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기슭 천년고찰 용궁사 - '스토리' 풍부한 인천의 문화자산
[포토기획] 흥선대원군의 친필 편액과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로 유명
1월 14일 오전,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대로 기온은 영하 10도 언저리를 맴 돌았으나 바람도 없고 햇살이 밝다.
용궁사에 흥선 대원군의 친필 편액이 있다는 이야기에 끌려 영종도로 향했다.
영종도는 필자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1950년 6.25사변이 터졌을 때 다섯 살이던 나는 할머니, 고모와 함께 리어카의 이불 보따리에 묶여 할머니의 왕고모가 살고 계신 영종(여단포)로 피난을 갔다. 교직생활의 마지막 2년간은 영종도 백운산 기슭에 있는 교육연수원장이 되어 배에 승용차를 싣고 영종도로 출퇴근을 했다.
남편은 경북 예천군 용궁면 출신인데 영종에 ‘용궁사’가 있다는 말을 듣더니 혹시 자신의 고향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 하는 호기심을 갖고 동행했다.
영종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백운산의 동북쪽 기슭에 용궁사(인천 중구 운남로 199-1)라는 고찰(古刹)이 있다.
간신히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산길을 500m 정도 올라가니 용궁사가 나타난다.
이 절은 지금으로부터 135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하다가 그 후 구담사(瞿曇寺)로 불리었다고 한다.
1854년(철종 5)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수되면서 용궁사(龍宮寺)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사(구담사)가 용궁사로 바뀌게 된 전설이 있다.
“옛날 손씨라는 한 어부가 영종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쳐 놓았던 그물을 길어 올렸더니 조그만 옥부처 하나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어부는 “잡히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뭐 이런게 걸렸지?” 라고 투덜거리며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물을 바다에 던졌다가 건져 올렸더니 이번에도 또 그 옥부처가 걸려 올라왔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어부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옥부처를 안고 와 백운사에 모셨다. 이후 사람들이 절 앞을 지날 때 소나 말을 타고 지나가게 되면 가축의 발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변이 생겨났다. 이에 사람들은 절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이나 소에서 내려 지나가게 되었고, 백운사는 영험한 절로 인근에 소문이 났다.”
흥선 대원군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절에 모셔진 불상이 용궁에서 나왔으니 사찰의 이름을 용궁사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현판을 써 주었다고 한다.
요사채에 걸려 있는 용궁사라는 편액글씨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보인다.
그러나 용궁사라고 고쳐 쓰게 된 이면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긴 세월에 걸친 대원군의 야심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안동 김씨의 위해를 피하기 위한 은신처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등 10여년간 머물었던 곳이 이 곳이다.
이 절은 규모가 작아 관음전, 용황각, 칠성각, 요사채가 가까이 모여 있고 윗쪽으로 최근에 만든 11미터 높이의 미륵불이 자리잡고 있다.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으로 기둥에는 근대 서화가이자 고종의 사진가였던 해강 김규진이 쓴 4개의 주련이 남아 있다.
관음전 안에 본래는 옥석으로 조각된 관음상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둑맞아 현재는 청동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전에는 범종각이 위에 있었는데 주차장 입구에 단을 쌓고 새로 범종각을 세웠다.
절 마당으로 올라서기 전에 용황각이 있고 그 왼쪽 뒤로 옛 대웅보전과 종무소가 보인다.
절 마당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요사채의 왼 쪽과 오른 쪽을 지키며 서 있다. 용궁사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 였다고 한다. 두 그루 모두 줄기 속이 텅 비어 있고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직도 건재하다. 나이테가 없어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이 절과 함께 1300여년간을 버티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0m, 둘레 5.63m 정도인 오른 쪽 나무가 ‘할아버지 나무’인데 인천광역시 기념물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사채의 왼쪽에 할아버지 나무보다 다소 작은 ‘할머니 나무’가 있다. 이 할머니 나무도 속이 비어 있다.
옛날부터 바로 옆 용황각의 약수를 마시고 이 ‘할아버지 나무’에게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원하면 효험이 있었다는 속설이 전해져와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두 나무는 마치 손을 뻗쳐 서로를 잡으려는 형상을 하고 있어 아직도 애정으로 얽혀 있는 듯 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소원바위로 오르는 길로 이어진다.
종무소에 누군가 계신 것 같아 문을 두드리니 새로 리모델링하여 어수선한 방안에서 열심히 컴퓨터로 사무를 보고 계신 스님 한분이 맞아 주신다.
인사를 드리고 몇 가지 궁금한 사실만 간단히 여쭈어 보고는 바쁘신 스님을 방해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서둘러 종무소를 나섰다.
용궁사는 규모도 작고 겨울철이어서 삭막한 분위기 였다. 그러나 절의 내력을 말해주는 전설과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에 얽힌 속설, 그리고 흥선 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까지 풍부한 이야기 거리가 있는 고찰이었다.
스토리텔링이 가장 주요한 문화적 자산이 되는 이 시대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마한 사찰인 용궁사가 인천의 미래에 문화유산으로서 큰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갖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