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평범한 우리들의 영웅
상태바
[여성칼럼] 평범한 우리들의 영웅
  • 공주형
  • 승인 2012.12.30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주형/미술평론가 인천대 초빙교수
2012년 12월 프랑스의 퐁텐블로 성에서 경매가 개최되었습니다. 관심의 대상은 숫자 암호 편지이었습니다. “10월 22일 오전 3시에 크렘린을 폭파하라.” 편지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편지를 낙찰 받으려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수집가들의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서신은 예상가의 10 배를 훌쩍 뛰어 넘는 18만7500유로(2억6400만원 상당)에 낙찰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은 편지 내용의 기록적 가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신의 작성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편지에 ‘나프(Nap)'라 서명한 장본인은 ’전쟁 영웅‘,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다비드,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1801.jpg

다비드,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1801
 
특별한 편지를 소식을 접한 순간 자연스럽게 그림 한 점을 떠올렸습니다.〈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으로 불리기도 하는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이었지요. 과연 그림 속 나폴레옹은 영웅답게 위풍당당한 모습입니다.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는 그림은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화가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알프스를 넘을 당시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지도, 선봉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하지도 않았답니다. 농부가 이끄는 노새를 타고, 부대의 후위에서 알프스를 넘었다지요.
 
18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했던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거장이었습니다. 미술을 통한 시민의 교화를 꿈꾸었었지요. 따라서 그의 캔버스는 사실이 기록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의 붓은 그림 앞에 선 관객들이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의식 있는 일원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움직였지요. 영웅, 순교자, 희생자 등.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가 필요했던 것은 이상화된 존재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나폴레옹을 그릴 당시 노새보다는 백마가, 전투의 후위보다는 선두가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에 설득력을 더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핍과 단점을 지워 버린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비드의 그림들은 ‘권력의 정당화에 붓을 사용한 화가’라는 오명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과 별개로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은 ‘뛰어난 지혜와 재능 그리고 용맹함으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 낸 사람’이라는 영웅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의 미공개 편지와〈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그리고 영웅이라는 단어 사이를 오갈 무렵이었지요. 다비드 그림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기도 한, 흐트러짐 없이 독배를 들이키는 소크라테스나 공화정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아들의 사형을 명한 브루투스가 떠올라야 마땅했습니다. 친정 엄마, 경비아저씨, 한 남학생. 그런데 정작 제 머리 속은 의외의 인물들로 꽉 찼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할만한 순간을 만든 영웅들의 행간에서 느닷없이 왜 이분들이 떠올랐을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올 한 해 제 삶은 빛나는 업적도 뚜렷한 성취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잘 것 없는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위기를 넘겨야 했지요. 패배를 인정해야 했던 순간 권해졌던 따끈한 밥상, 무거움과 난감함이 함께 했던 상황 마술처럼 열리고는 했던 아파트 현관문, 추위를 참으며 강행해야 했던 여섯 시간 강의 중간에 건네졌던 손난로.
 
또 패배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갈 용기, 다시 버거움을 견뎌보고자 하는 시도,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 또한 없었겠지요. 이 모든 것들이 없었다면요. ‘불가능’만 가득했던 사전을 들고 살았던 한 해를 마감하며 미소 짓습니다. 강력한 초능력도 없고, 특별한 코스튬도 없이 ‘짠~’하고 제 앞에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평범한 영웅들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