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활동가의 늦은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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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활동가의 늦은 결혼식
  • 양진채
  • 승인 2013.03.03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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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양진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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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신념이, 운동과 운동이,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결합한 결혼식입니다.”
주례사는 주례의 첫마디를 그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운동과 신념이라니. 지금은 2013년이지 않은가. 운동이니 신념이니 하는 말은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오면서 어느새 사라진 말이 아니던가.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식장 안은 많은 하객들로 꽉 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봤고,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주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대부분 예식장에 가자마자 축의금 봉투만 내밀고 식당으로 가는 경우와 많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는 적지 않은 나이, 쉰 살을 오가는 나이였다.
1980년대 격변기에 스무 살 청춘을 보냈다. 누구도 시대의 요구에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였다. 많은 청년들이 시대의 모순과 마주했고, 전태일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뛰쳐나와 공장으로 향했다. 사회민주화와 민주노조 건설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싸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때 ‘동지’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던 청년들은 지쳐갔다. 어떤 이는 정치권으로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고, 누구는 유명 학원 강사가 되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청년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편안한 삶에 안주했다.
어느 때인가, 여배우가 활짝 웃으며 ‘부자되세요’ 하는 광고를 어리둥절하게 본 적이 있었다. 나도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치 기준에 돈이 우선시 되지는 않았다. 내 나이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장래 희망에 ‘사장님’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사회적 소명이 사라진 자리에 너도나도 부동산 투자 열풍이 불었고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되었다. 신년인사로 부자 되라는 인사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몰가치 시대였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었다.
그는 달랐다. 그는 삶이 신념과 분리되지 않았다. 노조민주화를 위해서, 각 단위 조합원의 교육을 위해서, 조직화를 위해서, 비정규직문제를 위해서 앞장섰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오랫동안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을 해온 사람도 드물었다. 그랬기에 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이 되었다. 늦은 나이였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길었다. 신부인 그녀 역시 같은 길을 걸어 온 사람이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고마움이 더 컸다. 그들이 최소한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살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을 더했다.
그는 결혼식을 앞두고 밥을 먹는 자리에서 장남이면서 집안의 장남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이 대신 장남 노릇을 한 이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의 동생은 지금 내 남편이다. 나를 남편과 만나게 한 이는 그이다. 그는 내 아주버님인 것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나로서는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눈시울이 자주 뜨거워졌다. 삶과 운동이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슴은 오랫동안 이성을 향해 열리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한 여인을 사랑하고, 고백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리며 그녀에게 향할 때, 그에게 그런 눈빛이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사랑을 하면 저리 얼굴이 변하는구나 싶었다. 자주 그의 따뜻한 눈빛을 보게 되었다. 봄날의 아지랑이 같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결혼식을 축복해준 데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그 길이 편치 않은 길임에도 묵묵히 남을 위해 걸어왔던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추운데 남녘의 매화소식이 들린다. 복수초 피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아직은 추운 날 거친 가지를 뚫고 향 짙은 꽃을 피운 매화나, 얼음을 뚫고 노란꽃을 피운 복수초를 볼 때마다 경이를 느낀다. 앞으로 두 사람의 삶이 몰가치 시대의 새로운 지표로 사랑과 행복을 함께 나누면서, 많은 이들에게 경이를 안겨주며 살아가길 진심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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