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대중과 예술조직의 만남, 문화패를 낳다
[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11) 송성섭·우수홍 민중문화운동가 - 인천 민중문화운동의 길을 열다(하) - 김창수 문학평론가 대담·집필
■개관: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의 조직과 활동
1987년은 6월항쟁과 함께 각종 민주화 운동이 봇물 터지듯 분출한 시기였다. 노동자 대투쟁도 벌어진 해였다. 이때 제조업을 비롯하여 버스, 택시, 병원 등을 망라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는데, 1988년에는 300여 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3월 27일 22개 노조가 참여하여 인노협 준비위를 발족하게 되었고, 신규 노조의 건설을 지원하며, 노조간의 활발한 연대 활동을 통해 임금인상 투쟁을 승리로 장식한 후 6월 18일 정식으로 인노협이 27개 노동조합이 가입하고 42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여 출범했다. 또한 1988년 9월 11일에는 인천지역 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인민연’)이 창립되어 지역민주화운동의 연대기구가 만들어졌다.
인노협과 인민연의 결성은 즉각 지역 문화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각종 문화패들은 1988년 7월 4일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1988년 9월 11일에 창립한 ‘인민연’에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의 이름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준비위원회는 10월 15일 부평신용협동조합 5층에서 놀이패 한두레가 민주노조지원기금마련을 위해 ‘우리공장 이야기’를 공연할 때 후원하기도 하였다(예술정보 제22호).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준비위원회는 산하에 3개 소위(강령‧규약 소위, 조직‧교육 소위, 대외사업소위)를 구성하여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10월 17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인문연은 「인천문화」창간호에서 향후 과제와 활동 방향을 ① 올바른 정치적 지도노선의 확립, ② 강고한 문화운동조직의 건설, ③ 지역대중과의 긴밀한 결합으로 제시한 바 있다.
▮대담
김창수: 인문연 산하 조직이 여럿 있었죠? 민족예술연구회, 노래패, 미술패, 일손나눔도 있었고요.
송성섭: 우선 ‘민족예술연구회’가 인문연 차원의 공연활동을 했어요. 기억을 되살려 보면 1988년 11월 26일, 인천대 체육관에서 ‘너흰 우리 막을 수 없어’라는 창립기념공연(예술정보 제26호)을 했고, 이듬해 1989년 창립 1주년 기념 놀이패 ‘한두레’ 초청 공연인 <노동굿 일터의 함성>을 무대에 올렸어요. 1990년에는 영화 ‘파업전야’ 인천대 상영, 1991년 초청공연 풍물굿 <1991,연대>, 102주년 세계노동절기념 노래공연 <바리케이트> 초청 공연 그리고 1992년 노래분과 산하와 풍물분과 한광대 그리고 풍물패 한누리가 연합하여 공연한 <우리 전진이다> 등이 있었습니다.
인문연 자체 공연으로는 1988년 창립 기념공연인 ‘너흰 우리 막을 수 없어’, 그리고 1992년에 공연한 <우리 전진이다>인데, <우리 전진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의 전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인문연의 예술적 활동 방향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인문연은 창립 이후의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의 전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내부에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논쟁의 주요 내용은 ‘진정한 예술가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탄생하는가’라는 문제이기도 했죠. 즉 진보적 민주주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가에게 노동대중과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예술적 영감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역량을 연마해야 하는가?’라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 그 당시에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 전진이다>와 같은 공연 작품이 그 당시 우리 고민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연 노래패 ‘산하’와 미술패 ‘갯꽃’
김창수: 당시 민중문학 논쟁에서도 핵심은 리얼리즘이었는데 지역 문화운동 단체인 인문연에서도 그 고민을 하고 있었군요. 노래패 활동은 어땠나요?
송성섭: 인문연 노래패는 ‘산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노래분과 산하는 총 3집의 노래 테이프를 발표하였습니다. 제1집 ‘너를 부르마’는 1988년 1월에 제작되었고, 제2집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1989년 1월에 제작되었는데, 노래분과 회원들이 230여 일 동안 장기적으로 폐업하고 있었던 세창물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테이프였습니다. 이 노래 테이프에서는 세창물산 노동자들과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아빠가 농성하면>이라는 곡과 <도깨비 빤스>, <단결로 뭉친 동지>, <노동자 청춘> 등의 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노래분과 산하의 창작곡 <너흰 우릴 막을 수 없어>라는 곡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3집 ‘우리, 역사의 새 주인’은 1990년 1월에 제작되었는데, <머리띠를 묶으며> 등의 창작곡이 다수 포함되어 있죠. 노래분과 산하가 발표한 노래 테이프에 수록된 곡들 중에서 민중미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곡도 있었어요. “도깨비 빤스는 튼튼하지요, 질기고도 튼튼하지요”로 시작하는 「도깨비 빤스」와 같은 곡 말입니다.
이와 같은 노래는 파업 중인 농성장에서 따분한 분위기를 바꾸는 의미에서 어쩌다 한 번 불러볼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노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예술적 형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러한 노래야말로 대중추수주의를 대표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산하는 88년 11.14 「노래패 산하」라는 기관지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창수: 미술패 갯꽃의 활동도 소개해 주시지요. 집회용 걸개 그림이나 벽화 작업을 많이 했지요?
송성섭: 미술분과 갯꽃은 인노협 깃발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각종 노보에 그림을 그려주거나, 집회용 대형 걸개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업은 한독금속 공장의 벽화제작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미술집단 ‘가는패’와 인문연 미술패 ‘갯꽃’그리고 한독금속노조원들이 공동작업으로 1988년 9월부터 한 달 걸려서 완성한 벽화였습니다. 당시 노동자들과 함께 걸개 그림이나 판화를 제작한 적은 있으나, 공장벽에 벽화를 그린 것은 한독금속이 최초라고 봐요. 특히 회사측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벽화를 제작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벽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 식당에서 2회에 걸쳐 판화와 ‘일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그림 걸개 그림이나 사진 등을 전시하였고, 전시회 이후 벽화의 찬성여부와 그림의 내용, 노조원들의 참여 형식 등을 묻는 설문지를 작성하여 조합원들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이 그림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사를 다시 수렴하여 반영하여 수정하고 보완하여 외벽에 최종 밑그림인 먹선을 그렸다고 합니다.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단시간에 해낸 것은 그만큼 공장벽화에 대한 조합원들의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죠. 먹선으로 그림의 윤곽을 완성한 후 채색에 들어갔는데, 노조원들이 점심 시간을 이용하거나 작업이 끝난 오후 시간에 참여하여 불과 3일 동안에 끝냈습니다.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자 방관하던 관리자들이 작업을 만류하기 시작하였고, ‘건물소유관리법’을 들먹이며 벽화작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합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관리자들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을 이용하거나 여러 명이 함께 채색하는 방법을 통해 그림을 완성해 나갔고, 벽화가 완성되자 함께 작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은 물론 처음에 반대한 노조원들까지 자신들의 모습이 이렇게 벽화로 완성된 데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 사진을 찍는다든가 다른 조합에 자랑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동자문화상담소의 활동
김창수: ‘노동자문화상담소’는 ‘일손나눔’과 부평 ‘우리마당’이 모여 결성한 문화패들의 노동운동지원기구이죠? 해당 자료를 보니 ‘일손나눔’에서는 장영덕(서울대), 황의돈(서강대) 우수홍, 남태우, 박승현, 고경엽, 김기성(이상 고려대), 진영희, 고혜정(이상 이화여대), 조영신(성균관대) 등이 참여하였으며, ‘우리마당’에서는 신재걸, 이진구, 전미숙(이상 서강대), 박선아(홍대) 등 확인된 활동가가 14명 이상 참여하였더군요. 노동상담소로는 상당히 큰 조직이었어요. 아마 문화 분야별 지원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한 최대한 참여한 것 같아요. 당시 인문연 활동가들의 현장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죠?
노동자문화상담소는 인문연 소식지를 통하여 노동자문화활동의 과제와 전망을 제시하고 있더군요. 1987년 7,8월 대파업을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임투는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적 기반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으며, 인천지역 노동조합협의회라는 연대조직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개괄하고 있습니다.
김창수: 노동자문화상담소는 우수홍 선생이 소장을 맡아 활동하셨죠? 노동조합에 대해 어떤 지원사업을 하셨나요?
우수홍: 노조의 문화활동으로는 야유회, 등산대회, 대중문화집회 등에서 각종 문화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경험이 없으니 상담이 많았어요. 시․소설․수필 등 노동자의 글짓기, 놀이강습, 좋은 노래모임, 풍물배우기, 등산반 등과 같은 생활문화 활동도 지원요청이 있었습니다. 특히 임투를 앞두고 각 노조에서는 야유회, 등산대회 꾸리기에 대한 지원요청이 쇄도했어요. 그리고 놀이나 풍물 그리고 노래 배우기에 관한 상담과 교육자를 파견해 줄 것을 상담소에 요청해왔어요.
김창수: 임투가 임박했던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에는 인노협과 인천지역 민주노조건설공동실천위원회에서는 파업농성을 위한 교육을 각 노조를 대상으로 실시한 바가 있었는데, 노문위에서는 파업농성시 문화프로그램의 필요성과 각각의 문화프로그램의 사용 방법 등, 파업농성 때 필요한 제반 내용을 교육하였더군요.
우수홍: 88년 임투가 진행되면서 각 노조 문화부는 노동자문화단체와 협조하여 소식지 만들기, 풍물놀이, 장기 자랑대회, 촌극 발표회, 대중연설, 편지쓰기, 대자보 만들기, 불놀이, 족구대회, 노래가사 바꿔부르기, 노래함께 부르기, 놀이강습, 노동자 교육단체에서 비디오 공연,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을 하였고, 전문예술단체에서는 연극공연, 풍물공연, 밴드 동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등장했습니다.
당시 88년 임투 당시 노동조합으로부터 파업 농성시 문화활동에 대한 상담 요청이 감당해 내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문화단체로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할만한 경험도 많지 않고 파업농성의 사업장은 계속 늘어나 상담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요.
김창수: 노문위의 활동은 인노협 문화부장 및 문화패(풍물패,노래패,율동패) 모임과 관련된 활동 및 대공장 풍물패, 대공장 노래패와 관련된 활동 등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송형이 대공장풍물패협의회 활동을 정리해주시지요?
송성섭: 대공장풍물패협의회(이하‘대풍협’)는 1989년 8월 15일 인천시민 큰잔치를 통해서 태동한 ‘대공장 풍물패 대표회의’는 을왕리 해수욕장에서의 야유회, 그리고 9차에 걸치는 대표회의, 그리고 인천대와 신광기업에서의 풍물패의 밤 행사를 위한 공동 연습과 9월 29일에 신광기업에서 열린 ‘풍물패의 밤’ 참가, 10월 29일에 인천대에서 열린 ‘노동자 문화대잔치’에 참여한 후, 12월 25일 100여 명의 풍물패 전원이 인문연 부평지부에서 모여 ‘대공장 풍물패 송년의 밤’행사를 하면서 ‘대풍협’ 준비위를 발족시켰습니다.이듬해인 1990년 2월 11일 인천대학교 대강당에서 대우자동차 ‘아ᄅᆞᆷ' 풍물패, 대우전자(주안) ‘한울’ 풍물패, 대우전자(인천)‘풍물사랑회’ 풍물패, 대우중공업 ‘이심이’ 풍물패, 삼익악기 ‘땅울림’ 풍물패, 영창악기 ‘노울림’ 풍물패, 인천제철 ‘쇠돌이’ 풍물패, 인천조선 ‘지킴이’ 풍물패, 진도 ‘진풍’ 풍물패, 한독시계 ‘누렁소’ 풍물패가 모여 대공장풍물패협의회 준비위원회 제1차 정기연습을 했습니다.
이 제1차정기연습때 1990년 상반기에 ‘대풍협’ 창립을 계획하기로 하였고, 상반기의 가장 큰 과제인 ‘임투’와 ‘창립’을 대중투쟁으로 결집시키는 일을 가장 큰 과제로 설정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풍물패의 조직강화가 공장내 민주역량 강화로 모아질 수 있도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대풍협의 활동이 단위사업장에서의 민주역량 강화를 이루어나가면서 대풍협이 창립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대표회의는 첫째 민주역량의 강화, 둘째 노동자 문화의 확립, 셋째 연대의 단초 마련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활동했습니다.
김창수: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풍물에 관해 쓴 글은 신문에서 간간히 읽고 있습니다만.
송성섭: 2005년 인천민예총 활동을 잠시 접고 서울에 있는 한국문화정책연구소에서 전문위원으로 있게 되었는데, 그때 문화관광부와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문화예술교육 등의 정책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생긴 각종 의문점을 철학 서적을 통해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를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래서 이제 철학과를 들어가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학원에서 10년 정도 공부를 한 다음에 두 권의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풍물이 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탈춤의 미학입니다. 다행히 상지대에서 시간강사로 '음악으로 본 한국인'을 강의하면서 풍물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인천일보에 '풍물의 미학'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 연말에 연재를 마치고 내년에 책을 낼 예정입니다. 그리고 2022년에 풍물미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있고,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풍물의 미학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고려대 농악대장에서 인문연 노동자문화상담소장으로
- 문화기획자 우수홍
김창수: 이번엔 우수홍 선생님이 인천문화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회고해주시지요.
우수홍: 저는 고려대 농악대 출신입니다. 학내 언더써클 활동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써클은 대중적 활동을 할 수 없잖아요. 대중운동이 가능한 데로 눈을 돌렸는데 옛날에 고려대와 연세대가 하는 고연전에서 응원단 경쟁도 볼만하죠. 고려대 응원단의 핵심은 풍물 농악대입니다. 학교의 지원을 받아서 활성화된 동아리입니다. 학교의 전폭적 지원 덕분에 학번당 거의 2~300명씩 농악대에 가입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나는 농악대에 들어가서 농악대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 운동권 풍물패로 개조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김창수: 학교 응원단 농악대 개조하는 엄청난 일을 맡았군요. 언제였습니까?
우수홍: 제가 2학년 때, 그러니까 2학년 말에 농악대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농악대 회장이 된 다음에 3학년 때 고려대 농악대가 중심이 되어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대동놀이’를 시작했으니 1년만에 농악대 개조에 성공한 셈입니다. 그게 전국에서 최초의 대동놀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온순한’ 학교 문화행사가 대동놀이로 기획되면서 학생데모가 되어 버린거죠. 당연히 학교가 뒤집어졌지요. 학교로서는 해마다 수천만원씩 농악대에 지원했는데 반정부 시위대가 되었으니까...... 결국 주동자 몇 명은 구속되고 수십명은 강제징집되거나 제적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어요. 그 무렵 문화운동가인 박인배, 정희섭 같은 선배를 만나 가깝게 지내고 있었는데, 나중 유인열 선배를 만났는데 이 선배가 나한테 관심이 많았지요. 일을 열심히 한다고 본 거죠. 나중엔 아예 관리수준으로 하하... 당시 고려대 운동권들은 주로 구로나 인천 쪽으로 많이 이전했는데 나는 고향이 인천이니까 인천으로 오게 되는데 유인열 선배와도 꾸준이 연계를 맺어왔습니다.
김창수: 인천에 와서 어떤 사업에 착수하셨나요?
우수홍: 노동자문화상담소 '일손나눔' 이었습니다. 일손나눔은 본래 민주노조공동건설을 위한 실천위원회 소속이예요. 그러다보니깐 공실위하고 거의 다 일을 같이 한거죠. 인노협이 성립되기 전에는 공실위, 인노협이 되고나서도 공실위하고 일을 해나가는 데, 매년 3월달이 되면 임투를 위한 교육사업을 합니다. 올해의 임금, 이목희 선배가 절대적인 명강사로 화려하게 날렸던 분이시고, 일손나눔은 임금투쟁에 있어서 문화교실을 전체 임투교실에서 파업할 경우와 소모임 꾸리는 과정, 문화모임을 꾸리는 방법, 임투를 하게되면 파업이 되고 투쟁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할 것 인가 이런 고민들을 중심적으로 일상적으로 해왔지요. 인노협 문화부장을 인문연에서 파견을 했어요. 신재걸씨가 파견을 했어요. 우리가 계획을 갖고 신재걸씨가 각종 문화부장들과 임투 전에 그런 교육을 중심으로 많이 한 것이죠. 마이크로전자 코스모스전자 남일금속 여러 부평지역에있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해서 구사대 폭력 대응 방법도 교육하고는데,일손나눔 출신의 진영신, 고혜경, 조영신, 고경업, 박승헌 등이 함께 활동했죠. 그때 조영신은 만담도 잘하고 율동과 노래 지도도 재미있게 해서 사업장마다 와 달라고 해서 인기가 많았죠
김창수: 본인이 참여한 문화운동의 성과를 평가해본다면
우수홍: ‘일손나눔’ 활동하면서 송성섭 형이나 나중 소설가가 된 정화진(황의돈)이도 같이 했지만,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가장 큰 성과는 전국 최초의 지역노조협의체인 인천노동조합협의회가 탄생하는 과정에서의 노조와 관련된 문화와 관련 사업을 전체 총괄 지도 방식으로 추진해서 성공적으로 완수한 거라고 봅니다.
김창수: 소설가 정화진의 당시 활동도 소개해주시지요?
우수홍: 정화진씨 노동자문화상담소 활동과 ‘일손나눔’도 같이한 동지였지요. 정화진씨는 상담활동을 하면서 기타도 잘 치고 입담이 좋아 이야기도 잘하고 해서 모임도 잘 이끌어가고 가서 상담소에서 가장 유능한 활동가였어요. 임금투쟁 속에서 파업을 하면 파업지도도 하고, 뿐만 아니라, 파업을 하게 되면 투쟁조가 있고, 휴식조가 있고 교대근무를 하면서 하는데 그때 노동자문화상담소에서는 소설 「쇳물처럼」을 읽을 거리로 나누어 줬습니다.
그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으니까 ‘가리방’(등사판)이라고 하잖아요, 노동자들에게 읽힌 「쇳물처럼」이 인천지역 노동조합에서는 아주 큰 인기있는 소설로, 상당히 회자됐던 소설이었습니다. 그때 또 파업시에는 작가와의 대화라는 형식보다는 저자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책을 읽은 감명이나 내용을 가지고 얘기도 하고...
김창수: ‘쇳물처럼’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여가시간에도 요긴하게 활용된 작품이로군요. 소설가 정화진(본명 황의돈, 서강대 영문과)은 언제부터 일손나눔에 결합했나요? 같이 영등포산선에서 이전해 온 건 아니죠?
우수홍: 그 과정은 송성섭 형이 더 잘 알죠?
송성섭: 예, 화진이는 본명이 황의돈인데, 같이 이전해온 것 아니고 나중에 결합했어요. 본래 다른 조직을 통해서 구로지역에 좀 있다가 인천에 오게 된 게 야학 라인입니다. 서강대 탈반 출신인 장근주의 야학 라인이었는데, 민문협 차원에서 활동을 했어요. 그때 정화진도 청천동에 살았었는데, 장근주씨도 청천동 살고,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일손나눔에 결합하게 되고 나중에는 인문연에 들어와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딱히 문학분과가 있어서 활동한 건 아니었는데, 정화진이가 노동자 소설쪽에서는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계속적으로 글을 쓰고 하면서 만나게 된 게 김한수였고, 우리나라 문화예술운동에서 소설쪽에서는 방현석도 인노협 간사를 하면서 나중에 「새벽출정」 같은 인천 노동소설을 쓰게 되지만 초기에 노동자 소설가로서는 정화진이 더 주목받았죠. 화진이는 그때 김한수와 함께 독자적인 문학 조직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도 꽤 한 것 같아요.
김창수: 인문연이 해체한 건 92년도였죠. 해산 전후 사정은 어땠습니까?
우수홍: 당시 한국노동당이 창당되면서 문화활동가 상당수가 그쪽으로 갔고, 또 일부는 조직사건에 연루되 가지고 검거되거나 도피하느라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그래도 인문연 활동에서 지역의 다양한 투쟁에 문화적으로 참여했던 성과들이 있는데 그 중 노동 문화제가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죠.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변했다 하더라도...
김창수: 부평풍물대축제는 부평두레농악을 계승하여 매년 개최되어온 부평과 인천의 대표적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구민들 90%이상이 이 축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구민 참여율도 50%이상에 달할 정도로 축제에 대한 인지도와 참여율이 매우 높아요. 2017년에 개최된 21회 부평풍물대축제에 70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조사된 결과가 있더군요.
부평풍물축제의 성공은 부평구의 지속적인 지원과 지역 문화예술인들, 구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뤄낸 결실이죠. 부평풍물축제의 중심행사인 부평두레놀이는 전통적으로 부평평야에서 모내기철에 행해지던 농악을 계승 발전시킨 인천시 무형문화재라는 점에서 지역 문화특성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고요. 두레놀이에는 부평구 22개동 500여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풍물공연으로 시민 생활문화 활동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수홍: 김박사님이 부평풍물축제의 태동이나 중요한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죠. 축제 평가위원도 하셨고요. 사실 부평풍물축제의 개최 장소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풍물축제는 부평구를 상징하는 부평대로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개최되어, 주민들의 접근성을 최대로 높이고 대로를 마음껏 활보해보는 해방감을 축제 참가자들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런게 축제 아닌가요? 또 부평풍물축제의 추진주체들이 전문적인 축제 평가 제도를 도입해서 프로그램의 수준을 높이고 추진방식을 꾸준히 개선시켜 왔습니다. 다른 축제에서 보기 드문 사례죠.
김창수: 그래도 부평풍물축제 원년 멤버의 입을 통해 풍물축제를 시작하게 되는 배경이나 과정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우수홍: 95년도였죠. 지방자치제가 실현되면서 부평에서는 최용규 구청장이 지역축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했는데, 마침 임종우 작가하고 내가 의견이 비슷해서 ‘풍물’로 축제를 하는데 합의하고 기획을 같이 해보기로 했습니다. 임남재 원장이나 허문명 원장 등 부평 지역 원로들의 의견도 긍정적이었어요. 그래서 기획단을 꾸리고 민예총에서는 송성섭, 예총에서는 서광일이 참여했고, 조성돈 박창규와 헌규 형제도 참여했죠. 부평풍물축제의 성공은 부평구의 지속적인 지원과 지역 문화예술인들, 구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뤄낸 결실이라고 봅니다.
부평풍물축제의 중심행사인 부평두레놀이는 전통적으로 부평평야에서 모내기철에 행해지던 농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인데 인천시 무형문화재이기도 하고요. 지역 문화특성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두레놀이에는 부평구 22개동 500여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풍물 공연으로 시민 생활문화 활동의 표본이 될만합니다.
김창수: 마지막으로 근황과 앞으로 계획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우수홍: 저는 경인일보에서 퇴직한 이후 지금은 이제 시민단체 ‘부평광장’의 기획위원으로서 새로운 형태로 작동되는 시민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부평 사회의 담론이나 의제에 대해 개방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인데 현재로서는 호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안별로 이견도 적지 않아 시끄럽기도 하지만 민주주의가 갑론을박하면서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현재 부평에서는 조병창이 반환되고 제3보급단 부지가 반환되는 커다란 이슈가 있고 여기에 주민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모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어요. 그 문제는 사실 부평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천의 문제이기도 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