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봄, 슬픔의 봄 - 릴리언과 심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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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 슬픔의 봄 - 릴리언과 심프슨
  • 황명숙
  • 승인 2013.03.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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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황명숙 /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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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봄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이라는 계절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이미지가 있지만 클래식 음악에서 봄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찾는다면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떠오르고 차이콥스키의 3월인 ‘종달새의 노래’와 하이든의 ‘종달새’,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가 떠 오른다. 그리고 그런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 선율은 생명과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가져온다.
지난 3월10일 별세한 ‘33년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인 스웨덴의 릴리언 데이비스 왕자빈과 그녀와 너무나 닮은 점이 많은 영국 윈저공의 부인인 심프슨 부인을 새로운 봄과 함께 그녀들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1915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난 릴리언은 1943년 베르틸 왕자와 만났을 당시 이미 배우 이반 크레이그와 결혼한 모델겸 배우였으며 병원 봉사 활동 중 런던 주재 스웨덴 대사관의 해군 무관이던 베르틸 왕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릴리언은 2차 세계대전 중 전장을 떠돌던 남편 크레이그가 다른 여성을 만나면서 1945년에 자연스럽게 이혼했다. 하지만 베르틸의 부친인 구스타브 6제는 왕자와 평민 이혼녀간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헤어질 수 없었던 이들은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왕실의 결혼 승인을 받은 것은 1976년, 베르틸 왕자의 조카인 현 국왕 카를 구스타브 16세에 의해서 공식 혼인이 성사되었다. 무려 33년을 기다린 결과였고 두 사람 모두 60대가 되어서 부부로 인정받게 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희생과 헌신을 보여준 두 사람에게 스웨덴 국민들은 찬사를 보냈으며 특히 평민 릴리언과의 로맨스를 위해 왕위마저 내던진 베르틸 왕자는 ‘프린스 차밍’으로 불리었으며 왕자는 1997년 85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릴리언은 지난 3월 10일 9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937년 6월3일 프랑스 투르 근교의 샤토드캉데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그러나 하객은 16명뿐인 쓸쓸한 결혼식이었다. 신랑의 가족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신부는 순백의 드레스 대신 푸른색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영국 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치러진 이 결혼의 당사자는 이번이 세 번째 결혼식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그녀를 위해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8세였다. 1936년 12월 11일 밤 대영제국의 왕 에드워드 8세는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발표를 했다. 발표의 요지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국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보수적인 영국 국민과 전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미국인으로 귀족신분도 아니었고 이혼경력도 있는 그녀와 에드워드8세와의 사랑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왕위에 오른 11개월 동안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그의 편은 오로지 윈스턴 처칠 경 한 사람이었고 왕실과 영국수상이던 볼드윈과 영국의회 영국 국민 모두가 반대를 했다. 베시 윌리스 워필드 스펜서 심프슨 윈저 공작부인(Wallis Warfield Spencer Simpson,Duchess of Windsor)이 정식 이름인 심프슨부인은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했으며 해군 조종사 스펜서와 결혼했고 10년 만에 이혼 후 그 이듬해에 영국인 사업가 심프슨과 만나 결혼하고 영국 런던에 정착했고 이무렵 황태자이던 에드워드 8세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의 심프슨 부인은 처음에는 우정이었지만 그 사랑을 숨기지 못해 그녀는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8세도 영국전체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왕위를 버리고 심프슨 부인을 선택했고 1936년 퇴위하고 1937년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영국왕실은 철저히 그녀를 무시했고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 메리왕비(조지5세의 왕비)는 더욱 철저히 홀대를 했다. 이 결혼으로 영국왕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망명객이 되어서 영국 본토로 돌아가지 못했다. 심프슨 부인이 왕실가족으로 공식 행사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1967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은 35년간 해로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972년에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그로부터 14년 후인 1986년 90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는 에드워드 8세의 곁에 나란히 묻힐 수 있었는데 마침내 영국 왕실과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심프슨 블루의 옷으로 갈아 입혀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로맨스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유언이었다.
30년이 넘어서야 왕실의 결혼을 인정 받은 것도, 이혼경력도, 자녀가 없는 것도 미망인으로 10여년을 보낸 것도, 90세가 넘도록 장수 한 것도 스웨덴의 릴리언 왕자빈과 윈저공의 부인인 심프슨 공작부인과 공통점이다. 사랑을 위해 고귀한 왕위를 버렸지만 그들에게는 한결같은 믿음과 헌신이 있었기에 명성을 얻었다. 변치 않는 헌신과 희생으로 기억되는 한 그들에게는 버린 것도 잃은 것도 없다. 릴리언과 심프슨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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