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새는 시민회관에서 원형회전무대 예술회관으로
[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4) 류민희 선생 - 인천 문화예술공간 변천사(상) / 김진국 전 인천일보 부국장(문화부장) 대담·집필
류민희(柳敏熙) 선생은 196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본적은 중구 도원동이다. 이는 선친이 인천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80년부터 인천에 정착해 지금까지 40년 간 살아오고 있다. 1988년 인천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에서 시정 홍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0년 인천시립예술단체 관련 업무를 맡기 시작해 인천문화예술회관 개관과 퇴임한 2019년까지 인천의 문화현장에서 문화예술 기획업무와 문화행정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문화예술행정 전문공직자로 일 해오는 동안 인천 문화예술은 눈에 띠게 달라졌다. 대중공연이 불가했던 인천예술문화회관에 대중공연이 가능해지면서 문화예술 공연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됐고 서울에서 가야만 볼 수 있었던 공연과 전시도 인천에 유치됐다. 이런 것들이 도미노처럼 확산되면서 각 구에 문화예술 공간이 크게 늘기도 했다.
순환근무를 해야 하는 여느 공직자와 달리 한 분야에 전문적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그는 전문가의 역량을 확장시켰다. 지금은 인하대학교 문화경영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한 뒤 논문을 쓰면서 활발하게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연구에 정진해오고 있다.인천문화예술회관 건립과 함께 줄곧 회관을 지켜온 그는 인천의 문화공간과 시설의 역사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11월 8일 청라호수도서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김진국: 류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류 선생님께서는 30년 공직생활 대부분을 인천문화예술과 함께 하시면서 인천문화예술공간과 공연전시 기획으로 인천시 문화예술 발전에 큰 획을 그으셨습니다. 그 기간 다양한 장르의 문화행정 업무를 다루셨으니 인천 문화현장의 명과 암을 누구보다 많이 아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활동하신 90년부터 지금까지 경험하신 기억을 듣고자 합니다.
류민희: 네, 기억나는 대로 성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사실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정중히 사양할까도 생각했습니다. 제가 문화계에 그렇게 큰 족적을 남긴 바도 없거니와 특정분야의 예술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진국 : 인천 문화 40년 구술기록에 꼭 필요한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기자 생활할 때 선생님은 중요한 취재원으로서 많은 ‘소스’를 주기도 하셨습니다. 류 선생님은 문화예술 공간에 대해 정확히 잘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의 건립과 시민회관, 수봉공원의 이야기, 송도아트센터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듣고 싶습니다. 먼저 시민회관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인천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류민희 : 네,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건립되기 전 많은 공연, 전시를 인천시민회관에서 진행했습니다. 제가 일할 때, 건립한 지가 너무 오래돼 누수가 심해 보수공사를 자주 했지요. 설상가상으로 등급판정도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건립계획이 세워졌습니다. 당시 인천시립예술단이 있었는데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착공되던 시기 시립예술단은 수봉공원을 리모델링해 그 곳으로 연습공간을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김진국 : 인천시민회관은 주안에 있어서 인천사람들은 주안시민회관이라고도 불렀는데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30년 가까이 운영된 걸로 기억합니다.
류민희 : 시민회관은 1974년 건립되어 1999년 철거되고, 2000년 쉼터공간으로 새롭게 조성돼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근 30년 가까이 각종 공공 집회와 대중콘서트, 문화 예술 공연들이 활발히 열렸던 시민들의 공간이었지요. 당시로서는 1,350석이란 적지 않은 객석을 갖춘 현대식 공간으로 문화예술인이라면 누구라도 시민회관 무대에 서고 싶어 하기도 했지요. 인천에서는 공연과 콘서트가 열린 유일한 공간이었고 ‘미스 인천 선발대회’와 같은 행사도 열렸는데 대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86년 5.3 민주항쟁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로 시민들의 가슴 속에는 애환과 애증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당시 저는 시민회관 바로 앞 주안2동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여러 기억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인천시민들에게 시민회관은 매우 자랑스러운 공간이기도 했지요.
김진국 : 시민회관과 함께 중요한 문화공간이 수봉문화회관이었지요. 수봉문화회관은 현재 인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은 용도로 사용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곳에서 전시를 많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류민희 : 네 문화회관은 1982년 6월 개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1년 직할시 승격 후 인천예총이 새 출발을 하게 된 전환점이 되었지요. 그러나 지금처럼 연습실과 전시실 및 지하에 잘 갖춰진 소공연장을 꾸미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지요. 그 당시 시민회관을 떠나 임시 공간에 머물던 시립예술단이 수봉문화회관에 입주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으나 공간의 문제로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시립예술단의 입주를 계기로 개선된 연습공간과 공연장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특히 대형거울 설치와 캐나다산 단풍나무로 연습실바닥을 설치하고자 하는 시립예술단과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시청 간의 줄다리기가 팽팽했지요. 결국 시가 과감한 예산 투입을 결정하면서 시립무용단과 시립극단의 연습실이 완성되었습니다. 지하 소공연장의 무대까지도 완벽하게 설치되면서 크지는 않지만 훌륭한 무대를 갖춘 지금의 공간이 탄생한 것이지요.
김진국 : 저는 수봉문화회관이 처음부터 지금 같은 시설로 시작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의 시설들은 시립예술단체의 입주와 함께 갖춰지게 된 것이군요.
류민희 : 맞습니다. 덕분에 연습실과 대기실, 공연장, 전시실을 갖춘 다목적 공간으로 인천문화의 한 축을 담당해 올 수 있었지요. 아마 전국 어디에서도 인천예총처럼 시설을 제대로 갖춘 다목적 공간을 갖춘 곳은 없을 듯합니다.
더욱이 예총에서 위탁받아 운영을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경우는 없겠지요. 인천문화예술회관과는 별개로 수봉문화회관은 지역 예술단체들의 전시와 공연들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김진국 : 류 선생님 말씀을 종합하면 지금의 수봉문화회관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개관했고 이 때 인천예총 소속의 단체들이 상주하게 됐으며, 인천시립예술단의 입주를 계기로 훌륭한 공연장이자 예술인들의 터전으로 변모하면서 지금의 문화회관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이군요. 이제, 본격적으로 인천문화예술회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류민희 : 네, 현 인천문화예술회관은 1994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하면서 광역시에 걸 맞는 1524석의 대형공연장으로 출발 했지요. 소공연장도 524석이었고 3개소의 전시공간을 마련한 말 그대로 명실상부한 종합적인 문화예술회관으로 탄생했습니다. 그 당시 대구광역시의 인구는 230만 정도였는데 인천의 인구는 290만이 넘어가는 대도시로 대구를 넘어선 3대 도시가 되어 있었지요. 물론, 공연이 대형화되면서 그에 맞는 공연장이 필요한 측면도 있었지만 서울과 부산에 이은 대도시로서의 면모도 필요했다고 보여 집니다.
김진국 : 새로 짓는 것은 항상 경쟁력이 있는 법인데 개관 당시 인천문화예술회관만의 차별성이 있었나요?
류민희 : 물론입니다. 대공연장은 그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입체적 가동이 가능한 획기적인 원형 회전무대를 갖추고 있고 큰 무대 세트의 전환이 자유로워 볼거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멀리서 보면 배가 떠있는 듯한 외관으로 해양도시 인천의 특징을 잘 살렸지요. 한마디로 시설 전체가 매우 현대적이었습니다.
김진국 : 개관 초기에는 명칭이 종합문화예술회관이었습니다.
류민희 : 그렇지요. 당시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었죠. 그 이후에 종합이라는 명칭이 전문성이 요구되는 공연장으로써의 색깔을 퇴색시킨다는 여론이 있어 많은 지역예술인들이 지속적으로 개명 의견을 표해 왔습니다. 주민설문이 이루어지고 예술의 전당이나 인천 고유의 명칭인 미추홀 등의 단어를 넣은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요.
그러나 미추홀이란 이름은 외부에서 생소했고 예술의 전당은 서울과 지역과의 분쟁이 있었던 관계로 선뜻 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금의 예술의 전당은 지역마다 쓰는 보통명사화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그 후에 2차 설문을 통하여 종합 자만 제외한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정해졌지요. 그렇게 2017년 초부터 수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진국 :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문화예술회관도 개관한지 벌써 30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동안 리모델링 등 시설도 많이 달라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류민희 : 물론 변화가 많았지요. 우선 2009년 1차 리모델링을 하면서 편안한 관람을 위하여 대공연장 객석수를 1,332석으로 조정했고, 소공연장은 2017년 객석을 교체하면서 486석으로 조정했습니다. 또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야외 공연장은 제대로 된 음향시설과 조명기구들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공연장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내년부터는 다시 단계적으로 회관의 모든 시설에 대하여 리모델링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김진국 : 언제부터인가 야외공연장에서 공연이 펼쳐진 뒤 썰렁했던 회관 앞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야외공연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던 것 같습니다만.
류민희 : 야외공연장은 사실 공연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공연을 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회관 활성화를 연구하던 중 아이디어가 떠올라 야외공연을 시작하게 됐지요. 딱딱하고 권위적인 실내공연장이 아닌 야외에서 편하게 공연을 즐기게 하자는 착상으로 무대의 지붕을 만들고 조명기구를 설치했어요. 공연장 리모델링을 하면서 철거된 음향시설을 야외공연장에 재활용하면서 공연장다운 공연장 무대로 만들었지요. 어쩌면 가장 작은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회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김진국 : 인천문화예술회관은 공연장 뿐 아니라 전시실도 최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시실에선 미술 서예 전시 뿐 아니라 출판기념회와 같은 행사도 치러지는 것 같은데요. 처음 3개의 전시실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4개소로 확대된 것 같습니다.
류민희 : 처음 3개였는데 2005년 미추홀 전시실을 하나 더 만들면서 4개소의 전시공간을 갖추게 됐습니다. 나중에 설치된 미추홀 전시실은 독립적 전시공간입니다. 그러다보니 대관경쟁이 가장 치열하고, 가장 경쟁력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외 인천문화예술회관엔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와 국제회의장도 있습니다. 당초에 통역시설을 갖추면서 국제회의장이라는 명칭이었습니다만, 활용가치가 없어지면서 이제는 회의장으로 부르고 있지요.
김진국 : 이 정도의 규모와 시설이면 이곳에서 근무하는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류민희 : 현재는 관장님을 비롯해 60여명 정도가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시립예술단체에 근무하는 전문예술인들도 4개 단체 220여명이 출퇴근을 하고 있지요. 공연과 홍보를 담당하는 직원도 생겼으니 많이 발전한 거죠.
김진국 : 인천문화예술회관 산증인의 말씀을 들어보니 좋은 부분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개관 초기엔 힘든 일도 있었을 법 합니다.
류민희 : 1980년대에는 전국에 문화예술회관이 26개소 밖에 없었지만 경제발전에 따라 문화시설확충을 목표로 한 지방문화5개년 계획이 수립되면서 90년대 들어서는 66개소가 추가로 개관을 했어요. 인천에서는 94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이듬해인 95년에는 서구문화예술회관과 97년에는 계양문화예술회관이 차례로 개관하면서 문화공간이 급속히 확산되었어요. 반면 인천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설관리에만 충실할 뿐 효율적으로 운영할 조직적 기반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회관의 경우 공연팀의 직원 3~4명이 주로 대관과 공연장관리 미술품관리 등을 담당했는데 다툼이 많은 민원부서로 고생이 적지 않았지요.
김진국 : 예를 들어 대관자격이 되지 않거나 구비서류를 해오지 않고 무작정 대관해달라, 다른 사람들은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거냐, 이런 식의 민원이 발생한 것인가요?
류민희 : 초기에는 대관 경쟁률이 상당했어요. 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다보니 좋은 시설에 비해 대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지요. 전시실과 공연장의 대관 경쟁이 심하다보니 탈락한 사람들은 이의신청과 민원제기를 하기 일쑤였지요. 그 분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처음엔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관객들도 개관 초기 공연예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웃지 못 할 실수를 많이 했어요. 연령제한 공연에서 입장문제로 다투었고 가끔 음식물을 숨겨서 반입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공연 중에 슬며시 음식물 섭취로 냄새가 나거나 바스락 소리로 주변관객이 항의하기도 했고 씹던 껌을 카펫바닥에 떨어뜨리거나 의자에 붙여놓은 바람에 피해 관객이 회관에 세탁비를 청구하기도 했지요. 안내원과 직원들이 입구에 서서 껌을 버리지 못 하게 하거나 음식물 반입검사를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김진국 : 그런 민원업무에 치이다보면 공연을 기획하고 유치해야 하는 공연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 점차 개선이 돼 대관 외 회관 자체 기획공연을 하며 좋은 공연을 많이 유치한 걸로 기억합니다.
류민희 : 기획공연에 관련된 이야기에 앞서 대관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보겠습니다. 개관 당시엔 공연장의 규모에 걸 맞는 좋은 공연을 유치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지요. 행사성은 대관을 불허하였고 지금은 일반화한 대중콘서트 공연에 대관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무슨 이야기인가 할 거예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대중공연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여겨 대관 불허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중콘서트의 경우 어렵게 대관이 된다고 해도 진흥기금을 공제한 매출액의 30%를 징수하는 특례조항이 있었습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공연이라고 대관을 원천적으로 불허하거나 특례적용과 대관료를 납부해야 했으므로 공연 자체가 어려웠지요.
김진국 : 지금은 대중공연이 한류를 이끌어가는 세계적 효자상품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당시엔 그런 권위적인 태도가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류민희 : 물론입니다. 당시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운영규정을 세종문화회관에 맞춰 적용했는데 세종문화회관은 대중콘서트 대관을 불허하고 있었지요. 지금도 대중콘서트는 대관이 쉽지 않은데 그 당시는 오죽했겠습니까? 게다가 문예진흥기금 징수 제도가 있었으므로 공연기획사들은 아무리 인기 있는 공연을 무대에 올려도 수익이 발생할 수 없는 구조였지요.
김진국 :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전국최초로 조례개정을 통하여 징수금액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고 들었습니다. 말하고 보니 이것도 전국 최초이네요. 어떤 이야기인지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류민희 : 네 그 부분에서 아주 열정적이었던 현 인천도시공사 윤병석 상임감사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윤 감사가 당시 회관 팀장이던 시절 2004년부터 조례개정을 위한 의회 설득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다른 공연과 같이 흥행물 징수조항을 없애려고 했지요. 그러나 조정을 통하여 30%에서 10%로 낮추는 정도로 협의되고 이듬해인 2005년부터 시행되었지요. 그에 따라 영화 및 흥행물이 있는 공연은 부가세를 제외한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징수하는 것으로 조정됐고 사용료에 미치지 못할 때는 사용료만 징수하는 것으로 했어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어서 타 시도에서 문의도 오고 인천과 같이 시행하는 곳도 여러 군데 생기기도 했던 좋은 사례입니다.
김진국 :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그런데 흥행물 규정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류민희 : 사실 그 부분이 가장 불편하고 난해한 규정이었어요. 의회 협의과정에서도 조정하지 못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흥행성 있는 관람물의 범위를 대형뮤지컬과 대중가수의 콘서트 등 상업적 공연과 기타 위원회에서 흥행성 관람물로 결정한 공연으로 한다는 어중간한 설정으로 정리되었어요.
김진국 : 뮤지컬까지 그렇게 적용했나요?
류민희 :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뮤지컬이 크게 일반화되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었고 무대규모가 방대하고 출연배우들이 많다보니 그렇게 보였겠지요. 사실은 순수예술이라고 규정하는 유명클래식이나 오페라 등은 뮤지컬보다 관람료가 고가인 경우가 흔했고 높은 관람료 책정으로 자존심을 세우기도 하고 관례로 높게 가격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김진국 : 그러나 아무리 순수예술이라 해도 손해를 감수하며 공연하지 않는 이상 영리성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요?
류민희 : 그런 문제들로 서로가 다툼이 많기도 했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문제들은 조례개정 후에도 약10년 동안 이어졌어요. 그 후 2016년 개정을 통해 일반과 상업적 공연물로 구분하여 대관료를 차등 적용했어요. 상업적 공연물로 대중가수 콘서트 등과 흥행성 뮤지컬, 오페라, 연극, 영화촬영 등으로 적용하고 설문결과 매출액으로 구분하지 않고 대관단체나 기획사가 원하는 합리적인 수준의 정액으로 책정되어 매출액 축소 같은 다툼이 없어졌습니다.
김진국 : 그럼 이제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류 선생님께서 근무하시는 동안 기억할 만한 이야기나 이슈가 되었던 전시가 있다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류민희 : 전시는 특이할만한 사항이 몇 가지 있어요. 먼저 개관 기념에 맞춰 전시되었던 ‘아! 고구려’ 특별전은 기록할 만한 역사를 세웠어요. 조선일보에서 전국순회 중이었는데 1,500년전 고구려 집안(集安) 고분벽화 전시가 37일간 50만 이상이 관람하는 대기록을 세웠지요. 초, 중, 고생 단체관객이 광장에 가득했고 아마 인근 지역학생들도 모두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일반관객 또한 너무 많아서 2시간 연장해 오후 8시까지 관람하면서도 다 수용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듯합니다.
1999년엔 서울을 제외하고 지역에서는 드물게 ‘아트페어전’도 진행했었어요. 출향작가와 인천 중견작가 70여명이 한 자리에서 작품을 선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작가들의 반응 또한, 상당히 좋았습니다. 회관에서는 홍보와 진행에 따른 일천만원을 지원하였고 관람객 2만명이 돌파하면서 수익도 거두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 전시 관람료 책정으로 지역작가나 일반관객들의 원성도 있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20주년 기념으로 그동안 지역문화예술을 위해 노력해 오신 원로작가 초대전을 열어드린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원로작가 선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가능한 한 대부분 출품되도록 노력했어요. 그것을 계기로 지금도 매년 원로작가 초대전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물론 주체는 바뀌었지만...
김진국 : 이야기 서두에 시설을 설명하시면서 수장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수장고는 시립박물관에만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 회관의 수장고는 어떤 곳인가요?
류민희 : 시가 보관하고 있던 많은 작품들을 이관 받아 수용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항온 항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미술품을 보관하기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시설을 추가하고 항온 항습을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역부족이지요. 지금 인천시립미술관 건립을 추진 중인데 미술관이 속히 건립되어 이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장고엔 현재 가장 고가라고 알려진 ‘노송도 병풍’을 비롯하여 미술, 도자기, 사진 등으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하여 시에서 지역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거나 기증품들 수백여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