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법조타운' 명맥

[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학익동(下-29)

2011-07-28     이혜정


옛 소년형무소 일대 현 법조타운 모습.
<위 : 학익동 인천지방법원과 인천지방검창청, 아래 : 법조타운 내 관련 사무실 모습>

취재 : 이혜정 기자

학익동 일대에는 예나 지금이나 주요 기관이 몰려 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원과 검찰청, 구치소, 보호관찰소, 변호사·법무사 사무실 등 법조관련 기관과 회사들이 '법조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를 법으로 다스리며, 사회 구성원들이 법이라는 틀 안에서 규정을 따르고 사회정의를 세우려고 만들어진 타운이다. 고소·고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곳이기에 일반적으로 여기를 찾아가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법조타운에 발을 디딘 순간 시끄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의외로 조용한 지역이다.

법조타운 팻말이 적혀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는 높은 건물 두 채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인천법원과 인천지방검찰청이다. 찻길 하나를 사이로 사건들에 대한 법적·행정적 도움을 주려는 변호사·법무사 사무소 등의 사무실 간판이 빼곡히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 범죄수사와 소추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검사제도'가 처음 도입된 건 대조선국 법률 제11호 '재판소구성법'에 의해1895년 3월 25일이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업무상으로는 독자성이 인정됐지만 독립된 조직과 기구를 가지지는 못했다.

이후 1948년 8월 2일 남조선과도정부법령 제21호 '검찰청법'에 의해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인 검찰청을 두고 법무부 소속으로 됐다. 설치와 관할구역도 사법부 편제에 따라 설정하도록 했다. '검찰청법'역시 대검찰청, 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을 대법원,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으로 변경해 설치하고, 지방법원 지원 설치 지역에는 지방검찰청 지청을 둘 수 있게 됐다. 

인천에도 1983년 9월 1일 지방법원과 지방검찰청이 남구 주안 6동 983번지에 들어섰다. 또 1995년 3월 1일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설치와 함께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을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 인천지방법원이 강화군 법원과 김포시 법원을 두고 있지만 검찰에는 시·군 검찰 조직이 없다. 그래서 인천지방검찰청 본청은 인천시와 김포시, 부천지청은 부천시를 각각 관할한다. 이후 법원과 검찰은 이전을 해 현재는 남구 학익동 278-1번지와 278-2번지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에 전시돼 있는 사진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이곳은 지역 청소년 죄수를 수감하기 위해 소년형무소를 설치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인천소년형무소로 개칭하고, 해방 후인 1962년 인천소년교도소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인천구치소(남구 학익2동 278번지)가 있는 곳이다. 인천구치소를 중심으로 법원과 검찰청 등 법조타운은 당시 인천소년교도소 자리였다.

인천소년교도소 재직 당시 홍종식씨 모습<제공: 남구 학산문화원>.인천소년형무소는 다른 형무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헌병과 한국 현병들이 인문군 포로들을 이곳에 수용하고 문학산에서 돌 작업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연합군이 대규모로 퇴각하는 1.4후퇴가 일어나 포로들은 거제도로 옮겨졌다.

1949년 4월 인천소년형무소 시절 전근한 이후 학익동에서 거주하며 인천소년교도소에서 정년퇴직을 한 홍종식씨 이야기다.

"6.25전쟁이 일어나 피란을 해 경상북도 경찰학교엘 들어갔어요. 경찰학교 50기생이야. 거기서 학교를 졸업을 하고 그 앞에 칠곡면 한 고을에 가서 전투경찰로 있었어요. 그리고선 9.28수복 당시 전투경찰을 그만두고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여기를 보니까 이 형무소가 인문군 포로수용소로 됐어요. 그때 미국 헌병과 한국 헌병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수용해 문학산에 가서 돌 작업을 했어요, 그러다가 1.4후퇴때 중공군이 밀려 오지 않았어요? 그때 포로들이 거제도로 보내진 거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지방 좌익분자, 지방 빨갱이들을 붙잡아 수용을 했지요. 그리고 급하니까 그냥 일사분란하게 군법회의와 군법재판을 해버렸어요" -「학산문화총서 3; 구술자서전 남구사람들의 삶과 일」中 인천소년교도소 소년수들의 아버지 홍종식 옹 일부 내용-


인천시립박물관 입구에 있는 학익지석묘

인천소년교도소(현 인천구치소)는 선사시대부터 인천에 사람이 살았다는 걸 입증하듯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1927년 학익동 옛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서 조선총독부 소천현부(小泉顯夫), 택준일(澤俊一) 등에 의해 학익지석묘가 발굴됐다. 당시 발굴된 3기의 고인돌은 넒은 탁자 모양으로 그 안에 토기 조각과 돌화살촉, 돌칼, 숫돌 등 유물이 나왔다. 그후 소년형무소가 들어서면서 고인돌 1기만 남았고, 1971년 소년형무소 확장 공사로 이전·복원돼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지석묘는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 길이 2.6m, 너비 1.7m, 두께 0.6m에 이른다. 받침돌 한 쪽은 1개 석재로, 다른 한 쪽은 2개 석재로 장방형 묘실을 조성했다. 묘실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1929년 강전공(岡田貢)에 의하면 학익동 지석묘로 모두 8기가 있었고, 그중 3기를 경성대학에서 발굴해 2기를 복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1927년 이후 발굴이 한 차례 더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로 편마암제 석부와 전석(殿石) 등 다수의 석기류가 출토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익지석묘를 중심으로 주안동 지석묘 2기, 문학동 지석묘 1기가 거의 일직선을 이루는 분포양상을 보인다.

학익동 외에도 주안동 신기촌 일대와 도화동, 계양구 계산동, 동구 만석동, 중구 용유동에서 고인돌이 발견됐다. 뒤늦게 인천으로 편입된 강화 고인돌은 그 수와 질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이다.

청동기시대 족장 무덤인 지석묘들이 인천에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은「삼국사기」의 '비류건국설'을 뒷받침하는 단서이다. 특히 남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옛 인천소년형무소 자리였던 현 인천구치소 모습

학익동에는 도천단(禱天檀)길이라는 도로가 있다.

비룡삼거리에서 학익사거리를 거쳐 미추홀길과 연결된다. 이 길은 지난 2000년 인천시가 주요 도로 여러 곳에 명칭을 지을 때 생긴 이름이다.

도천단길은 학익동에서 문학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옛날에 '도천이 고개'나 '도천현(禱天峴)', 또는 '대천이 고개' '도차니 고개'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던 것에 유래한다.

문학경기장과 문학궁 사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옛 도천단길이 이어진다. 차량 두 대가 간신히 교행할 수 있는 작은 도로 옆에는 높낮은 건물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문학산 아래쪽에는 빌라촌이 옹기종이 모여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다양한 상점들, 작은 공원, 주민센터 등 편의시설이 있다. 작은 도로엔 인도가 없어 차와 사람들이 '무언의 신호'를 보내며 질서정연하게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모두 개발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옛 이 고개 서쪽 아래에 명칭 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도천단'이 있었다고 전해져 온다.


옛 학림사지인 현 학익초등학교

남구 학익동에는 아주 오래된 사찰이 있었다.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등과 함께 같은 배열에 놓인 '학림사지(鶴林寺地)'가 그곳이다. 강화도 일대 불교 유적과 역사를 비교하면,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되기 이전 인천지역(당시 인천직할시)에는 절이라곤 별로 없는 상태였다.

인천직할시에는 5교9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도 없거니와 왕실 원찰도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6년 6월 '사찰령'이 내려진 이후 30본산제에 따른 본산도 인천에는 없었다. 전설과 신앙의 대상인 탑파라든가 불상 등의 조성도 인천에는 미미한 상태다. 

그러나 1천6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천에 사찰이 없었던 건 아니다.

현재 학익초등학교 교정과 그 뒷산 일부에 있었던 '학림사지(鶴林寺地)'가 그곳이다. 지금은 학익초등학교 본관과 별관이 위치하고 그 뒤에는 큰 건물 두 채가 우뚝 서 있다. 

이 사찰은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중수된 걱으로 알려진다. 1949년 이경성(李慶成) 인천시립박물관장 일행이 사지를 답사하면서 문양이 있는 기와와 어형와 파편, 고려자기 파편 등을 다수 수집했다. 특히 '연우 4년 3월 중수(延祐四年三月重修)'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돼 고려시대 사찰임을 확인했다.

학림사지는 2차 세계대전 말기 인천여고보 교장인 노무라(野村)가 산책을 하다 초석 일부와 고려자기 파편, 기와 파편 등을 발견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인천부읍지 등의 문헌에 이 사찰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폐사된 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학자들은 사지 규모로 볼 때 이 절이 인천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밖에도 남구 일대에는 청량산 청량사지(淸凉寺址), 문학산 문학사지(文鶴寺址) , 연경사지(衍慶寺址), 길마사지(吉馬寺址), 주안산 주안사지(朱雁寺址), 개화사지(開化寺址)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학초등학교 내 인천도부청사

학익동과 문학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행정과 사업, 군사,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인천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곳이었다.

그 중심에는 인천도호부청사가 위치했다. 현재 문학초등학교 교정과 남쪽 도로 주변이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청사가 자리했던 곳이다.인천도호부청사는 조선시대 행정기관 중 하나로 상급기관인 목(牧)과 하급기관인 군(郡)·현(縣) 사이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정확한 도호부 건축연대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강희맹이 쓴 인천부승호기에 의하면 세종 2년(1424)에 이미 청사가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축되었음을 추측한다. 건축물 대부분이 소실돼 본디 배치를 알 수 없으나, 1878년 제작된 화도진도(花島鎭圖)에 그려진 인천 관아 모습과 1956년 경 문학초등학교 향토반에서 작성한 관아 배치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학교 정문엔 홍살문이 있었고, 좌우에는 군천광과 향청, 정면에는 2층 누문(樓門)인 외삼문이 있었다. 외삼문과 내삼품을 지나면 동헌마당이 나온다. 숙종조에 인천부사 이희조(李喜朝 : 1655∼1724)가 동헌을 인민당(仁民堂)이라고 칭했고, 동원 우측엔 내동헌이 있고, 동헌 좌측엔 객사가 있었다.

인천관아 정문 서남쪽으로는 연지지(蓮池)라는 인공 연못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조그만 섬을 만들어 지수정(知水亭)이란 정자가 서 있었다고 한다. 옥사는 향교에서 70m 떨어진 지점에 원형으로 돼 있었고, 훈문당에는 장대(將臺)라 불리는 활터가 있었다.

인천부읍지는 인천도호부에 객사(客舍)·동헌(東軒)·내동헌(內東軒)·삼문(三門)·사령청(使令廳)·향청(鄕廳)·군관청(軍官廳)·훈무당(訓武堂)·옥사(獄舍)·어용고(御用庫)·군기청(軍器廳)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13년 일제때 행정구획 조정에 따라 부천군청, 부천보통학교(현 문학초등학교), 경찰주재소 등으로 사용하면서 원형을 상실했고,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인 내동헌은 문학초등학교 내로 옮겨 신축하면서 당초 규모보다 축소돼 전면 6칸, 측면 2칸 반으로 지었다. 본디 건물은 사라지고 단지 도호부 터임을 알게 하는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인천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숙종 때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 고향이라 군으로 승격하고, 인종 때는 순덕왕후 이씨 고향으로 다시 부로 승격했다. 이후 조선 세종때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고향이라 도호부로 승격한 것으로 보아 가히 '왕비의 고을'이라고 부를 만했다.

도호부청사는 문학초등학교 옆 문학동 349-2번지(연면적 128평)에 객사(客舍)·동헌(東軒)·공수(公須) 등 7개 건물로 복원됐다. 이중 숙소로 사용되던 객사는 정면 9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어졌다. 동헌에는 부사가 망궐례를 올리는 모형을 만들어 옛 모습을 재현했다.

현재 인천도호부청사는 시민들을 위한 전통놀이 공간으로도 쓰인다. 시민들이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민속행사를 열고 전통혼례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인천도호부청사는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오후 6시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