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감(自尊感) 키우기
[독자칼럼] 유병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우리가 일상의 대화에서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 중에는 듣는 사람이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비교적 소심하고 남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나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1987년 야간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 승용차의 필요성이 절실해 운전을 배웠다.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자마자 차를 마련하여 운전하기 시작했고 어언 30년의 경력자가 되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넓은 차로 한가운데에 내가 있는것이 무서워 차에서 내려 인도로 가고 싶기도 했고 이런저런 실수도 많이 했지만 승용차 덕분에 어떤 일을 할 때 시간과 힘을 덜 들이고 처리할 수 있어 운전을 배운 덕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여선생님들이 둘러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J 선생님이 “나 어제 운전학원에 등록했어요. 유 선생님이 운전하시는 것을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 말은 즉 ‘유 선생도 운전을 하는데 내가 왜 못 하겠어?’ 라는 말이 아닌가? 그의 말은 계속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드디어는 내 마음의 작은 상처가 되었다.
워낙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할 줄 아는 운동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퇴직 후에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좀 배워야지‘ 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I 대학교 평생학습관에서 스포츠댄스 강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직한 몇 분 선생님들과 같이 수강 신청을 하고 그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라틴댄스를 배웠다. 2-3개월 후에는 입소문이 나서 퇴직한 선생님만도 그 수가 1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얼마 후 그곳 관장님이 바뀌면서 그 강좌가 폐강이 된 것이다. 모처럼 재미있게 댄스를 배우던 중에 그만두기가 서운해서 강사님과 의논하여 다른 곳에 장소를 마련하고 계속 댄스를 배웠다. 어느 날 휴식시간에 회원들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L 선생님께서 “나는 춤 배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그런데 유 선생님도 배우신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여기에 나오게 됐어요” 하는게 아닌가?. J 선생님이 운전을 배우게 된것이 나 때문에 용기를 냈다 해서 마음의 상처가 됐었는데 이제 춤까지 또?~~~. 그분들의 말이 그런 뜻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었던 나는 남들에게 비추어진 내 모습이 초라한 것 같아 그런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상처를 받았다.
나는 명예롭게도 2001년 내가 졸업한 I여자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하다가 정년 퇴직하였다. 1908년 일제 강점기에 개교한 모교는 해방이 되고서야 모든 교직원이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학교장도 해방 후부터 한국인이 발령을 받았고 나는 17대 교장이였다. 그 열일곱 명 중에 모교 출신은 내가 처음이였으므로 모교 출신으로서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나 해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개교한 지 90여 년이 된 모교의 역사를 찾아 정리하는 일도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여 연혁관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1908년 개교한 모교는 공립 여자고등학교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중 하나이다. 동창회장과 학교의 선생님들, 행정실장과 의논하여 장소와 크기를 정하고 동창회에서는 기금 모금을, 나와 그 당시 모교 출신으로 재직하고 계셨던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다른 학교의 연혁관 탐방, 자료 수집과 자료 선택 등의 일을 시작하였다.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1908년 개교당시 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와 1950년 6.25사변 전후의 자료 찾기가 가장 막막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선 내가 만날 수 있는 선배님들을 찾아보았다. 수소문 끝에 동인천역 근처에 있는 한 식당에서 해방 전 모교에 재학했던 선배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날짜에 맞추어 식당으로 찾아갔더니 1931년 18회 졸업생이시며 모교의 초대 동창회장이셨던 장 * * 선배님. 29회 선배님, 33회 선배님 두 분, 34회 선배님 두 분 등 여섯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에게서 재학 당시의 여러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귀한 자료까지 받았다. 특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모교에 입학했던 8회(1921년 졸업) 이 * * 님의 딸이 우리나라 횟션계의 거목이신 노 * * 여사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그분을 찾아뵙고 여러 가지 자료를 받는 등, 마치 넝쿨 하나를 들어 올리면 그 넝쿨을 따라 옆 가지의 넝쿨이 또 들어 올려지는 것 같이 여기저기에서 뜻밖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이런저런 사실을 찾아내면서 느끼는 그 가슴 뛰는 기쁨은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이 이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었다. 시작한 지 일년 후 미흡한 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하기로 하고 90여년간의 모교 역사를 담은 연혁관을 개관하였다.
2008년은 모교가 개교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동창회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00년사를 출판하기로 하였다. 연혁관을 설립한 경험을 바탕으로 100년사 출판의 주무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일에 관심이 있는 동문 몇 분들과 팀을 만들어 이번에는 좀더 광범위하고 자세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이것이 내가 하던 일 중에 가장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었고 그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했던 어떤 일보다 열심히 이 일에 몰두했었다. 이것은 남이 강제로 나에게 시킨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선택한 일들이다.
연혁관 설립과 100년사를 출판하기까지 이루어낸 뜻밖의 성과들은 나도 모르게 나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고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퇴직 후 힘들게 배운 수영이나 해보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 생각지 않았던 글쓰기를 배우면서 나는 나름대로 성취감을 느꼈고 또 교직에서 만날 수 없었던 다른 세계에서 생활했던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경험도 나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동료 선생님이 운전을 배우게 된 동기가 나를 기준으로 했다는 말, 댄스를 배우게 된 것이 나를 보고 용기를 냈다는 말에도 상처를 받았던 것은 나 자신의 자존감이 부족했던 때문이였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정하는 마음이 자존감이다. 나의 존재가치는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 이루어낸 성취로 자신감이 생기고 이것이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삶을 정성스럽게 살아갈 때 자신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생기고 이런 자신감 위에 자존감이 더해질 때 나는 멋진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