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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4.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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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로 반세기를 걸어온 오경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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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환 신부는 은퇴 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피아노 연주와 노래하기를 취미로 즐기고 있다.
 
아프리카 기니에는 “노인 한 사람을 잃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격언이 있다.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어르신의 지혜가 도서관에 가득한 책 전체의 가치와 맞먹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지혜가 쌓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험과 끊임없는 성찰로 다져진 어르신을 마주할 때 그의 눈빛과 표정, 말투와 행동에서, 젊은 나이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세상의 지혜가 만들어지는 공식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올해로 사제수품 50년을 맞은 오경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자)를 만나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서 살아온 노(老) 사제의 지혜를 듣고 왔다.
▲ 오경환 신부 ⓒ한수진 기자
“나는 오래전에 (사제가 되기로) 결정을 했거든. 초등학교 6학년 때였으니까, 6.25가 일어나기 전이었지.”
오경환 신부의 가족은 경기도 안성 오씨 집성촌에서 유일한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다. 1927년에 세례를 받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오 신부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아세례를 받아 성당에 나갔다.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물론 독실한 어머니의 신심이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정작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아들이 없던 종갓집에서 오 신부를 양자로 들이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 시절에는 아들이 없는 큰 집에서 다른 형제나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일이 흔했다. 종갓집의 아들이 되면 제사를 맡아야 하는 대신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성당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결국 오 신부는 양자 제의를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소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신부가 되고 나서 한참 후에 어릴 적 본당 신부님을 만났어.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어머니와 소신학교 추천서를 받으러 그 신부님을 찾아왔었대. 그런데 뭘 물어봐도 내가 대답을 잘 안하고 우리 어머니가 대신 이야기를 하니까 추천서를 써주지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셨다 하더라고. 어머니가 끌고 온 게 아닌가 생각하셨던 거지.”
부르심은 ‘느낌’이 아니라 ‘능동적 결정’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기 어려운 나이였지만, 오 신부는 소신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매일 아침 미사와 묵상 시간에 끊임없이 ‘내가 정말 신부가 되려고 하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소신학교 전체가 밀양으로 피난을 갈 때도, 해가 거듭할수록 하나 둘 떠나가는 친구들의 짐을 싸주면서도 같은 질문은 계속됐다.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어.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하루 종일, 그리고 일생을 바쳐서 이어나가는 거지. 혼자 사는 것도 어릴 때는 까마득한 이야기였어. 내가 혼자 살 수 있을까? 내가 정말로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싶은 건가? 신학교 생활 내내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러한 고민 속에 어느 순간 ‘바로 이것이다’는 확신을 얻은 것일까?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느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결정한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란 거였다.
“사제가 되기까지 다들 다양한 과정을 거치지. 제일 중요한 건 ‘다른 그리스도’가 되겠다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나를 부르는 무슨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환상이야. 그건 오래가지 않아. 끝까지 가는 힘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야 해.”
 
50년 사제 생활의 원칙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존중하기, 화내지 않기
군 복무 2년을 포함해 14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친 오 신부는 1963년 12월 31일 사제품을 받아 인천교구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됐다. 매우 추웠던 한겨울 답동성당에서 열린 사제서품식의 기억을 더듬는 오 신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새내기 사제였을 때의 첫 마음이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특별한 설계”를 한 건 아니었고, 그저 충실하고 열심히 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제 생활 중에 터득한 삶의 원칙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나와 만난 사람이 헤어질 때 내가 자기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해.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존중하게 되어 있어. 사람은 억울하거나 무시당한 느낌을 잊어버리지 않거든.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어. 그러려고 노력해왔고. 그렇지 않으면 사제와 신자 사이에 문제가 생겨. 내가 그렇게 살면 아무도 나를 불편해하지 않을 거야.”
‘존중’과 더불어 다른 한 가지는 ‘화내지 않기’다. 화는 타인이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생겨나는데, 이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화가 나면 참기 어려우니 아예 화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가 나를 무시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으로 내가 작아지지는 않아. 나는 있던 그대로 있어. 그걸 꼭 믿어야해.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나를 치켜세워준다고 갑자기 내가 커지는 것도 아니잖아. 현실 그대로 나를 볼 줄 알아야해. 상대가 나를 무시했다고 화를 내면 결국 그 사람이 나를 조종하는 거야. 화가 나서 안할 말까지 해버리면 더 복잡해져. 그때야말로 내가 작아지는 거야. 사과를 해야 하고 후회도 생기고.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해야지 왜 작아지게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 부족했던 게 아쉽다”
얼핏 자기계발서나 힐링 서적에서 한번쯤 읽었음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깊은 묵상과 성찰 속에 얻은 깨달음이었기에 오 신부는 삶의 순간마다 자신의 원칙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50년간의 사제 생활에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오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친교를 맺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예수님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왔었는데 나한테는 그러지 않으니까. 내가 일부러 그들을 찾아갔어야 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들어. 내가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서 한두 사람이라도 정해놓고 찾아가고 도와주면 어떨까 생각은 해봤는데 실천은 못했어. 인천 경실련이나 사회정의시민행동에서 활동하는 것은 간접적인 일이잖아. 그러니 나는 안락하게만 살아온 셈이지.”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오 신부에게 예수가 어떤 모습인지를 묻자 제일 먼저 “어려운 사람이나 천한 대접을 받는 사람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라고 답했다. 오 신부는 평생 바라보았던 예수를 차근히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예수는 권력자와 부자들을 인간으로 대우할지언정 가까이 하지는 않았어. 또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개방적이어서 모든 사람을 감싸주었지.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세상이 구원될 거라 믿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는데 집중하는 사람이었어.”
‘일’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해
오 신부는 오랫동안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로 ‘기도’와 ‘영적 독서’를 꼽았다. 특히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도문을 읽을 때에는 정신을 집중해 정성껏 읽으라고 조언했다. 또, 다른 이들이 책으로 전하는 예수의 삶과 삶의 지침들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무를 수행하다보면 바쁠 때가 많아. 그러면 기도를 잘 하기가 어렵고 영적 독서와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게 쉽지 않지. 그래도 정신없이 일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기도하고 삶의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이 중요해.”
말을 끝내면서 오 신부는 서재로 들어가더니 책 두 권을 들고 나왔다. 앨버트 놀런 신부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와 <오늘의 예수>였다. 전자는 2천년 전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던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린 책이고, 후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예수의 관계를 설명한 책이다.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거야.”
기도문을 읽을 때는 정신을 집중하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라, 예수님에 대한 책을 읽어라. 결국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들에 충실하라는 뜻일 것이다.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려면 먼저 상대의 이야기에 정성껏 귀 기울여야 하듯이, 마라톤을 완주하고 싶으면 백 미터 달리기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쌈박한 기교나 숨겨진 비법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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