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업은행이 된 대한천일은행, 일제의 미끼 미두취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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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이 된 대한천일은행, 일제의 미끼 미두취인소
  • 김광성
  • 승인 2024.05.31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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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9) 1930년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인천미두취인소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그림 좌측)과 인천미두취인소(우측)

 

‘하늘 아래 첫째 은행’으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라 하였다.

1899년, 대한제국의 황실과 상인이 연합하여 설립한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의 상호.

하지만

경술국치 이듬해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된다.

식민지가 된 한국 내에서 ‘대한’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규제했던

조선총독부 은행령 공포.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세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맞불을 놓았지만

이미 국권은 기울고 말았다.

빠르게 잠식되는 경제침탈을 막고

조선 상인들의 자금 융통 증가를 위해

고종황제의 주머니 돈(내탕금)까지 내어 민족정통은행을 세웠지만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우리나라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강력한 정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황실은행으로 인정된 천일은행에 대한 조처는

황실의 채권, 채무를 정산하게 하는 것.

대한제국의 자본을 희석화 하고 황실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

일제의 경제 침탈을 방어하고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설립 취지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20년에 신축한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고 말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천미두취인소
인천미두취인소

 

인천 개항 이후 제물포에는 일확천금을 노린 조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팔도를 투기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투기 바람의 진원지는

바로 인천미두취인소였다.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했던 미두취인소가 설립된 것은 1896년의 일이었다.

설립 목적은 쌀값 안정과 공정한 시세,

그리고 품질표준을 만들자는 순기능의 취지로

공개시장에서 쌀이나 농산물 가격을 결정하겠다는 것.

하지만

공인된 도박장에 가까운 거대한 투기장이 되어버린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시장 미두취인소의 특성.

현물없이 쌀을 사고 파는 거래,

100석 값의 10%만 지불하고 석달이 지나서 쌀값이 오르면

시세 차익을 챙기는 구조였으니

사람들은 선뜻 빨려들었다.

1920년대 들어 벼락부자가 된 한 남자의 인생역전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단 일 년 만에 미두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는 반복창의 소문이 퍼지자

경향각지에서 돈 보따리를 든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미두취인소로 몰리면서

인천은 돈과 사람들로 넘쳐났다.

‘화투는 백석지기 노름이요, 미두는 만석지기 노름’이라며

통 큰 투기를 서슴치 않았다.

돈 놓고 돈 먹기 판에서 모두 인생 한 방을 노렸다.

그러나

떼돈을 벌어보겠다던 탐욕이 부른 대가는 혹독했다.

알거지가 되어 스스로 목을 매거나

바다에 투신을 하고

가문의 땅을 몰래 팔았다가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어떤 자는 친모를 해하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아편처럼 조선 개미를 병들게 한 투기 중독,

그 위험천만한 곳이 애초에 일본이 던진 미끼였다는 것을

조선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돈 잃고 청춘 잃고 목숨까지 잃었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가 일순간 몰락해 빈털터리가 되어

쓸쓸히 죽어간 반복창.

그가 죽고 미두 시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인천 미두판의 황금몽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구름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용동 권번의 쇠락한 풍경 속에는 흥청망청 흩어진 일확천금의 꿈과

한탄이 남아 있는 듯 하다.

인천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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