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집결한 현장중심주의, 80년대 민중문화를 꽃피우다
[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11) 송성섭·우수홍 민중문화운동가 - 인천 민중문화운동의 길을 열다(상) - 김창수 문학평론가 대담·집필
대담 주제: 80년대 인천 민중문화운동과 부평풍물 축제
일시: 2023년 9월 8일: 19:00~21:00
장소: 인하대학교 5호관 5S432C호 연구실
참석: 송성섭(전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초대 의장, 현 풍물미학연구소장)
우수홍(전 인문연 노동자문화상담소장)
김창수(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 대담기획· 채록·집필
■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태동
80년대 인천문화의 특징은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 노동문예, 민중문화운동이 본격화하는 시기로 평가된다. 당시 민중문화운동의 지형을 살펴보면 70년대 말부터 민중문화운동의 씨앗들이 발아하고 있었다. 박우섭과 김봉준이 연극을 통해 인천 노동현장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현광일(연세대) 비롯한 통학생 문화활동가들은 탈춤을 통한 문화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또 풍물패 정성렬(서강대)의 활동도 신포동 YWCA, 인천간호전문학교의 탈춤 서클, 답동 가톨릭 회관에서 활동 기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박우섭과 김봉준은 1970년대 동일방직 사건이 터지면서 노동운동가들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거점으로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을 때, 연극을 통해 노동자들을 투쟁을 지원하고 외부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박우섭이 희곡을 쓰고, 김봉준이 무대 감독을 하면서 브레히트 서사극 형식의 연극 ‘무등산 타잔’을 이대 앞 소극장에서 이화여대 탈반과 더불어 공연한 바가 있었다.
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렸던 박흥숙은 1977년 4월 20일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기 위해 나온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네 명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삼 년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1980년 12월 24일 형 집행을 당한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극화한 것이다.
박우섭이 동일방직 사건에 관한 대본을 1978년 초에 썼지만 수배중이어서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김봉준이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협의하여 박우섭의 대본으로 공연을 추진하려 했으나 대본과 현실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노동자들과 함께 대본을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무대에 올렸다. 박우섭 원작의 대본을 김봉준과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공동창작으로 각색한 작품이 무대에 오른 것은 1978년 9월 25일 서울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였다. 극중 깡패역으로 등장한 김봉준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역할을 했다. 연극이 끝난 후 공연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 노동자 탄압에 반대하는 농성투쟁에 돌입했다고 한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면서 “유신독재 물러가라”는 주장의 구호가 나오자 경찰은 백골단을 투입하여 전원 동대문경찰서로 연행해갔다.
1979년경 인천에서는 서울로 통학하던 기차통학생 중 탈반 중심의 ‘인천지역문화운동모임’이 있었다. 현광일(연대)을 중심으로 임명구, 정성렬(서강대), 장석홍(중대), 박인옥 등 이화여대, 숙명여대, 덕성여대에 재학하던 학생 10여 명이 모여 봉산탈춤을 연습하거나 문화운동에 관한 세미나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치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된 이후, ‘인천지역문화운동모임’은 모임의 회원들은 다른 진로를 찾아 해산하였다.
70년대말 정성열의 활동도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2022년에 작고한 정성렬은 신포동 소재의 YWCA에서 김근태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칠때 정성렬은 민중문화에 대해 강의하면서 탈춤을 가르쳤다. 정성렬은 호인수 신부를 만나면서 1979년 부평성당에서 성신야학을, 그리고 1986년에는 주안5동 성당에서 한길야학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탈춤과 풍물을 지도했다. 정성렬은 1979년 인천간호전문대학 학생회장의 요청으로 써클 활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간호전문 학생들은 봉산탈춤, '금관의 예수' 등을 공연하였다고 한다. 이들 중의 일부는 이후 병원노조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밖에 동인천 답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의 풍물패 중심의 문화활동을 했다.이들은 나중 1986년 인천 5․3 항쟁 때에는 정성렬은 쇠를 치고, 조성연(서강대 79학번)이 북을 치기도 하였다.
김창수: 오늘 인터뷰는 80년대 인천문화예술사 가운데 민중문화운동과 관련하여 인천 문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 초기 활동, 그리고 남겨야 할 이야기 등에 관해 진행합니다.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송성섭 선생님, 인천민중문화운동에 참여한 배경과 계기 그때 초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특별이 기억나는 일이나 힘든 일이 있었다면 그것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서강대 ‘탈반’이 인천 문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
송성섭: 제가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한 계기는 1984년 1학기 때, 대학 4학년 1학기 때 이제 제적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 ‘탈반’(대학의 탈춤 동아리로 대표적인 운동권 서클)에서 활동하던 후배들이 전부 다 2학년만 되면 전방으로 끌려가 가지고 (군대 강제 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해서) 우리 대학(서강대)의 탈반 자체가 와해될 지경이 되었어요. 재학생은 다 끌려가고 복학생들이 주도하지 않으면 탈반 자체가 없어질 상황이어서, 이제 나하고 또 79학번 또 한 명이 탈반을 관리하고 있었고 또 내가 그때 이공대 ‘언더’(지하서클)의 책임자라고 알려져 있어 마포서경찰서에서 감시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제적을 당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제적된 김에 노동 현장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제적당하는 거에 대해서도 그렇게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죠.
제적을 당한 직후에는 기독교운동 활동가들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종로5가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해서 영등포산선으로 가게 돼요. 영등포산선에서 노동자들 탈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김보성을 만나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노동 현장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그래서 이제 현장에 들어가려고 영등포 산선에서 용접을 배우고 했습니다.
그당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약칭 ‘민문협’)에서 노동문화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민문협 사무국장이었던 김영철(서강대 77)은 노동운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화운동의 일부 세력이 현장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민문협의 핵심 멤버였던 문승현은 문화 운동하는 사람이 굳이 현장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문화운동은 문화운동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할과 영역을 가지고 노동운동과 연대하는 것이지 굳이 현장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쟁 과정에서 김영철이 사무국장에서 물러나게 되죠.
85년도에 김영철이 주도하는 현장 이전 팀과 만나고 있었는 데, 어느날 김영철, 장영덕, 김보성, 조봉호, 장근주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모여서 관악산에 문화운동 현장 이전을 위한 엠티를 갔는데 사고가 났죠. 새벽에 경찰이 우리 숙소를 급습한 거예요. 85년만해도 경찰의 학생 감시가 엄중한 시기였는데 우리가 남자들끼리 한 5~6명이 있는 거 보고 누군가 신고를 한 거야. 다행히 우리도 낌새를 알아채고 임기응변을 잘해서 안 털리고 형사들은 내려 간 다음 우리도 부랴부랴 길도 없는 산길을 내려온 적이 있어요. 그때 아마 제대로 털렸으면 정말 인천민중문화운동의 주력군이 일망타진됐을 텐데 운이 좋았던 거죠.
그래서 장영덕이 하고 나(송성섭), 조봉호, 김보성 세 명의 현장 이전 준비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대림자동차 건으로 잡혀가고 셋만 남아 청천동에 방을 얻어 가지고 현장 이전 준비를 하고 있었죠. 이때 소위 ‘까치파’라고 하는 노동현장 투신을 준비하던 문화활동가 그룹이 결정됐죠. ‘까치파’라는 이름은 당시에 유행했던 이현세 만화의 주인공이었던 까치를 주인공으로 삼아 노동현장의 문제를 다룬 선전지를 제작했고 이 선전지를 현장조가 공단에 배포했기 때문에 ‘까치파’라는 이름이 붙게 됐어요.
‘까치파’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어요. 하나는 현장조이고 하나는 외곽조인데, 외곽조는 당장 현장으로 들어가기 어렵거나 이전 준비 중에 있는 활동가들을 말합니다. 성효숙이나 양은희 같은... 장영덕, 김보성, 조봉호, 송성섭이 초기 멤버였으며 나중 장진영을 비롯한 미술패 두렁의 회원들, 그리고 노래패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인천에 집결하게 됩니다. 나중 까치파는 현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까치파들이 관리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수련회를 간 적이 있는데 100여 명 정도였으니 상당한 규모였지요. 한독금속 노조의 황재철도 까치파와 교류하며 활동하는 노동자였지요.
김창수: 문화중심주의는 서울에, 현장중심주의는 인천으로 집결한 셈이로군요.
송성섭: 그렇다고 볼 수 있네요. 문승현과 서울에서는 예술가의 전문성과 독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다면, 김영철은 그것을 넘어서서 예술가들도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문예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유사한 논쟁들은 다른 문화활동 현장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던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까 그러면 이제 까치파들은 주로 이제 현장으로 현장 중심주의 경향이 강한 이런 그룹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당시의 정치노선으로 보면 좀 더 노동자 계급주의 쪽의 경향이 더 강한 그룹이에요. 물론 그때까지 문화 운동에서 엔엘(NL:민족해방을 강조하는 사상적 경향)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죠. 까치파 이외에도 1980년대 중반 대학에서 활동하던 탈춤패, 노래패, 미술패 들이 속속 인천으로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노동현장을 강조하는 문화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까치파’라는 활동가 연대가 이뤄지죠. 이 조직이 나중 ‘우리문화사랑회’, ‘인천문화운동연합’ 등으로 발전해가는 거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김창수: 전업활동가로서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
송성섭: 87년경 그때는 다 그랬지만 나는 이미 결혼해서 큰애도 기르고 있었는데 살림은 벌이가 없으니 어려웠지요. 아파도 병원에도 제대로 갈 형편이 못됐으니까... 풍물치는 정성열이가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을 소개받아 치료받고 그랬지요.
인천에서 공개적인 조직은 ‘한광대’라는 풍물 중심의 문화운동 단체였어요. 이제 공개적 활동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주안5동에 호인수 신부님의 지원을 많이 받았죠. 주안5동성당에서 노동자 풍물패들 가르치고 또 성당에서 필요한 각종 문화 활동 이런 거 하고 그러고 있다가 호 신부님이, 용현동성당 김용훈 신부님이었지 아마, 그 신부님을 소개해 줘서 용현성당 지하에 엄청나게 좋은 연습실이 있어요. 그리 이동하게 되면서 한광대를 창단하게 됩니다. 87년 6월에 정성열이 주도하고 제가 가담하여 한광대가 결성됩니다. 한광대는 용현성당에서 풍물패를 많이 길러냈죠. 1회 강습생이 박창규, 박헌규 형제였죠.
근데 만들어졌지만 노조 결성식이나 노조 현판식 같은 문화행사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전에는 시민들이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습을 많이 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문화 활동도 시작하고 나는 노동운동과 관련된 각종 활동, 풍물 같은 경우에 강습도 나가고 그랬죠. 풍물 강습이 중심이었고 전통 혼례, 공연 기획도 해주었어요. 「광대세상」이라는 소식지도 발간했고, 한독금속, 남일금속, 부광교통, 성진운수 등 각종 노동조합 현판식 참여, 민주교육추진 인천지역 교사협의회와도 긴밀하게 교류했어요. 1988년 3월에는 경기교통 노동조합 전 조합장 김장수 영결식도 한광대와 같이 치뤘습니다.
‘우리문화사랑회’ 결성과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창립
김창수: 우리문화사랑회와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을 결성하는 과정을 말씀해 주시죠.
송성섭: 인천지역에서 인천민족민주운동연합(인민연) 논의가 시작될 때 88년 4월에 문화패 연합 조직인 ‘우리문화사랑회’(우문사)가 만들어졌죠. 우리문화사랑회는 호인수 신부님이 대표를 맡았고, 라원식(본명 양원모, 홍대 78학번)이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우문사는 놀이패 한광대, 노래패 산하, 일손나눔 등이 결합한 협의체적 성격의 단체였습니다.
우문사가 1988년 7월 17일 쑥골마루에 있는 우문사 사무실에서 인천지역 문화진흥 기금 마련을 위한 하루장터 및 주막거리를 열었는데(예술정보 제17호), 일일장터에서는 우리문화한마당 큰잔치(사물놀이, 노래, 비디오 공연)를 세 번인가 열었죠. 우문사 당시 발표한 문건으로는 ‘국민운동 인천본부의 향방과 관련한 우리의 입장’, ‘인노협 결성 및 구속 노동자 석방 촉구대회’그리고 ‘6월 26일 인노협 발대식에 관한 건’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우문사 결성 이후 활동가중 몇몇은 그런 수준(문화사랑)으로 문화운동을 할 수는 없다는 문제제기를 했고 이들의 주장대로 9월달에 인문연이 결성되는 데 그 과정에서 이번에는 우문사 사무국장 라원식이 반대하고 인천을 떠나는 사건도 있었죠. 그때 정성열도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이라는 조직을 부담스러워했음에도 나중 의장을 맡기도 했지만... 성열이는 운문사와 같은 조직 형태를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까 풍물패 한광대 활동을 하면서 좀 느슨하게 지역 연대 사업을 하는 수준을 구상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김창수: 우문사 시절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는 인노협 결성보고 및 구속노동자 석방촉구대회를 기획하고 주도한 일이죠? 인노협 결성보고는 1988년 6월 26일이었는데 문화분야에서는 10일전부터 준비에 들어가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소속 노조 문화부장 모임, 깃발이나 걸개그림과 같은 행사용품 제작 관련 역할 분담이 이뤄졌고, 풍물패는 12개 노조가 3일간 예행연습을 했더군요. 노래연습도 사업장별로 하고 종합 점검과 리허설도 두차례 이상 했을 정도니까 인노협 결성보고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우리문화사랑회 소속 문화활동가의 활약이 컸어요. 그런데 1주일 뒤인 7월 1일, 노조 문화부장들이 모여서 결성식 행사 평가회를 가졌더군요. 그것도 상당히 이례적이었는데 7월 4일에는 인노협 집행부에서 대회에 대한 평가서가 공식 보고되었습니다. 8월 2일에는 문화운동단체인 우리문화사랑회의 인노협 결성보고 평가가 제출되었고요.
라원식은 우문사 사무국장이었지만 인문연으로 조직 강화에 반대하면서 탈퇴한 것이로군요. 그런데 정성열의 탈퇴에는 어떤 사정이 있었나요?
송성섭: 인문연은 노동운동을 지원하거나 조합내부에서 문예 활동을 조직적으로 펼쳐 나가야 하는데 성열이는 그런 의식적인 준비나 조직적 훈련은 되어 있지 않았지. 오히려 조직생활 자체가 기질적으로도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연 초대의장을 했지만 조직이 이렇게 굴러갈지는 예상하지 못한 거지요. 그러나 보니 계속 논의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고 조직에 대한 회의로 나타나고 결국 의장이 탈퇴하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김창수: 정성열이 세상을 떠나서 이제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는데 3년전인가 인천에 와서 만나자고 해서 저녁 내내 여러 가지 이야기할 기회에 있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를 형이라 부르면서 솔직한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정성열은 풍물 그 자체로 완성을 지향하는 예인에 가깝다고 봐요. 기예 자체로 최고에 도달하지 않으면 예술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대목이 80년대 문화운동에 대한 비판이었고 특히 자신의 ‘쇠’(꽹과리)나 춤 등 기예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그는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아마추어적 조직활동에다 가두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또 풍물이나 탈춤, 연극, 노래 그 자체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노동현장이나 정치활동 중심의 문예운동과는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었겠어요. 문승현-김영철 논쟁이 인천에서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실은 곳곳에서 이런 갈등이 있었죠.
송성섭: 정성열은 인문연이 발족되면서 노동문화상담소나 산하조직들이 노조 지원중심으로 흘러가고 그런데 막상 현장으로 투입되어지고, 정치적 토론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니까 자기 생각하고 또 다르다라고 하는 그런 그런 일 때문에, 계속 논의 과정에서 삐걱거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 친구는 이제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탈퇴하게 되는 거죠.
하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