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에서 비색(非色)을 걸러내는 작업, 동양화의 깊이죠”
[문화지대 사람들] 이의재 동양화가 잇단 개인전에서 문인화의 멋·먹의 깊이 보여줘 최근 먹을 절제하는 기법에 몰두
인천문화예술회관 수협사거리 인근의 화실에서 만난 동양화 이의재 화백은 여전히 문하생들과 그림을 나누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화실을 꾸려온 지 20년째다. 최근엔 일주일에 이틀 이곳을 지킨다. 유독 인천에서 한국화가 제자가 많은 그다.
“인천미술협회 동양화분과 작가의 열명 중 둘 셋은 제자였죠. 지금은 이곳 화실에서 가르친다기 보다는 같이 작업한다고 보면 됩니다. 경력이 10년에서 30년 된 작가들이거든요.”
그림을 그려온 세월이 “45년 정도”라고 헤아리는 화백이다. 경력에 비하면 개인전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오히려 3년전부터는 매년 한차례씩 세 번을 이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골에서 농막 생활을 하며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이틀을 뺀 주 5일은 그곳에서 작품에 빠져있다.
“인생에서 이젠 내 세계를 펼쳐보자 해서 단행한 시골살이입니다. 나를 위해 온 시간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림이지요.”
그림 그리는 작가를 업으로 살아오면서 젊어서부터 많은 강의를 다녔다. “아시다시피 작가로 사는 건 힘든 일이죠. 30대부터 1주일 내내 강의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다녔습니다. 내 작품을 하는 것보다 가르치는 일이 앞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아이를 어느정도 키우고 나서는 비로소 화실수업으로만 줄일 수 있었습니다.” 본인만을 위한 시간으로 쓰기 위해서 많은 세월이 흐른 셈이다.
#. “문인화는 사람·그림·글”
전시 이야기로 넘어가자 책 한권을 내놓는다. ‘사람 그림 글’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책장을 넘기자 ‘책머리에’에 쓴 글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이고 여기(餘技)로 쓴 글입니다. 책을 보거나 한가하게 쉬는 시간에 자연을 엿들으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놓았던 글입니다, 집과 화실에 핀 꽃들, 좋아하는 시기에 맞춰서 여행을 가고 자연을 즐기며 그렸습니다. 그렇게 그린 그림 중에 몇 점을 골라 전시하고, 책에 수록하고, 글을 덧붙였습니다’
책 서두에서 밝혔듯이 지난 2020년 10월 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에서 아홉 번째 개인전을 열면서 낸 책이다.
“작품은 문인화를 내놓았습니다. 책 제목에 ‘문인화’라고 쓰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그림을 그렸고, 그리고 글을 썼죠. 그 마음을 담은 제목이 ‘사람 그림 글’입니다.”
문인화하면 옛 선비들이 여기(餘技)로 끄적거린 글과 그림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저에게 문인화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예컨대 매화가 필 때면 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에 참여해서는 3박4일동안 매화 그림에 몰두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그렸던 ‘금잔옥대’(金盞玉臺) 수선화는 제주도 도보여행에 나서서 그리죠. 혹은 집안에 핀 석란을 화선지에 옮기기도 합니다.”
몇 년을 그리다보니 그림이 꽤 많아졌다. 전시 한번 하자고 결심한 계기다. 내친 김에 그동안 써 놓았던 글을 묶어 화집으로 펴낸 것이다.
“쉽고 편한 그림이잖아요. 와서 본 이들이 공감을 전했습니다. 내가 즐겁게 그린 그림에 호의를 더해주니 그 또한 좋았습니다.”
문인화는 이 화백이 계속 몰두하고 싶은 분야다. 그림과 글을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책을 더 많이 읽는 것이 전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동양화의 선과 멋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야 해요. 중국 명대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동기창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여행을 해야한다’(讀萬卷書 行萬里路)는 글을 남겼어요. 그림을 하려면 책을 많이 보고 많이 다녀야 한다는 가르침이죠.”
#. 먹으로 사유
그다음 전시는 뜻밖에 성사됐다. 전시 뒷풀이에서 우연히 만난 황순우 건축사사무소 바인 대표와 이애정 서담재 대표가 초대전을 제안한 것이다. 황 대표는 전시기획을 맡겠다고 적극 나섰다.
문인화 전시를 막 끝냈고, 관람객 반응이 기대 이상인데다 더 보여줄 작품도 남아서 ‘문인화 전시를 한번 더 하자’는 마음으로 승낙을 했다.
“그런데 미팅에서 만난 황 대표는 그동안의 작품 중 미발표작을 다 꺼내더군요. 규모도 100호, 200호에 이르는 대작 위주로요. 가벼운 승낙이 무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와의 대화’도 반드시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전시 콘셉트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작가와의 대화’ 제안에는 공감이 컸다.
해를 넘겨 2021년 4월 서담재 갤러리 초대전 ‘이뭣고’로 열 번째 개인전을 연다. 먹과 여백이라는 극히 단조로움으로 사유적 표현을 한 작품을 선보였다.
“먹에는 모든 색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색이 아닌 비색(非色)을 걸러내야 합니다. 또한 먹에는 한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가 검은색이지만 그 깊이와 공간이 끝없듯, 먹으로 이를 풀어가는 것과 같죠.”
이 전시는 최근 작품 속에서 작가 본인을 끄집어내는 작업과도 같았다고 평한다. 이 기간 코로나 확산세가 급격해지면서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 전시도 역시 먹 작업에 대한 사유였다. 이번엔 구월동 KMJ아트갤러리 초대전으로 갔다. 지난해 3월에 자리를 폈다. 타이틀로 붙인 ‘색이 아닌 색의 경지’는 바로 먹의 세계를 말한다.
“화선지에서 먹이 일률적으로 나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몰입할 때 화선지의 물성과 붓의 감각으로 투명하면서도 어두운 먹의 깊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아일체를 경험하는 순간이죠.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그 맛에 그림을 그리는 거죠.”
#. 절제의 미학
자연스럽게 시골살이 이야기를 꺼낸다. 3년전 제천의 한적한 시골에 농막을 지었다. 오롯이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인천 화실 수업을 한주에 이틀로 한정한 건 그곳 생활을 더 길게 가져가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온통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소품 작업을 할 때는 한호흡으로 그립니다. 흐트러짐 없이 고른 마음으로 흐름을 이어 그리는 거죠. 며칠전 새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루가 한호흡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고, 잠을 자기전까지 그 모든 일이 한호흡으로 가능했어요. 명상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작가는 사색이 깊어져가고 있다.
요즘에 몰두하고 있는 작품을 묻자 ‘달항아리’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먹을 가급적 절제하고, 동시에 그리는 행위도 절제하자는 접근입니다. 나만의 느낌으로 달항아리를 표현해보는 시도예요. 낙관조차도 흐리게 찍었죠.”
같은 방식으로 다기와 고양이도 그렸다. 석묵여금(惜墨如金), 즉 먹을 금쪽 같이 쓰라는 말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다.
인터뷰 마무리는 역시 동양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으로 맺는다. “선은 동양화의 핵심입니다. 선 하나 그을 때 잡념을 다 거둬내고 고른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1획이 만획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