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말리고 기름은 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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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말리고 기름은 태워야 한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6.0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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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솥 주물' 주인장 오정신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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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솥 팔릴 시기는 지났다. 미니솥이라고도 하는 옹솥은 국이나 밥을 할 때 주로 쓴다. 사람들은 경기가 나쁘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는다. 솥 하나 없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옹솥이 많이 팔렸는데 올해는 뜸하다.” 동구 송림동에서 53년째 주물로 만든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다. 18살 때부터  ‘배다리 솥 주물’을 꾸려가는 오정신씨(71). 장사를 시작하고서 배다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그는 ‘한길’로 걸어오면서 ‘세상을 배웠다고 한다.’ 가게 안에 가득한 가마솥, 옹솥, 물솥, 밥솥, 난로, 화로, 절구, 차 덖는 솥, 아궁이문, 화덕, 고기 굽는 판 등등은 그에게는 자식처럼 소중하다.
 
 
-가마솥이 무척 무거워 보인다. 들고 옮기는 일이 많을 텐데 힘들지 않나.
“체력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침마다 대여섯 명이 월미도를 자전거로 몇 바퀴 달린다. 겨울에는 수영장을 다닌다. 지금은 무릎이 아파서 뛰지는 못하지만 젊었을 때는 철인3종 경기를 거뜬히 해냈다. 운동은 밥 먹는 것처럼 ‘삶의 종목’이다. 운동을 해서 이 큰 솥을 들을 수 있다. 몸이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다 무겁고 큰 물건이 많다.”

-배다리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됐고, 배다리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나.
“18세 때 일을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온 것 빼고 50년 정도 일했다. 가게는 서너 번 옮겼지만, 배다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동네는 바뀐 게 없다. 내가 18살 때 인천 인구가 22만명이었다. 신포시장과 여기가 인천의 중심지라 다방과 은행이 많았다. 강화, 김포, 소래, 시흥 사람들이 시장일 보러 이리로 왔다. 이제는 옛날 얘기다. 지금은 변두리가 됐다. 당시 여기 굴다리 밑에는 중앙시장이 아주 컸다. 배다리시장이라고도 하는 여기에는 개천가에서 보따리장사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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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본토박이는 몇 사람 없다. 지성소아과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들이 물려받았다. 한양지업사도 그렇고. 나는 경상도 황간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는 일제 때 인천항에서 ‘아라보시’로 일하다 한국전쟁 때 고향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외아들인 아버지를 불러 농사를 지으라고 불러들였다. 고향을 떠나 인천에 다시 온 건 4?19 나던 해다. 그때 내가 18살이었다. 그때 친척 할아버지가 솥을 팔고 있었는데, 연세가 있어 힘들다며 나한테 가게를 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낮에 실컷 놀다 밤에는 황간 집에 가고 싶어 울었다.”

-물건은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솥을 직접 만들진 못한다. 용광로가 있어야 해서 서울이나 인천 주변에서는 공장을 만들 수가 없다. 주변에 시커먼 매연이 나기 때문이다. 전라도 광주에 주물공장이 있어서 가져온다. 미처 만들지 못하면 중국서도 가져온다. 인천에 주물공단이 있지만 다 기계주물이다. 지난 3월에 중국 주물공장을 다녀왔다. 직접 보고 물건을 구입한다.”

-솥이 잘 팔리는 시절은 언제였고, 그렇지 못한 때는 언제인가.
“옛날에는 아들이 장가 들면 장롱은 없어도 가마솥, 옹솥, 밥솥, 물솥을 사줬다. 집집에 솥이 네 개씩 걸려 있었다. 사랑채에서 쇠죽을 쑤던 가마솥, 적은 식구가 국이나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옹솥, 밥 해 먹는 밥솥, 물을 데우는 물솥이 꼭 필요했다. 아들이 태어나면 9, 10세만 돼도 꼴망태 매고 일하러 다녔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서 여자들이 다 잘한다. 힘쓸 일이 그만큼 없어서다. 옛날에는 나무를 해서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나무 해야지 농사 지어야지… 아들이 필요했다.”

“70년대까지는 솥이 아주 잘 팔렸다. 우리 큰애가 1971년에 태어났는데, 솥이 많이 팔려서 집엘 가지 못했다. 둘째, 셋째 아이가 태어날 때도 바빠서 집에 못 갔다. 당시 여기 배다리시장은 아수라장처럼 늘 사람이 북적댔다. 시장 같았다. 80년대까지도 많이 팔렸다. 그러다 입식부엌이 생기면서 안 팔렸다. 연탄보일러, 석유보일러 등 보일러가 한두 집 생기기 시작해서 나무 땔 일이 없었다. 나무 때면 ‘불 냄새’ 나니까 주부들이 졸라대서 나무를 뜯어내고 보일러로 바꿨다.”

“박정희 정권 때 입산금지가 되면서 시골 부엌이 달라졌다. 나무를 때는 대신 곤로를 썼다. 주물공장이 다 없어졌다. 당시 다섯 군데 가게가 있었는데 나만 남았다. 그러다 산업화 바람이 불면서 함바집과 식당이 많아졌고, 설렁탕 곰탕을 끓이는 솥이 필요했다. 그때는 눈코 뜰새없이 가게가 잘됐다. 요즘에는 산업화가 시들하니까 사람들 일거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시골로 가는 사람이 솥을 사러 온다. 철물점이나 건재상, 그릇가게는 몇 개씩 갖다놓고 팔지만 나는 전문적으로 주물 물건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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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에 솥이 무척 많다. 특히 솥 종류가 있다면 어떻게 구분될까. 또 잘 팔리는 물건은 어떤 종류일까.
“지방마다 솥이 다르다. 부뚜막에 걸칠 수 있는 솥전이 네 개씩 나와 있는 솥은 강원도나 함경도 솥이다. 예전 <임꺽정> 드라마할 때 여기서 솥을 빌려갔다. 평북, 평남 솥은 솥전이 없다. 충청도 솥, 이북 솥, 전라도 솥이 다 다르다. 교통편이 어렵다 보니 각 지역별로 솥 모양이 나온 거다. 여기 솥들은 넘어지지 말라고 다 엎어놓은 거다. 우리 집에는 경상도 솥이 없다. 발이 있고, 전이 넓고, 위가 넓은 밥솥이다. 하지만 공장이 없어지고 있던 건 골동품으로 갖고 갔다. 지금 우리 가게에서 사라져 골동품으로 간 물건은 여럿이다. 우물펌프, 풍구, 쟁기, 써레, 탈곡기 팔랑개비, 가래가 없어졌다.”

“아궁이문은 예전에는 없었던 물건이다. 입산금지하고 나무 때지 말라고 해서 아궁이문은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 때는 걸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강원도 양양, 양구, 정선은 아침 저녁으로 아직 춥다. 그러다 보니 벽난로가 필요해졌고, 아궁이문이 필요한 거다. 도시에서는 나무를 때지 않아서 연탄 아궁이에 솥을 걸었다. 최근에는 벽난로 만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럴 때는 벽에 벽돌을 쌓아두고 문을 달면 온 집안이 따끈따끈 따뜻해진다. 괜히 돈을 많이 들여 멋있게만 만들 필요는 없다.”

“미니솥인 옹솥이 잘 팔리기도 했다. 지금은 불경기다. 사실 불경기는 여러 번 있었다. 지금 닥친 불경기는 깨어나지 않을 불경기다. 언젠가 공단이 생겨나면서 경기가 살아났고, 공장이 많아졌다. 공장 사람들 밥을 먹어야 하니까 솥이 필요했다. 세상 사는 건 리듬 타듯이 몇 년 잘 됐다가 몇 년 안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노점상이 많이 생기면서 튀김솥이 많이 팔렸다. 사람들이 식당을 너도나도 많이 하다가 안 되니까, 다 접고 전원생활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솥과 아궁이문을 사간다. 농촌 사람들은 무쇠로 만든 가마솥을 사지 않는다. 농사 짓느라 하루종일 피곤한데 토종닭 삶아먹을 시간이 어디 있나. 그냥 전기밥솥 쓰지. 어쨌든 밥 때고 낭만적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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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도 참 다양할 것 같다.
“장사 하면서 세상이 보인다. 시장에서 경기를 본다. 어떤 사람이 등산 갔다가 빈집을 보고 싸게 구입했다. 촌에 살다보면 촌사람들이 텃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시골 노인네들을 초대해서 불고기판에 돼지뒷다리살을 사다가 얹어놓고 막걸리 한 잔 대접해야 한다. 숯불에 불판 얹고 구우면 비싼 목살이 아니어도 노인들이 좋아한다.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한테는 작게 썰어 드려야 한다. 삼겹살은 기름이 많이 흘러 숯불이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쌀 반 가마, 김장배추 50포기가 돌아온다. 받아서가 맛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서다.”

-장사하면서 재미있는 점은 무엇인가.
“무쇠 솥 장사를 하다 보니 음식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솥을 보면서 어떤 음식을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생각한다. 음식도 잘 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이 오기도 한다. 그분들한테 밥 짓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장마철에 방앗간도 물에 잠기면 난감한데, 그럴 때는 그 쌀을 싸게 사다 잘 말리고 곰팡이를 제거한 다음 밥 끓을 때 돼지기름 두세 덩이를 넣으라고 한다. 나중에는 돼지기름이 다 없어지고 밥에 윤이 흐른다. 적당히 돼지기름을 넣으면 밥과 찰떡 궁합이다. 주방장들은 대개 고집이 센 사람들이지만 여기서 얘기 듣고 가서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어쩌다 식당에 가면 ‘솥집 아저씨’ 왔다며 고마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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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종류가 참 많다. 물건을 보면서 아쉽거나 안타까운 점이 있나.
“전라도 광주, 충북 괴산, 중국에서 물건이 온다. 주물 기술자들이 많이 없어졌다. 10년 전만 해도 대림전문대학을 비롯해 몇 대학에 주물학과가 있었는데 없어진 데가 많아졌다. 주물이 아주 좋은 기술이 아니긴 했지만 다 없어졌다. 일반주물과는 다르다. 주물에서 보면 65세 정도 된 사람도 젊은 측에 속한다. 하지만 일하다 허리를 다치면 일을 못하게 되고, 일이 힘들다고 자식들이 못하게 하기도 한다. ‘야끼 기술자’가 없다. ‘야끼’는 기계주물이 아니라 힘들여 ‘담금질’ 하는 것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만들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술 있는 영감님들은 정말 잘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로 쇠를 녹이고, 중국에서는 재래식으로 쇠를 녹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게 좋다. 전기로 하면 빨리 녹일 수 있고, 높은 온도로 맞추니까 강도가 세진다. 반면에 용광로에 내화벽돌을 쌓고 재래식으로 하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시골로 가는 바람에 덕을 본다. 내 또래 6,70살 된 사람들은 젊어서 다 도시로 와서 장가 갔다. 시골에서는 장가가기 힘들었다. 여자들은 ‘촌년’이 되기 싫어했다. 그러다 60살 넘어서 시골에 가보면 좋은 걸 안다. 공기 좋고, 마당에 상추도 심을 수 있고, 물도 좋은 걸 알고 여자들이 오히려 시골을 좋아한다. 젊은 사람들이 약재 심고, 짐승 기르면서 먹고 사는 데 힘을 기울이면 ‘귀농’이다. ‘귀촌’은 텃밭에 채소 좀 심어놓고 돈은 보지 않고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무쇠 솥의 장점은 무엇인가.
“솥이 두꺼워서 불을 천천히 빨아들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양은솥과 무쇠솥에 같은 양의 물을 넣고 끓이면 무쇠 솥이 더 빨리 끓는다. 무쇠 솥이 더 빨리 뜨거워지기 때문이다. 무쇠 솥을 깨뜨려서 현미경으로 보면 스폰지가 엉겨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금방 나온 솥에 기름을 잔뜩 붓고 하룻밤을 두면 기름이 스며들어 바닥이 흥건해진다. 쓰면 쓸수록 스폰지 구멍이 메워지는 거다. 음식 남은 걸 무쇠솥에 넣고 뚜껑을 덮으면 잘 안 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은 솥이 항아리처럼 통하고 있다는 거다. 무쇠 솥을 닦을 때는 트리오나 퐁퐁 등 합성세제를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돼지기름으로 빙 두르면서 기름을 태우고, 물은 말려야 한다. 합성세제를 쓰면 트리오나 퐁퐁이 솥 표면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오게 된다. 물기는 말리고 기름은 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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