지러운 조정에 출사하여 세 번이나 쫓겨났으니, 비록 그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한 것이나, 그 언행은 사려 깊고 도리에 맞았다. 맹자는 유하혜를 성인 중의 조화를 이룬 사람(聖之和者)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맹자』 「만장하」편 1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은 공자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사적(事蹟)이 없어 알 수 없다.
또 일민으로 일곱 사람을 들면서 오직 주장(朱張)에 대해서만은 언급이 없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는 왕필(王弼)의 말을 인용하여 주장의 자(字)는 자궁(子弓)으로 그 행적이 공자와 같기 때문에 언급을 생략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無可無不可는 꼭 해야 하는 것도, 해서는 안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은거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술이 10,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券而懷之―위령공 6). 꼭 벼슬을 하겠다, 세상으로부터 은거하겠다 고집하지 않는다. 오직 의로써 비교하여 할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이인 10). 이런 공자를 가리켜 맹자는 시의에 따라 행동하는 성인(聖之時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민(逸民)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일민은 자유롭게 살아가는 고결한 은둔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세인(世人)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 『진서(晋書)』 「은일전(隱逸傳)」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후 역사에서도 일민은 하나의 주제가 되었다.
9, 大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少師陽 擊磬襄入於海.
태사(大師) 지(摯)는 제(齊)나라로 가고, 아반(亞飯) 간(干)은 초(楚)나라로 갔으며, 삼반(三飯) 요(繚)는 채(蔡)나라로 가고, 사반(四飯) 결(缺)은 진(秦)나라로 갔다. 북을 치는 방숙(方叔)은 하내(河內)로 들어가고, 소고를 흔드는 무(武)는 한중(漢中)으로 들어가고, 소사(少師) 양(陽)과 경쇠를 치는 양(襄)은 바다 속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해설> 태사(大師)는 궁정의 악사장이다. 지(摯)는 사람 이름이다. 태백 15에 나온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한다. 아반(亞飯)은 군주가 두 번째 식사를 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다. 이하 삼반(三飯), 사반(四飯)은 각각 세 번째, 네 번째 식사 때에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다. 간(干), 요(繚), 결(缺)은 사람 이름이다. 고(鼓)는 북을 치는 사람이며, 방숙(方叔)은 사람 이름이다. 하(河)는 지명으로 하내(河內) 지방이다. 파(播)는 흔드는 것이고, 도(鼗)는 소고(小鼓), 무(武)는 사람 이름이다. 한(漢)은 지명으로 한중(漢中)이다. 소사(少師)는 태사를 돕는 악관(樂官)이다. 격(擊)은 치는 것이요, 경(磬)은 경쇠이다. 양(陽)과 양(襄)은 사람 이름이다. 해(海)는 바다 속에 있는 섬이다.
정현은 주나라 평왕(平王) 때, 고주의 공안국은 노나라 애공 때의 일이라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 아반(亞飯), 삼반(三飯)의 반(飯)에 대해서도 식사라고 하는 견해와 요리라고 하는 견해가 맞서 있다. 주자는 공자의 말이 아닐 수도 있다고까지 하고 있다. 굳이 해설을 한다면 나라가 망할 때는 예악이 붕괴한다. 노나라가 망할 때가 멀지 않아, 악인(樂人)들이 이처럼 흩어져 세상을 은거한 것을 기록한 말이 아닐까 짐작된다.
10, 周公謂魯公曰 君子不施其親. 不使大臣怨乎不以. 故舊無大故 則不棄也. 無求備於一人.
주공이 노공에게 말하기를 “군자는 그 친족을 버리지 않아야 하며, 대신들로 하여금 쓰이지 않아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랜 벗은 큰 잘못이 없는 한 버리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갖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해설> 주공(周公)은 주나라 창업의 공신이며, 무왕(武王)의 아우인 단(旦)이다.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으로 보필하였다. 노공(魯公)은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다. 원래 주공 단이 노나라에 봉해졌으나, 성왕을 보필하는 관계로 주나라를 떠날 수 없어, 백금이 대신 노나라에 부임했다.
不施其親의 시(施)는 주자에 의하면 이(弛)로 버리는 것이고, 친(親)은 친족이다. 즉 친척에게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고주(古注)의 공안국은 시(施)를 역(易)으로 풀이하여 남의 친척을 자기의 친척과 바꾸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따르기 어렵다. 이(以)는 용(用)으로 쓰이는 것이다. 대고(大故)는 큰 잘못이다. 비(備)는 모든 것을 다 갖추는 것을 말한다.
신주의 호인(胡寅)에 의하면 노공이 봉지(封地)인 노나라에 부임할 때, 주공이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훈계한 말이라고 한다. 일가친척을 잘 보살펴 친족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면, 공동체 내부에 후덕한 기풍이 생겨난다. 또 그 사람됨이 대신으로서 부족하거든 등용하지 말아야 하며, 일단 등용했으면 그 지위에 맞는 일을 맡겨야 한다. 대신들이 직무가 주어지지 않아 불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벗과의 우정을 소중히 의 고, 사람을 부릴 때에는 그 기량에 맞게 부려야 하며, 한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다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참고> 태백 2에 군자가 친척에게 돈독히 하면 백성들 사이에 어진 기풍이 일어나며,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각박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또 자로 25에는 군자는 사람을 부릴 때 각기 그 기량에 따라 하고, 소인은 모든 것을 다 갖출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 있다.
11, 周有八士. 伯達 伯适 仲突 仲忽 叔夜 叔夏 季隨 季騧.
주나라에 여덟 명의 선비가 있었다. 백달(伯達)과 백괄(伯适), 중돌(仲突)과 중홀(仲忽), 숙야(叔夜)와 숙하(叔夏), 계수(季隨)와 계과(季騧)이다.
<해설> 이 여덟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분분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황간은 『논어의소』에서 한 어머니가 네 차례에 걸쳐 아이를 낳았는데, 낳을 때마다 쌍둥이여서 도합 여덟 명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백(伯), 중(仲), 숙(叔), 계(季)에 맞춰 두 명씩 이름이 지어진 것을 들고 있으나 역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는 『논어징(論語徵)』에서 향당편 마지막의 山梁雌雉 운운하는 장, 계씨편 마지막의 邦君之妻 운운하는 장과 마찬가지로 논어와는 상관없는 내용이 잘못 끼어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