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주기 손돌공 진혼제를 마주하다

24일 김포 대곶면 어르신 제관되어 거행... 정하영 김포시장 초헌관으로 참여 天險의 급물살 강화해협에서 첩자로 의심받아 죽음당한 손돌의 넋 위로

2021-11-25     허회숙 시민기자

 

1232년,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파천하던 고려 고종 일행을 도운 손돌공. 그의 진혼제가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11월 24일(음력 10월 20일) 오전 10시 30분에 거행됐다. 김포 충절의 상징인 손돌공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이 진혼제는 김포시 대곶면 손돌공의 묘 앞에서 봉행되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789년이 지난 후다.

   

필자는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옛날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에 매년 이 날이면 어김없이 ‘손돌이추위’가 몰아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설같이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231년 몽고군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떼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 고종이 다음 해(1232년, 고종 19년) 강화도로 파천하게 되었다. 고종 일행은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건너기 위해 이 곳 지리에 밝은 손돌이의 배를 타게 되었다. 

강화해협(속칭 염하강)으로 불리는 이곳은 물살이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천험(天險) 으로 불리며 강화를 외침으로 부터 보호해 준 곳이기도 하다.  급류가 흐르는 곳으로 물살이 세고 앞이 막힌 듯이 보여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이다. 마음이 초조한 고종은 그만 손돌이를 몽고군의 첩자로 의심하여 처형을 명하였다.

 

 

손돌이는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임금의 안전한 항해를 바라는 충정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운 후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고 아뢴 뒤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일행은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손돌이의 무고함을 깨닫고 손돌이를 잘 장사 지낸 뒤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까지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곳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손돌이의 제사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일제의 침략 이후 중단되었다가 1970년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장을 중심으로 대곶 면민들이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손돌의 묘는 사적 제292호로 지정된 덕포진(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내에 안장되어 있으며, 도지정 민속놀이로서 김포문화원 주관 하에 매년 음력 10월 20일 묘제를 봉행하고 있다.

 

24일 진행된 789주기 손돌공 진혼제는 푸른색 도포를 차려 입은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 어르신들이 제관이 되어 참배객들과 함께 절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진혼제가 거행된 24일은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고는 해도 예년보다 추위도 덜하고 햇살까지 밝은 드물게 좋은 날씨였다.

 

   이번 진혼제의 작헌례에는 정하영 김포시장이 초헌관으로, 신명순 시의회의장이 아헌관으로, 이성철 대곳면 노인회장이 종헌관으로 제를 올렸다.

   식전행사에서는 한국무용협회 김포시지부 무용단이 진혼무인 바라춤을 거행했다.

 

우연히 들른 덕포진 손돌 묘 앞에서 보기 힘든 진혼제를 보게되어 오랫만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23일은 연평도 포격전 1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를 향해 선전포고없이 포격한 사건이다. 북한의 사격에 우리 해병대도 K9 자주포로 맞대응 했다. 작년까지 '연평도 포격 도발'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불렸으나 올해부터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겼다는 의미를 담은 '연평도 포격전'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됐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스러운 마음이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시 손돌이 같은 이름도 없는 뱃사공이 국왕을 구해 왕조를 지켰듯이, 연평도 포격전에서 산화한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같은 일개 병졸들이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잊어서는 안되리라.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그들을 위해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한바탕 진혼제를 올리게 되는 날이 언제쯤 오려나? 손돌공의 진혼제를 끝내고 묘를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