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동마다 한 개씩 있는 주민자치센터에 가보면 늘 주차하기가 힘듭니다. 워낙 몇 대 주차하지 못할 정도로 좁은 주차장이긴 합니다. 그런데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어김없이 장애인주차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갈 때마다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방문객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짜증 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고 간절한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분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을 때 비어있는 그곳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실 장애와 비장애는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위해 비워두는 것이 배려이고 인격입니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고 있는데, 마치 저를 보는 듯해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입니다. 창밖을 응시하던 중년 사내가 돌연 “여보, 저 들판이 온통 초록빛이네?”라고 외쳤습니다.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습니다.
“맞아요. 제대로 봤네요, 여보.”
“우와, 태양은 불덩어리 같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은 파랗고…….”
승객들은 그 사내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승객 하나가 오더니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아줌마, 남편 좀 병원 데려가세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순간 기차 안은 어색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모두들 사내의 아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해했습니다. 한 승객은 딱하다는 듯이 “맞아, 맞아. 정상이 아니야”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이런 시선을 예상했다는 듯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은요. 제 남편은 어린 시절에 사고로 시력을 잃었어요. 최근에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받았고, 오늘 퇴원하는 길이에요. 이 세상 모든 풍경이, 풀 한 포기가, 햇살 한 줌이 남편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픈 사연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그런 사연을 말해줄 수는 없을 테고, 누구나 그리고 아무 때나 그 사람의 사정을 들어줄 수도 없을 겁니다. 어쩌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겠지요.
승객으로서는, 지하철은 공공이 이용하는 장소니까, 예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저 남자가 큰 소리로 떠든다, 그러니 내가 가서 지적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을 듣고 난 뒤에 그 승객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생각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 사내가 계속 그렇게 큰소리로 외쳐도 이젠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처음 그 남자를 보았을 때의 불편함은 이미 사라졌고, 그 대신 있었지만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하늘과 풀과 구름을 그 사내처럼 한 번쯤은 쳐다보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채 외면하며 살아온 자신들을 반성했을지도 모릅니다.
평상시 우리가 하는 판단은 대부분 사실과는 다릅니다. 어떤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옳고 그름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고, 옳다고 여기면 그것에 어울리는 주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어울리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물론 틀린 것이라고 여기면 그것 역시 그 판단에 따른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어떤 사실을 판단하기 전에 그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조금 더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찰하면 그 상황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이해가 되면 그 사람이나 그 상황을 귀하게 여길 수가 있으니까요. 이것이 공감이고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