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민 / 경인여대 영상방송학과 교수. 시인, 평론가, 예술감독
코믹하게 그려진 ‘여자 인생 적응기’가 최근 폭염 속 극장가를 시원하게 날아오르고 있다. 영화 <파일럿>. 지난 7월 31일 개봉해서 8월 14일 현재 321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타고난 끼와 순발력에 캐릭터 소화력이 뛰어난 조정석 배우 원탑 주연의 영화 <파일럿>. 그만큼 조정석 의존도가 크다. 여장남자 조정석의 온몸으로 펼치는 ‘여자 인생 적응기’ <파일럿>에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프다”는 의미의 신조어) 스토리텔링에 약간은 가벼운 ‘페미니즘’이 녹여져 있다. 그만큼 호불호가 크게 갈리고 있지만, 어쨌든 폭염 속에 상큼한 코믹 이륙을 선사하고 있다.
<파일럿>의 좌충우돌 여장남자 스토리텔링
도심 한복판에서 ‘여장남자’가 도망치고, 수십 명의 기자들이 그를 추격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오프닝의 이 장면은 관객의 호기심 유발과 함께 예의 수미상관 구성의 영화임을 한눈에 알아차리게 한다.)
특별출연의 유재석과 조세호 진행의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준수한 외모와 인정받는 항공 운항 실력으로 유명한 스타 기장인 한정우(조정석) 한국항공 기장이 출연한다. 이착륙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최고의 항공 운항 실력을 가진 그는 항공 현장의 얘기와 함께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 파일럿을 꿈꾸며 파일럿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지금까지 올라온 사연도 공개한다.
스타 기장으로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그는 회사의 단체 회식에서 급기야 사달에 휩싸이게 된다. 잔뜩 술에 취해서 여성 승무원들의 외모에 대해 성추행성 비하 발언을 일삼는 상사의 추태를 수습하려다 엉겁결에 자신도 성추행성 언행을 하게 된다. 이 상황이 모두 녹음된 파일이 성추행 파문과 함께 퍼지면서, 정우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해고에 이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항공사 일자리를 찾으려 해도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번번이 거부를 당하고, 심지어 아내까지 이혼을 요구하여 결국 집에서 쫓겨나 본가로 들어가게 된다.
졸지에 이혼을 당하고 취업도 할 수 없게 된 정우. 결국 그는 뷰티 방송 유튜버인 여동생 정미(한정화)의 도움 아래 화장, 제모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여장남자 한정미’가 되어 여성 우대 정책을 펴는 ‘한에어’의 부기장으로 간신히 취업하게 된다. 여기서도 회식자리에서 소신 발언으로 위기에 놓인 여자 부기장 윤슬기(이주명)을 돕게 되면서 슬기와 친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멘탈이 붕괴된 기장의 조종대를 빼앗아 예의 항공 솜씨를 발휘해 비행기를 비상 착륙시켜 모든 승객을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에 부기장 ‘한정미’는 승객들을 구한 영웅으로 대서특필되며 기장으로 특진함과 동시에 단숨에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파일럿이 되어 수많은 화보와 광고를 찍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 와중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슬기와 한에어의 노문영(서재희) 이사. 머리가 복잡해진 정우는 “돈 좀 못 벌어도 쪽팔리게 살지는 말라!”는 엄마의 일깨움에 힘입어, 한에어-한국항공 통합 사업설명회 자리에서 여장한 자신의 정체를 솔직히 공개해 버리고, 과거 자신의 발언으로 피해를 입은 슬기를 포함한 한국항공 여승무원들에게 사과한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여기서 오프닝에 나왔던 기자들과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이 모든 것은 전국에 생중계되고, 정우의 가족들과 슬기 역시 이를 전부 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한에어는 가짜 한정미를 모델로 한 광고 및 화보 회사들에게 수많은 위약금과 손해배상금을 물어주게 되고, 정우 역시 신분을 위조한 혐의로 항공사 파일럿 자격을 박탈당하며 더 이상 국내 항공사에는 취업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정우는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전용기 조종사가 되고, 자신이 조종할 전용기를 시범 운전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여장남자 영화로서의 <파일럿>과 <미세스 다웃파이어>
아무리 코믹 영화라 하더라도, 영화에서 서사를 담당하는 드라마 파트와 재미를 책임지는 코미디 파트가 적당히 잘 버무려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파일럿>에선 이런 분배와 합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해 코미디가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드라마 장면이 나와 버려, 전체 구성과 스토리텔링이 매끄럽지 못하고 관객마저 당황할 수 있다. 또한 후반부에 가족애와 자기 정체성 메시지에 주목하기 위해 영화의 전개를 급하게 틀고 마무리하다 보니, 애써 유지해 온 재미 코드도 깨지고 목적으로 한 감동 포인트마저 반감시키고 말았다.
이 영화의 유머 코드가 여장남자를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기에, 일각에서는 즐겁게 웃고 나왔다는 반면 일각에서는 별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는 등 관객 시각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여장남자의 분장과 연기 역시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 이에 대해선 오마주 장면으로 처리한 여장남장 영화의 레전드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참고할 만하다. 주인공 역의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는 단연 최고였다.
그래도 코믹 연기와 트랜스젠더 연기로(조정석은 뮤지컬 <헤드윅에>서 성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남성인 헤드윅 역을 호연한 바 있다) 다져진 조정석의 캐릭터 소화 능력과 열연은 그나마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야말로 <파일럿>은 ‘조정석에 의한 조정석을 위한 조정석의 영화’라 칭할 만하다.
페미니즘과 젠더 문제에 대한 신선한 시도
<파일럿>은 한국 상업영화계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페미니즘과 젠더의 문제를 ‘용기 있게’ 들고 나왔다.
시대착오적 성 관념을 가지고 여성들에게 껄떡대지만 능력은 없는 인물로 주로 묘사되는 기성세대 남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역차별적 여성 할당제를 실시하고 페미니즘 마케팅을 꾸미는 여성 이사의 도를 넘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런 메시지 전달을 위한 서사 구조와 연출이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좌충우돌 여장남성 코미디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개해 본 시도는 신선했고, 그만큼 높이 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