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체육의 산실'…그러나 옛 추억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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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체육의 산실'…그러나 옛 추억일 뿐
  • 김도연
  • 승인 2010.04.13 1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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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⑧ 중구 도원동


취재 : 김도연 기자
 
인천시 중구 도원(桃源)동. 중구에서 율목동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이곳은 사라져간, 그리고 사라져 가고 있는 추억들이 담긴 동네이다.
 
도원동의 면적은 0.27㎢로 중구 전체 면적의 0.32%에 불과하다. 인구는 2천313세대 5천454명이며 광성중고등학교가 있는 도원산을 중심으로 원뿔형 지형에 동네가 형성돼 있다.
 
특별한 문화유적이나 관광명소라고 할 만한 곳도 없는 저소득 다세대 주택 밀집지역으로, 광성중고등학교와 중앙여상 등의 학교시설과 실내체육관·실내수영장 등의 체육시설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학교와 체육시설 부지의 합은 도원동 전체 면적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다.
 
복숭아밭이 있던 작은 동네
 

멀리 보이는 광성중고등학교가 위치한 곳은 과거 도원산이라 불렸다.
 
도원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와 독각리에 들어 있던 곳이다. 장천리와 독각리는 지금의 남구 숭의동 지역을 중심으로 두었다. 1906년 이 두 곳에서 일부를 떼어 붙여 도산리라는 동네가 새로 생겼고, 이것이 광복 뒤에 도원동으로 됐다.

'도산'이나 '도원'은 모두 이곳에 복숭아밭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하지만 일제가 도산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복숭아밭 때문이 아니었다. 도산리는 일본인들이 기리는 '도산시대', 곧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 복숭아밭이 일부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긴 해도, 동네 이름은 이처럼 다른 이유에서 생겼다.

그런데도 광복 후에 일본식 동네이름을 바로 잡을 때 도산을 그대로 본 따서 도원동이라 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제잔재가 오늘날 이름에까지 그대로 간직된 셈이다.
 
1950년대 도원동 '모모산'(주민들은 일본말 '복숭아-모모'를 그냥 그렇게 불렀다. 현 실내수영장) 기슭에는 판자촌 동네가 있었다. 이 곳에는 인천에서 '주먹'으로 명성을 날리던 일명 골목대장이 살았다. 어깨가 넓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똑바로 못가고 옆으로 게걸음 걷듯 걸어 들어가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골목대장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모모산'에 뛰어올라가 체력을 단련하며 근육을 과시했다.

또 1929년 '모모산'에 있던 보각사라는 절의 방 한 칸에 '관서학원'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생겨 성냥공장에 다니던 여공 3명이 첫 학생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송림동에 있는 동명초등학교의 효시다.

아울러 도원동에 있던 야구장(현재 재개발 진행 중) 시립야구장은 1920년대부터 이어진 '야구의 고장 인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920년대 일제는 자유공원 아래 제물포고교 자리인 '웃터골'에 공설운동장을 세웠다. 이 운동장이 생기자 인천에서 서울 배재학당, 중앙고보 등으로 통학하던 '경인기차 통학생 친목회'가 야구팀 '한용단'을 만들었다. 한용단의 단장은 훗날 1950년대 민주당정권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씨였다.
 
인천 체육의 모태인 한용단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많아 자주 일본팀을 누르며 억눌린 민족의식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야구 경기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일제 치하에서 마음 놓고 한국이 이기라고 소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인 심판이 판정을 잘못하면 곽상훈 단장이 뛰어나가 심판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대단한 일이었다. 이 때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야구 시합이 있는 날이면 야구를 보려고 관중들이 '모모산' 언덕에 새까맣게 모여들어 관람을 했다. 당시 야구장은 스탠드가 낮아 '모모산'에서 내려다보기 수월했다.

이렇듯 야구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는 지금의 프로 야구 못지않았다.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운동장 밖에서 두 민족 사이의 대결이 벌어져 일본 경찰이 출동해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한용단에서 비롯된 '인천야구'는 1934년 웃터골 공설운동장이 도원동으로 옮겨온 뒤로도 계속 맥을 이었고,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팀이 번갈아가며 한동안 전국대회를 휩쓸고 그 저력을 과시하곤 했다.
 
 
도원동에서 태어나 자란 최형식(76) 할아버지는 "지금은 한 그루도 안 보이지만, 광성중고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꼭대기와 실내수영장 주변까지 복숭아나무 천지였다"고 말했다.
 
도원동이란 이름의 탄생을 짐작케 하는 추억이다.
 
도원산(모모산)과 도원 뱃마당

 
'70계단' 공원 꼭대기에서 바라본 도원동. 과거 도원 뱃마당이라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광성중고등학교 아래 도원동 주민자치센터가 위치한 '70계단' 공원 윗자락에 살고 있다. 높이가 고작 50여 m에 불과해 산이라고 말하기에는 쑥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예전에는 배다리 쪽이나 도원역 맞은편인 숭의동 지역에서 바라보면 꽤 높은 지형이어서 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원산의 정상에는 광성중고등학교와 시립 실내체육관이 있지만, 최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군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도산정산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최 할아버지는 "왜정 때 일본군 부대가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한 때 미군들이 있었다"며 "광성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 전에는 포부대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마도 대공포 부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군부대는 지금 자취를 감춰 도원산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지금은 광성중고등학교 건물과 운동장 바로 아래에 4~5층짜리 빌라 건물들이 빼곡히 자리잡아 고지대 빌라촌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도원동 주민자치센터 건물 앞쪽으로는 예전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도원동 지역에서 가장 넓다고 할 수 있는 '70계단' 공원이 있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공원의 대여섯 배 이상 되는 '도원 뱃마당'이란 넓은 공터가 있었다.
 
최형식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도원 뱃마당에서 짬뽕 놀이를 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예전 수인역 앞 바닷가가 이곳에서 멀지 않아 뱃마당이란 이름이 붙여진 듯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엔 촘촘히 들어선 빌라와 상가 건물로 공터의 흔적은 찾아볼 길 없다.
 
철공소, 목공소 거리
 

유동사거리에서 도원사거리 구간에는 예전방식으로
철기구를 만드는 철공소 거리가 형성돼 있다.
 
현재 도원역이 위치한 언덕, 도원고개를 전에는 황굴고개라고 불렀다. '황굴'은 '크다'는 뜻의 순 우리말 '한'과 골짜기 또는 마을 등을 뜻하는 '골'이 합쳐진 '한골'이 발음상 변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도원동의 특화거리라 할 수 있는 철공소와 목공소 거리가 있다.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앞 유동삼거리에서부터 도원역 앞 도원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에 위치한 '철공소 거리'는 요즘은 보기 드문 대장장이들의 화로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율목동에서 이어진 이 거리에는 60여 곳에 이르는 철공소, 주방기구 판매점, 보일러 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기계화했지만, 아직도 이곳 철공소에서는 호미나 낫은 물론이고 곡괭이, 망치, 칼 등을 예전 방식처럼 작은 화로에서 달군 철을 두드려 만들고 있다.
 
한 때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철공소 거리였지만 지금은 그 기운이 많이 떨어진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수십 년간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일용(61) 인해공업사 사장은 "경인철도가 복복선으로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찾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기 텃밭을 갖고 가꾸는 사람들이 가끔 찾는 정도"라고 말했다.
 
이곳 황굴상가번영회 심영섭 회장 역시 "예전에는 서울에서도 철제 제품을 만들어 갈 정도로 번창했지만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도원사거리에서 숭의시장사거리 구간에는 목공소 거리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은 곧 철거된다.
 
언덕을 넘어 도원사거리에서 숭의시장사거리에 이르는 곳은 '목공소 거리'이다. 문이나 창문 등 목재로 만들어진 제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이 곳 역시 한 때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2대에 걸쳐 이곳에서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지석(49) 건설목공소 사장은 "자가용 시대가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문이 많아 문짝 하나 배달하기 위해 용달차를 부르면 서비스로 그때만 해도 귀했던 각티슈를 선물받았다"며 "남들은 두루마리 휴지를 쓸 때 우리는 각티슈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사용했을 정도로 일이 잘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많은 업체들이 떠나 10여 곳의 목공소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이들 업체 역시 재개발로 인해 곧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 결국 목공소 거리는 역사 속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아뭏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1일 이곳은 '도원동'으로 개칭됐다. 1957년 1월 1일부로 인천시 도원동으로 행정명이 변경됐으며, 1968년 1월 1일 인천시 중구 도원동으로 행정구역이 정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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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2015-06-06 05:53:21
완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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