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간장으로 조려낸 스지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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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간장으로 조려낸 스지의 맛
  • 미추홀학산문화원
  • 승인 2024.09.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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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味)추(追)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 개항장 어귀에서
(2) 인천 음식에 남아 있는 일본의 흔적들
인천in이 미추홀학산문화원과 함께 인천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부에 이어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2부에서는 ‘인천의 입맛을 찾다’를 주제로 바다와 관련이 깊은 인천 음식의 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미추홀 살아지다' 시리즈로 출간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천 음식이야기 기획은 미추홀학산문화원, 스토리 채집과 집필은 '학산미味담식회'(정형서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정현숙 미추홀학산문화원 부원장, 조지형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병구(사 인천교육연구소 이사장), 사진은 김상태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류제혁 '삼촌네 사진관' 대표)가 참여했습니다. 

 

문필가 김소운(金素雲)1951년 일본 잡지에 연재하였던 목근통신(木槿通信, 무궁화 소식지)이라는 편지 형태의 수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애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 내가 가진 변변치 못한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태반은 일본에서 얻어 온 것입니다.”

 

광복을 맞이한 지 고작 6년이 지난 시점에 감히 일본에게 이렇게 우호적인 글을 썼나 싶겠지만 기실 이 친애하는 일본 국민이라는 말은 일종의 비꼬기 수법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미국인 종군기자의 입을 빌어 조롱하였던 것에 격분한 김소운이 일본인의 저열성을 꼬집기 위해 쓴 것이 저 수필의 저의이다. 하지만 7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소운의 글을 읽어도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김소운 스스로가 인정하고 자복한 본인의 친일 행적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근대화에는 일제라는 요소가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일본 국민이라 비꼬는 와중에도 결국 근대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 적국인 일본의 영향을 어쩔 수 없이 입었다는 그다음 구절은 역시 우리 마음을 후벼판다.

이것은 비단 김소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습속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 하다못해 매일 양념으로 쓰는 양조간장조차 우리는 얼마 전까지 왜간장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덴뿌라가 오뎅이 되고 다시 어묵이라 개명하였지만, 그 태생까지 지우려면 망각과 무지의 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개항장과 함께 성장한 인천에서는 더욱 돌출되는 성격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인천 곳곳의 재래시장을 끼고 성업 중이었던 어묵 공장들이 꽤 됐다. ‘부산 어묵의 명성에 밀려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왜관을 끼고 어묵 공장들이 들어선 것은 두 도시 공통의 역사이다. 까닭에 시장 한구석에서는 생선 비린내와 어육을 쪄내는 야릇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공장 주인의 국적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한번 들인 입맛은 무섭게 우리 삶에 뿌리내려 이제는 아예 토착화되었다. 어묵볶음이 없는 기사식당이나 백반집 상차림은 어딘지 모르게 서운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기실 인천 어묵이 사라져가는 것 역시 나에게는 김소운의 글을 읽는 것처럼 개운치 못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아무래도 노숙한 내 입맛에는 인천 재래시장에서 만든 어묵이 더 입에 맞았으니, 그 태생이 저 불량한 일제강점기에 닿아 있음에도 여전히 어묵맛이 그리운 것은 얼마나 이중적 인격, 아니 이중적 입맛의 잣대냐 말이다. 인천에 어묵 공장이 돌아가던 시절 그 어묵 맛이 각별하였던 까닭은 비단 가난과 먹을 것이 귀하였던 시대적 사정과 아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황해 앞바다에 잡히는 온갖 기름진 잡어들, 황새기며 밴댕이처럼 살이 달큰한 생선들을 대가리째로 갈아 만든 어묵은 한결 기름지고 그 냄새도 지금과는 완연히 달랐다. 그래서 어묵 몇 장을 넣고 찌개나 탕을 끓여도 기름이 진하게 배어 나와 국물의 판도를 뒤바꿔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잡어마저 댈 수가 없어서 수입산 연육을 쓴다 하니 젊을 적 먹은 어묵에 비하면 요즘의 것은 깔끔할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그 맛과 향이 심심하고 멋없는 것 같다. 특히 어묵 공장에서 이제 막 뜨끈뜨끈한 어묵이 주르르 나올 때를 기다려 파지된 것을 그 자리에서 공짜로 얻어먹을 때의 각별한 맛이란! 이런 사소한 유년의 추억조차도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입맛이 알게 모르게 스며있다.

개항장 거리 근처에는 이런 음식들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신포시장 한편을 점령한 핫바골목도 옛 어묵 공장의 후신들이요, 사라진 지 꽤 되었을 센베라 불리는 양과자점도 이 동네에서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메밀국수며 칼국수에 튀김 부스러기를 뿌려 먹는 습속도 이 동네에만 고집스럽게 남아있는데 이제는 멀리서도 찾아와서 먹는 명물이 되어버렸다. 소위 일본 현지에서는 덴카츠라 불리는 물방울 튀김이 신포동 일대 분식 문화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신포시장에서 파는 닭강정 튀김가루가 올라가기도 하여 그 풍미가 일층 독특해졌다는 사실이다. 차가운 메밀국수가 따뜻한 온국수가 되고, 물방울 튀김은 닭튀김의 그것으로 대체한 뒤, 위에는 고명으로 향이 진한 쑥갓까지 올려 완연히 다른 음식으로 변모하였다. 남쪽의 귤나무를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는 고사는 인천의 메밀 우동이나 칼국수를 두고 할 말이다.

 

센베 양과자
센베 양과자

 

메밀우동
메밀우동

 

스지탕
스지탕

 

신포동의 허름한 주점들에도 이런 식의 음식은 널려있다.가령 이 골목에서 유명한 스지탕이 그것이다. 쇠힘줄을 고아 먹는 것이야 주머니 사정 넉넉지 못한 서민들에게 쇠고기를 즐길 수 있는 평범한 방법 중 하나이다. 다만 언어 순화의 노력으로 쓰봉이 바지가 되고, 다마네기, 와리바시, 심지어 다꽝에 덴뿌라까지 모두 개명을 하였지만 여전히 이 만만한 술안주는 서민의 입속에서 스지(すじ)라는 창씨(創氏)로 남아있다. 하물며 정육점에서조차 쇠힘줄을 달라 말하면, “스지 말이지요?”라는 반문이 붙는다. 일본에서는 오뎅이 온갖 재료를 넣은 국물 음식을 말한다. 우리처럼 어묵만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달걀이나 곤약에 찌고 굽고 튀긴 종류별 어묵과 특히 빠지지 않는 것이 쇠 힘줄이다. 그걸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하나씩 우물거리며 맥주나 정종따위의 술을 들이켠다 하여 선술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상은 일제시대 때 도시에 창궐하였던 결핵을 앓았다. 속칭 폐병쟁이였던 것이다. 결핵 환자는 얼굴이 창백해지기 마련인데, 거기에 이상은 한술 더 떠 일부러 하얀 셔츠를 입고 선술집에 들러 오뎅 하나에 술 한 잔씩만 마시고 바로 다음 집으로, 그다음 집으로 순례를 다녔다. 그러면 소위 문학청년이나 먹물 좀 먹었다는 젊은이들이 이 스타 시인을 따라다니며 선술집 거리가 북적이곤 하였다. 아직도 적산가옥이 남아 있고 그 아래로 포장마차식 주점들이 죽 늘어서 있으며, 가게 안에서 스지탕을 파는 모습을 보면 신포동과 일제 때 은좌의 모습이 포개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거리에서 여전히 이차 삼차 거푸 술을 들이키는 우리들이 흡사 시인 이상의 후손이라는 생각까지 들면 이 역시 되바라진 상상력일지 모르겠다.

 

일본의 오뎅어묵탕(출처 Getty lamges Bank)
일본의 오뎅어묵탕(출처 Getty lamges Bank)
일본 오뎅 요리에서 어묵이 없어진 형태인 스지탕
일본 오뎅 요리에서 어묵이 없어진 형태인 스지탕

 

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른 주점에서는 스지탕 말고도 독특한 음식을 하나 더 내주고 있었다. ‘함박 스텍이라는 메뉴인데, 스테이크면 스테이크지 스텍이 뭐냔 말이다. 이 역시 고집스레 남은 언어의 잔재라 생각하면, 스지탕과 함박 스텍이 깔린 이 술상은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여 미군정에 이은 분단의 과정까지 한국 근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하지만 간장에 졸인 스지탕도 칼칼한 맛이 일본의 오뎅과는 전혀 다른 맛이고, 함박 스텍 역시 떡갈비와 유사한 느낌이라 우리가 아는 햄버거 스테이크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결국 기층의 음식이란 외래의 것을 강하게 흡수하면서도 서민의 사정과 입맛에 맞춰 능란하게 변주하기 마련인가 보다. 가파르고 거칠었던 역사의 고갯길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고한 외래 권력에 그 분위기를 맞추면서도 한결같이 기층의 입맛에 기댈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덕분에 여전히 이런 음식은 그 독특한 태생에도 시절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이름을 품고 있는 함박 스텍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이름을 품고 있는 함박 스텍

 

즐거운 벗들과 술 한잔을 하고 적산가옥 자리에 있는 카페에서 차와 빙수를 먹으며 이런 이야기들을 속절없이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긴 팥빙수 역시 단팥을 먹는다는 점을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일본의 흔적 중 하나일 게다. 한국식 팥죽과 일본식 단팥죽이 엄연히 다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단팥과 함께 먹는 이 빙수야말로 외래로부터 받아들인 근대 과학의 흔적일것이다. 신포시장과 인천 어시장은 그 역사가 꽤나 깊은데 강점기 시절 상권은 일본 사람들이 꽉 잡고 있었다. 이유인 즉, 이 얼음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상인들이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에서 빙수를 먹는 것 역시 지나간 역사를 생각하면 무작정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릿한 맛도 조금 섞여 있는 것이다.

 

일본 음식의 흔적이 묻어 있는 단팥 빙수
      일본 음식의 흔적이 묻어 있는 단팥 빙수

 

하지만, 메밀국수가 물방울 튀김이 올라간 메밀 우동이 되고, 멀건 오뎅이 간장과 양념에 칼칼하게 조린 스지탕이 된 것을 보면 멜랑콜리한 감상에 빠질 일도 아니겠다. 오히려 기층의 음식으로 여전히 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에 왜색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교잡은 있을지언정, 그것을 서민의 삶에 뿌리내리도록 한 것도 모두 여기서 장사를 하는 주인들의 끈질긴 지혜 덕분 아닐까? 토착화라는 것 속에는 불경하거나 성스럽지 못한 기원이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개항장 일대의 적산가옥을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도 아둔한 짓이요, 이제 한갓지게 이 거리를 즐기는 것 또한 기박한 역사를 넘겨낸 서민들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과거의 향수를 못 버리고 이 거리를 가지고 옛 시절을 추수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가소로운 것일 테다. 버티고 그 안에서 무슨 수를 내가면서 주점을 운영하고 메뉴를 변형시킨 이곳 상인들의 지혜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맛이 있어 더욱 매력적이지 않은가. 김소운의 수필이 제아무리 일본을 공격하는 내용이라고 한들 지식인으로서 일제에 부역한 자격지심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꾸밈없이 시간을 재료 삼아 변주를 가하는 음식들과 이것을 내주는 주인들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내가 이 거리와 이 거리의 음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에 대한 추수가 아니라, 그 복잡하고 미묘한 우리의 사정을 맵짠 간기로 깊숙이 빨아들인 맛 때문일 것이다. 굳이 쇠힘줄탕이라 순화시키지 않아도, 우리 앞에 놓인 스지탕 한 그릇은 누대 이 골목 한국 사람들의 삶이 응축되어있는 그런 맛이 아닐는지……

스지탕
      스지탕
스지탕
스지탕
스지탕과 함박 스텍
      스지탕과 함박 스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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