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역에서 하차해서 도보로 걸어가도 만석동 길은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만석동도 골목길의 옛 정취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도시개발, 아파트촌의 점령에 밀려가며 낙후되온 전형적인 구도심 만석동. 그러나 옛 인천 사람들은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 추억의 옛 골목길, 만석동을 찾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노동운동이 시작되었던 동일방직을 시작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가파르고 좁은 길을 수없이 지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오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부모님께 편한 삶을 드리려고 악착같이 살아낸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그 뭉클함과 절절함들이 이 길 위에 스며있다.
신일철공소 터와 만석우체국을 지났다. 그리고 나타나는 만석포구. 인공적인 모습보다 자연스러운 포구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은 추억을 새롭게 곱씹어볼 수 있기에 충분했다.
땅보다 갯벌이 많았던 바닷가였던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지역이다. 바닷가에 고양이 섬이라는 작은 섬 때문에 생긴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문학작품도 이 동네를 배경으로 작가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작품을 집필했다. 단편소설 남생이 길(소설 속의 주인공 노마의 부모가 부두로 일하러 다녔던 길)과 ‘나의아저씨’ 촬영 무대도 이 동네 주택지를 무대로 삼았고, 조세일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도 이곳을 무대로 하였고 전해진다.
인천 삼대 험지로 불리던 동네가 있었다. 숭의동 109번지, 송림4동8번지 그리고 만석동 43번지(어촌로 13번길). 만석동 43번지는 하역부두 노동자들의 마을이다. 언덕 위는 주로 조선인 노동자가 거주했다. 언덕 아래로 일본인 노동자가 거주했던 시바우라는 사택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만석동, 북성동, 송월동을 가르는 세 경계길로도 불리운다.
가파르게 오르내렸던 골목의 삶이, 참 녹녹지 않았을... 그 기억들이 지금은 그리움으로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떠났던 이들이 그리움에 다시 돌아오는 마을이 되었다.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나던 이곳이 또 다시 그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