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자동차 1호 '시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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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자동차 1호 '시발'의 탄생
  • 박병일
  • 승인 2012.04.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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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과 6.25사변을 겪고 난 우리나라 자동차는 폐허의 위기를 맞아 그야말로 도시나 지방의 자동차 교통은 전멸상태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나자 다행히 유엔군들이 전장에서 쓰던 군용폐차가 쏟아져 나와 폐허였던 우리나라 자동차 교통이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때부터 군용폐차 재생시대를 걷게 되었고 트럭이나 버스는 대부분 미군의 GMC 트럭을 개조한 것이었다.

자가용 역시 귀해 미군이 불하한 폐차지프를 재생시켜 드럼통을 펴서 만든 상자형 차체를 씌워 타고 다녔으나 이것도 정부고관 아니면 부자들 또는 인기 연예인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차축 등 뼈대만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의 첫 국산차 시발을 1955년에 내놓았다.

비록 지프를 닮았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차는 부속품의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다.  처음에는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 걸렸던 시발값은 8만환이었으나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7년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던 광복 12주년 기념 산업박랍회에 출품하여 큰 인기를 끌어 뜻하지 않게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아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시발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공장 앞에는 시발을 서로 먼저 사가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대통령상을 받은 후 한 달도 못되어 1억환의 계약금이 들어와 공장을 사고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생산능력이 계약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시발투기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는 ‘시발계’까지 유행하여 프리미엄을 얹어 전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공장 확장과 새로운 차 개발에 과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정부가 약속했던 보조자금이 5.16혁명으로 중단된 데다가 1962년 ‘새나라’라는 산뜻한 일제 승용차가 대량 쏟아져 나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국산차는 1963년까지 총 3천대 남짓 만들어 내고는 문을 닫았으나 전후 황폐했던 우리 자동차 교통 재건에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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