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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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는데... "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4.06.0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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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민족학교' 1강 강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가 주최하는 ‘민족학교’ 5강 중 첫 번째 강의가 5일 오후 7시 주안영상미디어센터 강의실에서 열렸다.

첫 강의는 ‘이승만은 국부인가 독재자인가’를 주제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강연했다.

이 전 관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면직결의를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사실상 탄핵됨으로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고 전제했다. 또 '극우보수 세력'이 건국절을 밀어붙이는 이유에 대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세탁하기 위함’으로 요약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원인으로 친일청산 반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 연이은 실정, 1인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 및 민주주의 유린으로 정리했다. 특히 친일청산을 반대하고 오히려 친일세력을 중용함으로 민족정기와 역사정의를 훼손했다며 ‘건국’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를 6개 항으로 나눠 설명했다. ▲친일파 비호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을 버리고 도주 ▲1인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으로 민주주의 파괴 ▲개인우상화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적탄압과 불법선거다. 6개항으로 설명한 내용의 대표적인 사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친일파 비호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6일 노덕술 등 친일경찰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9일 외신기자회견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반민법이 해제되고 특위 초기 재판을 받았던 일부 친일파의 처벌도 무효화되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받고 독립한 나라 가운데, 단 한명의 민족 반역자를 사법처리 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친일파는 일제가 사라진 공간에 더 강력한 한국사회의 주류,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독립군, 한국광복군 출신이 일부 참여한 군 수뇌는 곧 일본군 출신이 주도권을 잡았으며, 독립운동가가 다수를 차지한 1948년 초대 내각도 1960년에 이르면 대부분 친일세력이 차지했다.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의 외손으로 조선은행 오사카서구출장소 지배인 출신이 상공부장관이 됐다.

 

-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 시기부터 한국전쟁 과정에 이르기까지 군경, 극우테러단체에 의해 1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명령 제1호 형식으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는데, 1심만으로 증거설명을 생략한 상태에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특별조치령과는 무관하게 재판도 없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 더 심각하다.

 

피카소-한국에서의 학살(1951). 이준식 전 관장은 당시 한국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세계적인 이슈였다고 했다.

 

-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을 버리고 도주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오전 4시 서울을 탈출하고도 이날 정오 공보처는 “정부는 중앙청에서 집무중”이라고 허위보도자료를 냈다. 27일 밤에는 대전에서 녹음방송을 내보냈는데, 국군이 반격한다며 모든 국민은 전시노력을 기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라고 했다. 28일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고 7월 1일에는 부산까지 도주했다.

 

- 1인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 민주주의 파괴

1952년 국회해산을 강행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 12명을 구속했으며, 군경 포위하에 기립표결했다. 1954년에는 민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압승했고 이어 대통령 연임 제한 예외를 인정하는 개헌안을 사사오입으로 가결시켰다.

 

- 개인우상화

일제강점기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높이 25m, 대지 3,000평, 좌대 270평에 이르렀다. 이외 대통령 찬가, 신문, 화폐, 우표, 생일축하행사 등을 통해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적탄압과 불법선거

1948년 5.10 총선때 이승만은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 출신으로 친일청산 활동을 벌인 최능진을 후보등록 취소시키고 당선되었다. 최능진은 정부수립 직후 쿠테타 음모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한국전쟁 후, 서울에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인 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장면 부통령은 저격당했다. 4월혁명 후 진상조사에서 이기붕, 임흥순이 배후자로 지목되고,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의 내무장관 이익홍이 일본군 하사관(1940~45)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특채한 치안국장 김종원에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봉암은 1958년 사법살인을 당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는 지금까지의 각종 불법·부정선거의 종합판이었다. 4월 혁명 이후 사형당한 당시 최인규 내무장관이 선거를 앞두고 지시한 부정선거의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대리투표다. ‘전체 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 개시시간인 오전 7시 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지시는 그대로 이행됐다. 3월 15일 밤 야당세가 강한 대구의 한 개표구 중간집계 결과 부통령에 이기붕 5천표, 장면 32표가 나온 보고를 받고 이승만은 80% 내외로, 이기붕은 70% 내외로 조정해 개표 결과를 발표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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