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정동(十井洞)

- 이경림

2019-08-08     정민나
 


십정동(十井洞)
                        
                                      - 이경림 -

 
이곳에 주저앉은 지 오래입니다 햇수를 알 수 없습니다
열 우물이라 부르는 마을입니다 이사 온 지 몇해 지나도록
그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엘리베이터에서 새로 이사 온 옆집 새댁이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 우물이 많나요?”
“무슨?”
어리둥절 되묻다가 문득 열 우물이 생각났습니다
이 빽빽한 아파트 숲 어디에 열 개의 우물이
숨어 있을 것도 같아 가슴 두근거렸습니다 그후 열 우물……떠오를 때마다 가슴 호젓했습니다
 
첫새벽 옆집 남자가 조심, 계단을 내려가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아파트 현관에서 마주치는 이웃이 가만히 목례하며 알 듯 모를 듯 미소 짓는 것도
한밤중 머리 위에서 위층 내외가 퉁탕거리는 것도
이따금 찢어질 듯 우는 301호도 알 것 같았습니다
열 우물, 열 우물……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뜸부기 소리 같은 것 좇으며
또 한 백년 흐르겠지요
 
늙은 아카시아 우듬지에 세 든 까치 가족이 먹을 물도 모자라는 시절이
장검(長劍)처럼 번쩍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옷 벗듯 몸 벗고 홀연 날아간 온갖 혼들이 밤마다 목 축이러 내려와
어린 나뭇잎 같은 손 뻗어 입술 축이고 물끄러미,
사라진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 가는
우물 열 개가 이곳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런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몰래 흘러가는 곳이
이 열 우물이라는 마을이 아닌가
 
아파트는 매일 키를 늘립니다
길들은 더 깊어지고
그 위로 우워어 우워어
몽둥이 바람 몰려갑니다
 
여기가 천길 우물의 속이라고
여기가 열 우물의 한 속이라고
 
 

십정동(十井洞)은 인천 부평구에 위치하며 5만(2008년 기준) 인천 시민들이 사는 동네 이름이다. 예로부터 열 개의 우물이 있어 ‘열 우물’ 또는 ‘십정리’로 불리어 오다가 1946년 십정동이 되었다.
 
시인은 ‘열 우물’이라는 마을에 대해 어떤 의문도 없이 살아오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젊은 새댁의 질문을 받게 된다.

“이 마을에 우물이 많나요?”
순간 무심하게 잠자던 시인의 직관이 번뜩이며 깨어난다. “이 빽빽한 아파트 숲 어디에 열 개의 우물이 숨어 있을 것 같다”, “열 우물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호젓하다"
 
시인이 연상한 깊은 우물은 여러 개의 상징을 갖는다. 십정동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 사건을 열 우물과 관련지어 상상할 때 여성의 관능적인 육체가 떠오르기도 하고 예로부터 우물은 귀신과 연관되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였기에 이 시에서 우물귀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물에 제 얼굴을 들여다보러 오는 귀신은 언뜻 섬뜩할 것 같은데도 신화적인 이런 이야기가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비속성을 띄면서도 희화화한 재미로 이 시는 독자들을 이끈다. 이러한 이야기 시는 또한 독자의 원초적 감정을 일깨운다. 인간의 집단무의식과 심층 구조에 대해 고민을 한 사람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다.

이경림 시인 역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신비로운 심층의 정신세계를 순수하게 표현한다. 길들이 더 깊어지고 그 위로 도깨비의 몽둥이 바람 불어간다고 주술 어법으로 인천의 설화를 풀어낸다. 열우물이 있었다는 상상만으로 수직으로 올라간 이 아파트 마을은 천길 우물 속과 동일시된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은 건조함에서 촉촉함으로 변환되는 느낌을 일시에 가지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녹지 비율이 높아지고 조경이나 수변공원 등이 갖춰져 살기 좋은 단지형 아파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들도 살아보고 좋아들 한다니 십정동에 아직도 우물귀신이 있다면 여기가 “열 우물의 한 속이라고” 기쁘게 몰려다닐 것 같다.
 
시인 정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