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박은관 ㈜시몬느 회장
- 이현식 / 문학평론가
‘박은관 문학상’을 아시나요
혹시 박은관 문학상을 아시는가? 이상 문학상이나 동인 문학상은 들어봤어도 박은관 문학상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2024년 올해 2회밖에 수상자를 내지 않았으니 그 연조가 깊지 않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은관 문학상은 한국의 수많은 문학상 가운데 가장 독특하면서도 문학상 본연의 인문학적 정신에 충실한 상이다.
다른 문학상이 문학작품이라는 결과물만 놓고 상을 수여하는데 비해 박은관 문학상은 과정과 결과를 모두 따져,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 과정의 노력을 응원하면서 동시에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상이다. 우선 문학상을 수여하는 부문은 장편소설인데, 선정은 최종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될 원고의 일부와 시놉시스(구성과 줄거리), 창작 계획만 보고 선정한다. 선정되면 계약금 3,000만 원을 지급하고 최장 2년 기한으로 창작 지원금 5,000만 원을 작가에게 후원하며 최종 원고가 완성된 이후 심사를 거쳐 2,000만 원을 추가로 수여한다. 그러니까 총상금은 1억 원에 이르지만 이를 지급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아이디어와 가능성에 3,000만 원, 창작과정에 5,000만 원, 최종 결과물에 2,000만 원을 각각 나누어 주는 것이다.
더구나 최종 원고에 대해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것을 보장하는 지원금과 해외 진출을 위한 번역 지원금까지 후원하는 매우 독특한 시상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문학의 국제화를 중요시한 까닭에 최고 번역가를 선정해서 번역을 맡긴다. 여기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 박은관 문학상이다. ‘박은관’ 문학상이라는 이름은 이 비용을 박은관이라는 사업가가 모두 지원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인문학 후원자이자 핸드백 기업가
조금 더 살펴보자. 박은관에게는 ‘인문학 후원자’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는 30년 넘게 한독번역연구소를 후원하면서 ‘시몬느 번역상’을 제정했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의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 건물을 그가 주도하여 2024년 7월 완공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거의 100억 원이 들어가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그가 지원했다. 17년간 지원해온 노력이 올해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가 문화와 예술 여러 영역에 조금씩 후원한 건 부지기수이다. 지금도 그가 운영하는 회사 건물 곳곳에는 상당한 수량의 미술 작품들이 디스플레이되어있다. 작품을 구매함으로써 미술가들을 후원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사회 회장도 맡고 있다.
이쯤 되면 그가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대기업의 총수이거나 아니면 그와 연관된 가문의 일원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핸드백을 만드는 회사의 대표일 따름이다. 필자도 박은관이라는 이름과 그가 핸드백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라는 말만 처음 들었을 때는 핸드백을 만들면서 어떻게 이런 정도의 후원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 의아해 했었다. 정말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인문학 분야에 기부를 하는 독특하면서도 훌륭한 분이겠거니 하는 짐작만 했었다. 통념적인 핸드백 회사 치고 기부의 규모가 예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보면 잘못된 편견이었지만, 한국에서 사양 산업으로 보이는 핸드백 회사가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는 선입견이 있었던 까닭이다.
핸드백으로 세계를 제패한 강소기업 ‘시몬느’
그러나 ㈜시몬느를 창업한 박은관 회장의 핸드백 회사는 그냥 일반적인 핸드백 회사가 아니었다. ‘시몬느’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세계적인 굴지의 명품 핸드백을 만드는 곳이다. 코치, 마크제이콥스, 도나카란뉴욕(DKNY), 랄프로렌, 토리버치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핸드백을 만드는 곳이 ‘시몬느’이다. 전 세계 명품 시장에서 유통되는 핸드백의 10%가 시몬느에서 만든 것이다. 미국 명품 핸드백 시장을 기준으로 하면 30%가 넘는다고 한다. 핸드백 매출로만 1조가 넘는 성과를 달성하는데 이는 매출액 기준이고 시몬느가 만든 핸드백의 실제 유통 가격을 따지면 8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매년 전 세계에서 팔리는 핸드백 시장에서 8조 원 가량을 ‘시몬느’가 만든 제품이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특기할 것은 이 제품을 OEM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ODM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OEM은 주문자가 디자인, 재질, 제작 노하우를 갖고 단순히 가공만 해서 납품하는 것이라면 ODM은 주문자가 아닌 제작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만든 이후 주문자에게 납품하는 방식이라 디자인, 재질, 제작 공정 등을 모두 제작사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즉 콘텐츠와 기술이 제작사에게 있는 게 ODM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주문자와의 협상에서 ODM은 제작사에게 더 많은 권한이 갈 수밖에 없다. 시몬느는 핸드백과 관련해서는 세계 탑 수준의 디자인 기술과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일등 기업이다. 지금도 25만 개가 넘는 핸드백 패턴과 디자인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본사 직원이 약 400명인데 이들이 그동안 핸드백을 만든 경력을 모두 합치면 6,500년이나 된다고 하니,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기 어려운 세계적 강소기업(强小企業)인 셈이다.
인천에서 꿈을 키우다
이런 세계적인 핸드백 회사 시몬느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군 기업가 박은관은 인천 사람이다. 그는 1955년 생으로 인천교대 부속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를 18회로 졸업했다. 원래 17회로 입학했지만 몸이 아파 학교를 하루도 못 다니고 휴학해 18회로 졸업했다.
그는 인천에서 최대 규모의 수산업을 하던 ‘황해수산’의 아들로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 선친은 ‘황해수산’으로 당시 인천의 수산업계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을 겸하는 인천의 대표적인 해양기업이었다. 이런 가정에서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기에 그는 구김살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집안에 신발이 많아야 된다며 친구들을 아낌없이 불러 언제나 어울려 놀게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된 것도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덕이 크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인천 북성동 옛 적산 가옥 2층은 그의 놀이터이자 꿈의 공간이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그는 관심있는 분야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커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기잡이에 나섰고 근해가 아닌 먼 바다에 나갈 때면 다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기곤 했다.
한편 그가 진학한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는 초대(初代) 길영희 교장의 가르침을 받들어 양심과 학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곳이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이 학교에서 원칙을 지키는 삶을 몸으로 배웠다. 무감독고사를 보면서 낙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선생님들은 그 친구들에게 “너희는 양심을 지킨 민족의 소금”이니 기죽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 광경이 어린 박은관에게 원칙을 지키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학생 박은관은 운동을 좋아해 ‘SMSC’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야구와 축구를 즐겼다. SMSC는 Sunday Morning Sports Club의 약자로 제물포고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일종의 체육 동아리였다. 대학입시를 앞 둔 고3 2학기 때를 제외하고 그는 이 스포츠 클럽에서 일요일이면 언제나 야구와 축구를 즐겼다. 나이 50이 넘어 어깨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그에게 야구는 고교 시절 때부터 가장 즐겨온 운동이었다.
그가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로 진로를 결정한 것 역시 가정환경과 청소년기의 교양적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과 윤동주 시인을 배출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의 전통은 자유로우면서도 인문적 가치를 존중하는 학풍을 가진 곳이었다. 그 역시 대학 학창시절 머리보다는 가슴이 뜨거운 청춘시절을 보냈다. 서구의 기독교 전통이 강한 대학의 학풍,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경험한 바다에 대한 기억, 서구의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외국에 대한 동경을 갖도록 만들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가업을 곧바로 잇기보다는 무역 회사에 취직해서 그 명분으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돌아다녀 보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두 형들처럼 부친 사업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첫 사회생활을 밑바닥부터 해보고 싶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님께 ‘딱 3년만 다른 곳에서 일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취직 자리를 알아봤습니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도 싶었죠. 당시는 쉽게 외국을 나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무역회사에 들어가야 그나마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죠. 3년만 일할 생각에 일부러 중소 무역회사에 들어갔어요. 봉제 수출 무역 회사였는데 그 회사 주 아이템이 핸드백이었습니다.” 박 회장은 3년만 다니겠다고 약속한 직장에서 7년을 근무했다. 무엇보다 일이 신나고 재미있었다. 일 년 만에 대리를 단 그는 4년 만에 부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가 만 29세 때 일이었다. 그는 일 년 중 절반을 이탈리아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처음 가보고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서울경제 인터뷰 기사, 2016.1.15.)
그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자신감을 얻었다. 외국의 유명 봉제 기업에 가보고 느낀 것은 우리도 저들에게 뒤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이 엿보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주눅들지 않게 성장한 그의 대범함이나 자유로운 도전 정신이 그를 마침내 세계 굴지의 핸드백 회사를 키우게 만든 것이다.
핸드백 용어사전과 핸드백 박물관을 만들다
그가 핸드백 회사를 운영하면서 보통의 기업가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은 600페이지 분량의 핸드백 용어사전을 만든 일에서도 알 수 있다. 핸드백 제조업계는 당시에도 일본어 용어 투성이였다. 지금도 출판이나 건설, 철도, 법조계에 일본식 한자가 우리도 모르는 채로 사용되고 있는데 핸드백 제조 분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몬느가 베트남이나 중국에 공장을 세워 핸드백을 만들 때도 일본어가 쓰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아 핸드백 용어 사전 편찬에 나섰다. 핸드백의 종류, 부위, 기술, 기계, 자재, 가죽, 원단, 장식, 기타 부자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용어를 바르고 고운 우리말로 만드는 작업에 나섰다. 장장 3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이뤄낸 성과였다. 이 사전을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캄보디아어로 번역해 각국에 제공했다. 이 책 덕에 핸드백 제작 관련 용어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한국어로 통일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박은관이라는 인문적 교양이 바탕이 된 기업가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기 어려웠을 일이다.
2003년 그는 국내 최초로 오피스 캠퍼스 개념을 도입해 의왕에 시몬느 본사 건물을 지었다. 이곳에는 디자인실과 개발실, 경영 부서가 입주해 있는데 넓은 공원처럼 조성된 부지에 마치 갤러리처럼 건물 설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이 언제나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층에는 테라스와 정원이 있다. 하늘을 바라보는 공간도 곳곳에 있다. 로비는 물론 회의실이나 화장실조차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벽에는 그가 모아온 미술작품들이 디스플레이되어 있고 널직한 로비에서는 공연도 개최된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2012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세계에서 유일한 핸드백 박물관 <백 스테이지(BAGSTAGE)>를 개관했다. 도산공원에는 플래그십 스토어 0914를 열었다. 플래그십 스토어란 브랜드의 주력이 되는 매장이라는 뜻으로 주요 상점가에 위치하면서 해당 브랜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곳을 뜻한다.
그런데 ‘시몬느’라는 기업의 이름도 플래그십 스토어인 ‘0914’라는 이름도 모두 그의 아내와 관련된 사연이 있는 이름이다. ‘시몬느’는 그가 대학 시절부터 사귀어왔던 아내를 부른 애칭에서 따온 것이고 ‘0914’는 연애가 실패해 연인과 헤어지고 몇 년 만에 우연히 다시 그 연인과 재회해 결혼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재회의 날을 기념해 붙인 것이다. 아내 역시 인천 사람이다. 인일여고를 나와 이화여대를 다녔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고 지금도 아내는 그에게 최대의 조언자이자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천에 조각공원을 세우고 핸드백 박물관을 새로 짓다
박은관 회장은 2024년 7월 인천시를 방문해 유정복 시장과 핵석 조각공원 및 핸드백 박물관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핵석은 풍화와 침식 과정을 거쳐 둥근 모양으로 바뀐 화강암을 일컫는데 박은관 회장의 고교 동기인 김창곤 조각가가 이들 핵석을 이용해 만들어낸 거대한 조각 작품을 공원에 전시할 예정이다. 핸드백 박물관은 현재 서울 가로수길에 있는 박물관을 옮겨온다. 중세부터 현재까지 핸드백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박물관이 송도에서 재개관하게 되는 것이다. 인천시가 송도 6•8공구 아이넥스(INEX) 조성사업 지구 내 문화공원 예정지에 핵석조각공원과 핸드백 박물관을 조성할 예정인데 비용은 박은관 회장이 모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은관 회장은 인천을 생각하면 언제나 인천역 옆 부둣가와 바다, 그리고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던 북성동 집과 갯내음이 생각난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막막한 바다에 나가면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미미함, 그리고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이런 경험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초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유로우면서도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는 게 체질화된 것처럼 보인다.
핸드백과 거의 한평생을 같이한 그에게 핸드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으로 정의하겠냐는 물음에 “핸드백은 ‘허스토리’입니다. 히스토리(history)가 남자들의 이야기라면 핸드백은 ‘herstory’, 즉 여성들의 삶과 눈물과 기쁨의 이야기가 모두 담긴 존재인 거죠”라고, 생각지도 못한 철학적 답변을 내놓는다. 준비되지 않은 질문이었고 답변 역시 준비되지 않은 채 자연스레 대화하듯 나온 것이었다. 그의 삶이 그랬기에 그의 답에는 그 만큼의 무게가 실려있었다. 갤러리 같은 회사를 나오자 무더운 여름을 배웅하는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