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수묵운동(水墨運動) 주도한 화가 홍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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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수묵운동(水墨運動) 주도한 화가 홍용선
  • 박석태
  • 승인 2024.08.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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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51) 화가 홍용선 - 박석태 / 미술사 연구자

인천 출신의 한국화가이자 이론가인 홍용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미술계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사연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를 둘러싼 미술계의 여러 상황과 그 과정에서의 미학적 선택을 이해해야 홍용선이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또한 우리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미술전람회》와 ‘동양화’

흔히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동양화’라는 용어가 있다. 워낙 일반적으로 사용되므로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이조차 적어 보인다. 심지어 우스갯소리로 ‘동양화’를 ‘화투 친다’는 말의 은어로 쓸 정도니까. 그러나 이 말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 말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鮮展)’)라는 공모전 방식의 전람회가 있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화가나 조각가, 혹은 서예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의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행한다. 《선전》도 그 일환이었다. 1922년부터 1944년 패망 직전까지 이어졌다. 심사는 일본 유수의 미술대학 교수나 《선전》에서 남다른 성과를 거둔 조선인 미술가가 맡았다. 여기에서 입상한 작가는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고, 조선총독부는 일부 작품을 매입하기도 하여 당시 미술계의 가장 큰 권위를 확보해 나갔다. 심사의 기준은 조선을 얼마나 목가적인 땅으로 그려내는가였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설 자리 따위는 없었다. 소위 피식민지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문화 사업에 일제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일제에 의해 쓰인 ‘미술(美術)’이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아름다움을 전하는 기술’로만 인식되었다. 《선전》이 열리기 전까지 이 땅에서는 우리의 그림과 글씨를 일컫는 말로 ‘서화(書畫)’가 쓰였다. 그러나 일제는 ‘서화부’가 아닌 ‘동양화부’를 신설하여 운영했다. 중국의 ‘중국화’, 일본의 ‘일본화’라는 용어가 있었는데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국적 불명의 ‘동양화’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단체관람 장면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단체관람 장면(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국화라는 말, 그리고 수묵화 운동

《선전》은 해방 이후 《국전(國展)》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심사의 체계나 추천작가 제도 등은 《선전》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미술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어도, 제도의 운영과 수상을 둘러싼 잡음은 여전하였다. 상의 권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일제강점기 미술작가로서 유일한 공식 데뷔 무대였던 《선전》과 달리, 1970~80년대를 거치며 젊은 작가들은 《국전》의 맹목적인 귄위에 대한 강요를 거부했다. 이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새로운 시대 의식을 가지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침내 1980년대 들어 현장 중심의 민중미술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현장주의 미술은 1980년대의 저항적인 기운과 결속되면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수단으로서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 반면, 정치적 억압의 구조가 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는 점과 오랫동안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의해 주도되었던 미술계 권력 구조에 대한 불만이 1980년대 미술의 급격한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미술 창작자가 급증하면서 등장한 신진 세대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기존 미술계의 엇갈림 역시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받아 우리 미술사에서 보기 드물게 일어난 변화의 물결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원하고 있었다.

한편, 전통 화단의 문제의식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다. 사회 변혁보다는 그동안 ‘동양화’로 불렸던 전통화의 개념 문제가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민중미술 운동이 사회 변혁과 궤를 같이했다면, 전통화단은 미술계 내부의 미학적 논쟁을 문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양화’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선전》 출범 이후 사용되었던 ‘동양화’라는 명칭을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성된 용어라고 비판하고 이를 주체적 입장에서 개칭하자는 논의가 1980년대 들어 활발해졌다. ‘동양화’ 용어를 대체하는 ‘한국화’가 전면에 부각하게 된 때가 바로 이때였다. 공식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12월 문교부에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이에 맞추어 1983년 개정된 미술 교과서부터였다.

이미 1980년에는 일제 잔재 청산과 주체성 확립의 조류와 밀착되어 큰 호응을 얻어, 198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의 공모전인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도 ‘동양화부’ 대신 ‘한국화부’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간단체에서는 일찌감치 1967년부터 ‘한국화’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화회’가 등장하였고, 1970년을 전후하여 이영복·하태진·이숙자 등 젊은 세대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단순한 명칭 변경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미술의 본 얼굴을 되찾고, 이를 주체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한글세대를 주축으로 한국의 전통과 고유성에 대한 자각과 재인식을 통하여 한국화의 현대화와 세계미술로의 비약 등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경제 성장과 올림픽 개최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과 발맞추어, 수묵운동(水墨運動)과 채색운동, 그리고 이를 통합하려는 경향 등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단순히 명칭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인 문화 역량을 창출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변화에 대한 모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20·30대 청년작가 중심의 수묵운동, 수묵 개념의 변화, 민화·고구려 고분벽화·불화·무속화 등에 대한 관심과 고조, 채색화의 융성 등으로 이어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화’ 용어의 사용이 1980년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출신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수묵운동’과 맥을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수묵운동은 1980년대 이전까지 유행한 이른바 ‘동양화’의 채색 경향을 거부하는 데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채색화를 우리의 수묵이라는 전통적인 재료가 지닌 동양의 정신적 가치를 결여한 경향으로 보았다. 수묵이야말로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는 매재로 규정했고, 이를 ‘한국화’의 개념과 연결하려 시도하였다.

 

인천 출신의 홍용선, 수묵화 운동을 촉발하다

이제 인천 출신의 한국화가 홍용선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다소 긴 설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한국 현대미술, 그중에서도 현대 전통화단에서 펼쳐진 ‘수묵운동’의 개념을 세웠던 과정을 이해해야 홍용선의 미술적 업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예술은 결과와 함께 과정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구현되도록 하는 실험 정신이 핵심이다.

홍용선은 홍익대학교 출신으로 앞서 거론한 1980년대 한국화단의 수묵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80년대 초반 수묵운동은 1965년 해체된 ‘묵림회’가 펼쳐 보였던 동양화의 적극적인 조형실험 이후에 나타난 가장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묵림회를 중심으로 한 1960년대 동양화의 실험적 추세가 동양화에서 관념의 탈피와 양식의 한계 실험이라고 할 정도로 매재의 확대와 의식의 변혁을 내세운 것이라면, 1980년대의 수묵운동은 수묵을 통한 고유한 정신세계로의 환원을 그 바탕에 깐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그동안 실험을 통해 퇴색해 가기 시작한 동양화의 본래적인 정신을 수묵이라는 순수한 매재를 통해 검증한다는 움직임으로 파악된다. 홍용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비현실적인 관념의 문제를 털어버리지 않으면 수묵의 현대화와 세계화는 요원하다는 인식을 지속하고 있다.

 

홍용선, <석봉 한호 초상(문교부 표준영정)>, 100×90cm, 비단에 채색, 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좌). 홍용선이 2007년에 발간한 『한국화의 세계』(우)

 

이 운동은 주로 홍익대 동양화과 출신들이 주도하면서 왕성한 기획전시를 지속하였는데, 이 운동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홍용선과 송수남이다. 이 둘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5년 선·후배 사이로, 홍용선은 송수남에게 수묵이 가진 전통성과 정신적 가치, 그리고 여기에 현대 회화로서의 요소를 확장하는 가능성에 주목할 것을 제의했고, 당시 홍익대학교 강사였던 송수남은 전시를 통해 실질적인 수묵운동 담론을 주도했다. 이 전시가 바로 《오늘의 전통회화 81전》으로, 1980년대의 민중미술 운동과 함께 전통화단의 미술제도 자체에 대한 개념 전환을 실험한 수묵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 전시는 들고 남이 자유로운, 이른바 ‘앙데팡당’ 형식으로 10년간 지속하게 된다.

이처럼 홍용선은 남다른 기획력으로 고루한 전통 계승 차원에 머물러 있던 당시 전통화단에 일대 변화를 촉구하는 전시를 선보였다. 작가로서의 홍용선은 전통적인 묵법에 사경과 현실 풍경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한 추상 양식을 주도했던 1970~80년대를 빼고 나면 관념 산수화와 실경산수를 오가는 한편, 용필(用筆)과 용묵(用墨)의 능숙한 필력으로 전통을 살리면서 산수화의 리얼리티를 모색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뿐만 아니라 홍용선은 수많은 저작을 저술한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단행본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을 비롯해 『한국화의 세계』, 『현대한국화론』 등의 저서와 『삼국지를 따라가는 홍용선 중국문화기행』,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외 3권의 시화집 등을 내기도 했다. 그는 또 고희동의 평전 『살아서는 고전, 죽어서는 역사』의 권두서에 21쪽에 달하는 장문의 기고를 하기도 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동양의 근대, 즉 서세동점 시기의 한·중·일 삼국의 작가 고희동과 서비홍(徐悲鴻), 횡산대관(橫山大觀)을 비교하기도 했다.

 

홍용선, '청한(淸閑)', 86×95cm, 종이에 수묵담채, 1995.
홍용선, '청한(淸閑)', 86×95cm, 종이에 수묵담채, 1995.
홍용선,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겨울-설산', 90×90cm, 스티로폼에 먹과 채색, 2010.
홍용선,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겨울-설산', 90×90cm, 스티로폼에 먹과 채색, 2010.

 

다양성의 도시 인천과 홍용선

홍용선은 194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를 6회로 졸업했다. 회고에 의하면 초등학교 시절 그는 노래와 그림, 그리고 글을 잘 쓰기로 알려진 학생이었다. 인천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장선백 선생이 주도하는 미술부에서 활동했고,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 활동과 더불어 음악반과 문예반까지 섭렵했다. 이뿐 아니라 율목교회에서는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당시 지휘자가 합창지도로 유명한 윤학원 선생이었다. 이처럼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대학 졸업 후 부임한 부산여대, 부산대, 세종대에서도 연극부 지도 교수를 맡고, 시화집을 발간하는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지속하는 데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홍용선의 출신지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가 우현 고유섭, 한국 근·현대미술 연구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석남 이경성, 이경성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임영방의 고향인 곳이다. 미술과 관련한 면면한 전통이 있는 곳이 인천이다. 개항도시로서 문화적 다양성이 저변에 깔려있었는데 도시의 분위기가 이런 인재들을 배출하게 만들었다. 문화적 다양성의 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섭렵한 홍용선, 그는 어쩌면 인천의 자유로운 이미지를 상징하는 작가로 인식되고도 남는 면이 있을 듯하다. 그가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능할 수 있는 작가인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일찍이 그의 재능을 펼치게 한 고향 인천의 자유롭고 다채로운 분위기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홍용선의 양평 작업실 내부. 최근의 스티로폼 작품들이 걸려 있다.
홍용선의 양평 작업실 내부. 최근의 스티로폼 작품들이 걸려 있다.
남한강이 내려 보이는 홍용선의 작업실. ‘관수루’라는 현액이 보인다.

 

그는 세종대 교수를 끝으로 현재 전업작가로 남한강이 내려 보이는 양평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일찍이 한국화의 현대화·세계화를 주창하였고 전통적인 매재와 방법론을 뛰어넘을 것을 제안해 왔다. 그런 점에서 그가 최근에 보여주는 스티로폼을 이용한 작업은 주목을 요한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말처럼 “기성의 오브제들을 재활용 차원에서 사용하자는 아주 간단한 취지와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 그의 이러한 발상은 물론 한국화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는 실험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80년대 수묵화운동을 주도했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섭렵한 일사(一沙) 홍용선. 고향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최근 인천시립미술관 설립 등의 현안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 그의 모습은 후학들에게 귀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남한강 자택 앞에서 홍용선 교수
남한강 자택 앞에서 홍용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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