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장 어귀에서
(1) 화교 2 세대의 맛
사무실 개소식을 가거나 친구의 이사를 도우러 가면 으레 점심으로 먹는 것이 짜장면이다. 이제 막 들어온 동네에서 무슨 특별한 음식점을 찾는 것도 애로려니와, 중국집이야 대한민국 동네 어디를 가도 있는 곳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이삿짐을 부려놓고 짜장면을 먹을 때면 비로소 ‘내가 이 동네에 터전을 틀게 되는구나!’라는 각별한 감정이 치미는 것 또한 한국인들이 가진 공통의 경험이다. 짜장면 또한 국수인지라, 국수는 수명과 인연을 상징하는 길하고 복된 음식이다. 경사스러운 날 유독 기다란 면발을 찾는 것이 체질화되어서인지, 이사며 졸업 같은 행사에는 늘 짜장면이 따라다닌다. 특별한 음식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다운 친구처럼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는 모양이다. 까닭에 낯선 곳에 이사를 와서 첫 끼니로 짜장면을 먹는 일은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 이 낯선 동네가 ‘우리 동네’가 된다는 감흥에 젖게 한다. 까만 춘장이 흰 면발에 무시로 섞이듯 짜장면은 우리를 새로운 동네에 찰싹 들러붙게 하는 끈끈한 아교이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이웃인 셈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흔한 음식임에도 짜장면에는 ‘중국음식’이라는 특별한 이명(異名)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 태생이 한국인의 습속에서 자라난 음식이 아니라 화교(華僑)가 들어와서 만든 음식인 까닭이겠다. 우리가 먹는 일반적 외식 메뉴가 백 년은커녕 채 수십 년이 되지 못한 것이 다반사이고 심지어 튀김닭조차 이제는 한식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짜장면은 참 유별난 케이스이다. 인천 개항장에 화교가 들어와 정착한 것이 백 년이 훌쩍 넘었거니와 중국에도 흔치 않은데 한국에는 지천으로 깔린 것이 짜장면이건만 한식에서는 예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인천에서는 짜장면을 ‘향토 음식’이라고 부른다. 한식도 아닌데 향토 음식이라니 이 또한 괴이한 별칭이 아닐 수 없다. 제일 친숙하면서도 결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주지 않는 이 미묘한 짜장면의 정체성이야말로 나는 인천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바로 토박이보다는 이주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더 많고 핏줄이니 원조이니 하는 것보다는 교잡이 우세하다는 사실이다.
중구청 근처에는 아담한 중국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대부분 화교들이 운영 중인 가게들이다. 차이나타운의 휘황한 음식점들도 매력 있지만 뭐랄까 도로 한 블록 차이임에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규모가 있는 음식점들의 경우 화교가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이제는 주방 인원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메뉴가 화려하고 조금은 세련된 중국음식을 즐길 수 있다. 말하자면 꽤 중국화가 진행된 것이다. 반면 중구청 아래 수수하고 아담한 ‘중국집’의 경우 한국 사람에게 완전히 체질화된 음식, 혹은 이제는 잊혀 가는 옛맛을 내는 곳들이 왕왕 있다. 결코 고답한 취향으로 이런 집을 찾는다기보다는 주머니 사정에 맞춰 독한 배갈을 한잔하거나 수수한 한 끼를때우기에는 이런 곳이 오히려 좋다. 그중에서도 오늘 찾은 집은 백발 성성하신 주인이 큰 냄비를 덜그럭거리며 불질을 하는 가게였다. 노년의 부부가 단출하게 운영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더 아늑하고 푸근한 곳이다.
차림표를 죽 둘러보니 과연 노년의 주방장께서 운영하는 가게답게 ‘고기 튀김’이 눈에 들어온다. 탕수육이 아니라 고기 튀김, 기실 언어순화의 막강한 위력과 교양인의 높은 체면 때문이지 예전에는 ‘고기 덴뿌라’라고 부르던, 안줏거리로는 가장 만만한 놈이었다. 찍어 먹으라 내어준 것도 간장이 아닌 후춧가루 종지였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이건만 푹신한 튀김을 씹는 것은 유년의 이부자리에 폭하고 빠지는 기분이 든다. 어린 시절 어쩌다 먹을 수 있는 나름 고급음식이었는데 어느덧 40도 넘는 배갈에 주머니 걱정 없는 안줏거리로 마주한 것이 중년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고기튀김을 해주는 곳도 드물기에 어린 시절을 추억팔이할 수 있는 것이요, 청승 떠는 감상이 싸구려이지 유년을 향수케 하는 이 맛이 값싼 것은 결코 아니다.
기왕 들른 가게이니 요깃거리로 짜장면과 볶음밥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새카만 간짜장이 요즘과는 사뭇 다르게 달지 않고 짭조름하였다. 시간을 좀 두니 아예 면에 스며들어 흡사 파스타 같은 모양새로 돌변한다. 이렇게 진득하고 새카만 장을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할머니께서 만주(滿洲) 살던 시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난하여 땅을 좇아 황해도 연백에서 만주 연길로 스며들었던 사연 하며 아이부터 어른까지 아편을 피던 기괴한 거리의 풍경. 풍토병이 무서워 항시로 땅콩을 섭취해야 했고, 고기보다는 돼지비계를 더 좋아하는 낯선 사람들. 무엇보다 집집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른만한 항아리가 있고 뚜껑을 열어 놓은 항아리에는 춘장이 가득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출입을 할 때마다 주인이든 손님이든 이 장독에 박혀 있는 막대를 한 번씩 저어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는데, 처음에는 갈색이었던 장이 저으면 저을수록 새카맣게 변한다고 하였다. 기실 화교들이 여전히 한국에서 이방인이듯이 우리 할머니와 같은 조선사람들도 만주에서는 화교와 똑같은 이방인이었으리라. 시세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저 중국 동북삼성 조선족의 현실을 떠올린다면 내가 들은 할머니 시절 춘장의 추억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묘한 느낌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새카맣고 짭짤한 춘장이 가득 묻어있는 짜장면이었던 것이다.
볶음밥도 흡사 불에 구워낸 것처럼 구수한 맛을 낸다. 요즘 소위 불맛이라고 하여 목초액을 뿌리거나 숯불 향을 잔뜩 입혀 음식을 내주는 곳이 많은데, 예전 기억의 불맛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돼지기름 따위의 유증기가 불에 닿으며 내는 구수한 향이 그것이다. 이곳은 음식에 이런 불향이 잔뜩 묻어있어, 짜장이나 짬뽕 국물 등을 따로 내주지 않는다. 예전 방식 그대로 계란국에 파며 당근을 옹기종기 썰어 담백한 국물로 이 불향에 보조를 맞출 뿐이다. 우스갯소리로 짜장 소스나 짬뽕 국물이 없어 투덜거리는 손님이 없냐고 물어보자 주인은 껄껄 웃는다. 짜장이나 짬뽕 국물에 기대어 먹는 볶음밥이 어디 제대로 된 볶음밥이겠냐고 지론을 펼친다. 또한 모든 짜장이나 짬뽕은 그 즉시 볶아 주는 순전한 개인별 음식이기에 여분의 것을 줄 사정도 결코 허락될 수 없다고 하였다. 볶음밥과 불맛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낸다.
나는 무엇보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짜 불맛’이라 돼지기름을 쓰지 않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답은 엉뚱하게도 식용유를 쓴다는 말이 돌아온다. 외식업에 대해 신문이나방송에서 늘 트집 잡던 것이 다름 아닌 기름 문제인지라, 돼지기름이 쇼트닝이 됐고, 다시 식용유로 철갈이를 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하여 어깨가 떨어져 나가라 국자로 쌀을 몇 번이나 치대며 흡사 굽다시피 볶는다고 하였다.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노주인은 어깨가 고질인 양 연신 주무르고 있었다. 재료는 예전의 것이 아니건만 돼지기름의 그 불내는 옛 맛 그대로이니 저 어깨와 식용유가 결합하여 그런 구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 흔하디흔한 계란 볶음밥이 아니라 오랜만에 불내 나는 돼지고기 볶음밥을 먹을 수 있어 흡족하였다. 다만 순전한 누군가의 어깨를 희생한 대가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 반가운 옛 음식을 대하며 주인께 꼭 나중에 술 한잔 같이 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며칠 뒤 어스름한 저녁 가게 문이 닫힐 즈음 우동 한 그릇을 식힌 뒤 주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맑은 국물에 오징어와 해삼 등속이 들어가 있고 계란까지 풀어져 부드럽기 그지없는 맛이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는 이 75세 화교 2세대의 이야기를 마치 할머니 젖을 만지던 시절의 옛이야기 구절마냥 듣고 있었다. 산동에서 목숨을 걸고 범선을 타고 인천으로 건너온 아버지 이야기하며 젊은 시절 중국에서 사업가로 맹활약하던 사연까지.구한말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전쟁과 대만 국적의 선택, 한중 수교 이후 변해버린 이곳의 풍경들까지 영사기 필름이 흑백에서 컬러로 차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단출한 국수 한 그릇도 일본식 이름인 ‘우동’이요 이걸 파는 곳이 중국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사의 기박함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셈이다. 노주인은 말했다.
“내 중국에서 사업이 안 되고 결국 다시 인천으로 왔을 때, 죽기보다 하기 싫은 일이 이 요리사 일이었어요.”
대만과 중국에서는 한국 태생이라서 차별받고, 한국에서는 변변한 시민권조차 확보하지 못하였다. 인천 화교가 백 년을 함께한 인천 주민이건만, 그 누구도 자신들을 인정해주지 않기에,자치 타칭 “아시아의 고아”가 이들의 별칭이다. 그러니 중국음식점을 개업하는 일이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백여 년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민족적 숙명을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하긴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들이 있지 않았던가. 남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에 허리가 끊어지는 사이, 하와이 용설란(龍舌蘭) 농장에서 일하고, 미국으로 넘어가 세탁소를 차리고 독일로 건너가 광부로 평생을 보낸 사연이 결코 먼 옛날이 아니다. 민적(民籍)이 없는 족속은 늘 인정(認定)에 메말라 사람 대접받는 일이 평생의 과업이 되어 버린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중)
화교 2세대의 인생 역정을 들으며 왜 이 시가 떠오른 것이었을까. 중국집을 운영하며 이제야 사람들이 요리사로서 인정해주고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의 건강을 걱정해줄 때 한량없이 뿌듯함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한용운의 노래와 다를 바 없다. 한용운이 민적이 없어 겪어야 했던 모욕과 설움의 순간에 비로소 ‘사랑하는 님’을 떠올린 것처럼, 노부부가 좌절과 원통의 순간을 버티며 찾아낸 것이 결국 이 자그마한 중국집이었던 것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숙명이었었지만 무쇠솥에 불질을 하며 춘장을 볶는 사이 옛 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한용운의 당신이 민족이라면, 여전히 민적 없는 노부부에게 당신이란 서로가 의지하며 꾸려가는 이 작은 가게인 셈이다.
이야기와 소주잔이 몇 바퀴 돌고 둘만의 테이블에서 구수한 담배연기가 연신 피어오를 즈음, 누군가 문 닫힌 가게로 들어온다.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이 일에 지쳐 또 빈속에 술만 마실까 걱정된다며 된장국을 끓여왔다고 너스레를 떠신다. 된장이든 춘장이든 장의 빛깔은 다를지 몰라도 장이 지닌 온정의 간과 맛은 통하기 마련인가 보다. 졸지에 중식과 한식이 함께 깔린 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즈음 취기가 올라 식사를 하시라 말씀드리고 가게를 나왔다.
새카만 하늘 아래로 골목길 자락자락 뻗은 여기 언덕마루를 걷고 싶었다. 이 언덕마루를 올라가면 화교들이 세운 의선당(義善堂)이라는 아담한 절이 오도카니 서 있다. 백여 년 전 범선을 타고 산동(山東)에서 인천으로 건너오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만 했다. 무사히 인천까지 도착할 수 있기를, 그리고 부두 노동자[苦力]로서 인천에 안착하여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의선당의 부처며 용왕이며 관우 등의 온갖 신상에 묻어있다. 구복이 간절한 만큼 믿고 의지할 신(神)의 가짓수가 총동원된 것이다. 하지만 백여 년 전 그 소망이 어느 정도나 성취되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민적(民籍) 없는 자들이 만든 짜장면이기에 오히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기층의 음식으로 우리 삶에 속속들이 스며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쇠솥보다 뜨거운 어깨로 검디검은 춘장을 볶는 사이 구수한 인정(人情)의 맛이 남녀노소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입맛을 돋우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사하여 새 동네에 들어왔을 적에도 이 안도와 푸근함을 안겨주는 짜장면을 제일 먼저 찾는 것이리라.
짜장면은 언제쯤 우리 식문화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일백 년 화교가 만든 음식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천 주민이 가꾸어낸 가장 친근한 기층의 음식이기도 하다. 굳이 피아를 가르고 야박한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기보다는 짜장면을 비벼먹 듯 그 경계를 좀 느슨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짜장면에는 그런 너그러움의 가능성이 스며 있다. 인천(仁川)의 ‘어질 인(仁)’자에 걸맞게 우리는 짜장면을 먹으며 그 너그러움과 온기를 공유해야겠다. 속절없이 3세대들은 모두 귀화시키켜야겠다는 저 노부부의 불질이 의선당 하늘을 까맣게 태우며, 겨울밤 점점 이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