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은 우리 근현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합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도시가 변해가는 현장을 눈으로 목격하지만, 제 모습을 고이 간직한 체 삶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입니다. 거기다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균 선생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뛰게 하는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북로 그늘진 가로수길을 걷다 작은 공원에서 만해 한용운 동상을 만났습니다. 길 한쪽에 '만해 한용운 심우장', '북정마을', '성북동비둘기쉼터' 이정표가 보입니다.
만해 선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심우장
데크 계단을 오르자 좁고 후미진 북정마을 골목으로 이어집니다. 길가를 따라 빨간 연등이 줄지어 매달려 있습니다. 처음 찾는 사람은 길모퉁이 끝에 절집이 있나 할 것 같습니다.
비탈길에 심우장 안내 간판이 보이고, 쪽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 고즈넉한 한옥이 정겹습니다. 인기척에 웃음 띤 얼굴을 한 주인이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심우장은 한국불교 근대화를 주장했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고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이 만년에 거처했던 집입니다. 택호 심우장에는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심우(尋牛)'란 찾을 '심(尋)'자에 소 '우(牛)'를 쓰는데,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만해 스님은 '소' 즉,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심우' 단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름 지었다 합니다.
잃을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 않으리라.
담벼락에 표시한 한용운 연대표를 보니 스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서재로 쓰였던 사랑방에서 찬불가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옵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네댓 명이 예불을 마친 듯싶습니다.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간식이 있는데, 좀 잡수세요."
"불자들이신 모양이에요?"
"네, 만해불교청년회라는 모임입니다."
"아! 그러세요. 맛난 거 잘 먹겠습니다."
만해불교청년회는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불경 공부를 하면서 청소 봉사도 한다고 합니다. 만해 선사의 정신을 기리고, 심우장이 정갈하게 유지될 수 있게 힘을 보탠다고 하니 보기 좋아 보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만해 선사는 1933년 벽산 스님께서 집터를 기증하고,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이곳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심우장을 지었습니다. 1944년 입적하기 전까지 스님은 여기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심우장은 팔작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을 두고 전체 5간을 배치한 형태의 구조입니다. 단아한 기와집이 소박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심우장은 국가사적 제550호로 등록되었습니다. 정겨운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예전 우리 고향집과 비슷합니다.
방문이 열린 안을 들여봤습니다. 스님의 고고한 초상화가 걸렸습니다. 서재에는 무엇보다 근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시집인 <님의 침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책장을 열고 소리 내어 낭송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선생의 숨결이 담긴 붓글씨. 물 흐르듯 자유로우면서 힘이 넘칩니다. 글씨에서도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한용운의 기개
만해 한용운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졌습니다. 또 한국불교 근대화를 주도했으며 <님의 침묵>과 같은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남긴 민족시인입니다.
툇마루에 볕이 들어와야 할 시간인데, 그늘이 졌습니다. 심우장이 북향집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스님은 남향으로 하면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게 되니 이와 등을 지고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05년 27세 나이로 승려가 되고,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 행동강령이 담긴 공약 3장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한용운은 3.1운동 주동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선생은 강연과 잡지 등을 만들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또다시 수감되었습니다.
1920대와 30년대 일제는 더욱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습니다. 탄압과 회유에 못이긴 지식인들은 하나둘 변절하고 투항하기도 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시인 한용운은 1926년 <님의 침묵>과 같은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변절하여 넘어가는 걸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길에서 최남선을 만난 한용운은 "내가 아는 육당은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버렸소!"라고 쏘아붙였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심우장에서 생을 마친 만해 한용운. 심우장 한 쪽에 버티고 있는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선생의 대쪽 같은 기개를 닮은 듯싶습니다.
댓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을 보니 스님께서 지금도 기거하면서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고 반길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성북동 길가 선생의 동상 옆에 새겨져 있는 명시 <님의 침묵>를 읽어봅니다. 선생의 굳은 결심과 지조를 기려봅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이 /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