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홍예문
해풍이 축항을 넘어 응봉산을 타고 휘돌아 가는 능선 아래
매부리 고개의 골짜기를 뚫어 문을 낸 것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있던 1905년의 무렵이었다.
부둣가 중심이던 일본지계가 청일전쟁 후에 크게 팽창하였고
전동을 거쳐 만석동 쪽으로 거주지가 거침없이 확대되었다.
이 지역들에서 축현역(동인천역)을 왕래하려면
멀리 산언덕을 우회해 다녀야만 했는데
이 불편함을 덜기위해 1905년 일본이 설계와 굴착공사를 지도하고
석축공사는 중국인 석수가 담당하고
흙일과 잡일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
당시 홍예문 공사 중에는 땅속에서 암반이 계속 나오고
흙을 파내면서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작업을 하던 50여 명의 인부들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눈물겨운 내력이 깃들어 있는 홍예문은 2002년
‘인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축항과 함께 일인들이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여겼던 홍예문을 통해
한국인 거주지였던 북촌의 전동, 인현동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잠식되고 말았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홍예문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홍예문 큰 바위 옆 으슥한 곳에서
일본 여자가 급한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엉덩이를 허옇게 내놓고 서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윤치덕이라는 청년이 이 해괴하기 짝이 없는 거동을 보고
힘이 있는 대로 볼기짝을 갈기고 줄행랑을 쳤다.
혼비백산한 일본 여자는 경찰서로 달려가
봉변당한 일을 하소연했지만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노상방뇨 단속을 위해 다음과 같은 벌금판이 세워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