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편 태백(泰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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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편 태백(泰伯)
  • 이우재
  • 승인 2010.05.0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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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편 태백(泰伯)

1, 子曰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태백은 그 덕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세 번 천하를 양보하였으나 백성이 그 덕을 칭송할 길이 없다.”

  <해설> 태백(泰伯)은 주나라 태왕(大王)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자이다. 태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다. 태왕은 계력의 아들 창(昌)이 성인(聖人)의 덕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로 나라가 계승되기를 희망하였다. 이를 알아챈 태백과 중옹은 당시로는 오랑캐 땅인 오(吳)나라(지금의 소주 지방)로 달아났다. 태왕이 죽자 계력이 왕통을 잇고, 이어 창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문왕(文王)으로 천하의 삼분의 이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문왕의 아들 발(發)이 무왕(武王)으로 마침내 은(殷)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얻었다. 후에 태백은 오(吳)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세 번 양보하였다는 것은 완강히 사양함을 일컬은 말이다. 천하(天下)라는 말은 태백 당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당시 주(周)는 섬서성(陝西省) 일대의 한 제후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 대에 이르러 천하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民無得而稱焉은 태백의 자취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려 백성들이 무어라고 언급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선행이야말로 더욱 빛나는 것이다.

2,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게 되며,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주눅이 들게 되고, 용감하되 예가 없으면 난폭해지며, 정직하되 예가 없으면 가혹해진다. 군자가 친척에게 돈독히 하면 백성들 사이에 어진 기풍이 일어나며,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해설> 노(勞)는 수고로운 것이요, 사(葸)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난(亂)은 난폭한 것, 교(絞)는 가혹한 것이다. 예가 없다는 것은 절제하지 않는 것이다. 공(恭), 신(愼), 용(勇), 직(直) 모두 다 좋은 덕목이나,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면 그 폐해가 노(勞), 사(葸), 난(亂), 교(絞)로 나타나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중화(中和)를 강조한 것이다.
  독(篤)은 돈독한 것, 친(親)은 일가 친척이다. 흥(興)은 기(起)로 일어나는 것이다. 고구(故舊)는 옛친구요, 투(偸)는 인정이 각박한 것이다. 한편 다산은 고구(故舊)를 선군(先君)의 옛 신하라고 한다.
  여기서의 군자(君子)는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남의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의 일가 친척에게 돈독히 하면 백성들도 감화되어 자신의 친척들에게 도탑게 대한다. 마을 전체가 서로 인정이 두터워지면 그것이 다름 아닌 인(仁)이다. 위에 있는 자가 옛 친구를 잊지 않을 때 백성들도 감화되어 자연 인정이 두터워진다.  
  신주에서 송(宋)의 오역(吳棫)은 君子篤於親 이하를 증자의 말로 보고 별도의 장(章)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자도 그 견해에 찬성하고 있다.

  <참고> 양화 8에서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의 여섯 가지 폐단을 말하고 있다.

3,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증자가 병이 위중해지자, 제자들을 불러 말하길 “이불을 젖히고 내 손과 발을 보아라. 시(詩)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가에 이른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 하라.’고 했으니, 이제서야 나는 그것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구나, 제자들아!”

  <해설> 증자가 공자보다 46세 아래라고 전해지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공자 사후 몇 십 년이 경과한 때의 일로 추정된다. 
  계(啓)는 개(開)로 여는 것이다. 啓予足 啓予手는 이불을 젖히고 손과 발을 보라는 말로, 즉 부모가 주신 내 육신이 온전히 잘 있는지 살펴보라는 뜻이다.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은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의 마지막 장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그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다.

    맨손으로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널 수 없음을
    사람마다 다 알고 있으나,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네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가에 이른 듯, 엷은 얼음을 밟은 듯 해야 한다네   
    不敢暴虎 不敢馮河 人知其一 莫知其他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吾知免夫는 증자가 이제 죽음에 임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증자가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을 온전히 간수하기 위해 자기처럼 항상 삼가고 조심할 것을 가르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효경(孝經)』에  있는 “이 몸의 모든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유명한 공자의 말과 이 구절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효경』은 공자보다 한참 뒤인 전국시대 말의 저술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효경』에 나타난 공자의 말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신주는 “육신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거늘, 하물며 잘못된 행동으로 부모를 욕되게 해서야 되겠는가?”라는 범(范)씨의 말로 이 장에 대한 해설을 마치고 있다.
 
4, 曾子有疾 孟敬子問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 籩豆之事 則有司存.
  증자가 병이 위중하자, 맹경자가 병문안을 왔다. 증자가 말하길 “새가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하다고 합니다. 군자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도가 셋 있으니, 몸가짐을 단정히 하면 난폭하거나 거만해지지 않게 될 것이며, 안색을 바로하면 믿음직스럽게 보일 것이며, 말을 바로 하면 비속하거나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사 때 그릇을 놓는 일 따위는 그 담당자에게 맡기면 됩니다.”

  <해설> 맹경자(孟敬子)는 노나라의 대부로 성은 중손(仲孫)씨, 이름은 첩(捷)이다. 삼환의 하나인 맹손(孟孫)씨로 맹무백(孟武伯)의 아들이다. 曾子曰이라고 하지 않고, 曾子言曰이라고 한 것은 증자가 임종에 즈음하여 한 말이라 정중히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고 황간의 『논어의소』는 말하고 있다.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은 아마 당시 유행하던 숙어(熟語)로 생각된다. 증자는 말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말을 잘 명심하라는 뜻으로 이와 같은 숙어를 인용했다. 새가 죽음에 즈음하여 그 울음소리가 슬픈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사람이 죽음에 즈음하여 그 하는 말이 선한 것은 아마 욕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용모(容貌)는 몸가짐이다. 폭(暴)은 난폭함이요, 만(慢)은 거만한 것이다. 사기(辭氣)는 말투이고, 비(鄙)는 비속한 것, 배(倍)는 배(背)로 이치에 어긋난 것이다. 변두(籩豆)는 제사 때 제물을 담는 그릇이다. 유사(有司)는 담당 관원이다. 형병(邢昺)은 『논어주소(論語注疏)』에서 말하길 “사람이 서로 만날 때 먼저 용모를 보고, 그 다음에 안색을 보며, 이어 말을 나눈다. 이런 까닭에 이 셋을 순서대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수양을 쌓아 자신의 덕을 높이는 데 그 우선적인 목적이 있다. 제기를 놓는 위치나 순서 따위의 일들은 물걠은봠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단의 놑이는일이다. 군자는 모름지기 근본에 힘써야 할 것이니, 학문의 근본은 몸과 마음을 닦아 자신의 덕을 높이는 것이다.
  맹경자가 작은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몸가짐과 언행을 바로 하는 근본은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증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고주의 정현은 斯遠暴慢矣는 남들이 감히 포악하거나 거만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며, 斯近信矣는 남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되고, 斯遠鄙倍矣는 비방하고 어그러진 말들이 귀에 들려 오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해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자의 신주를 따랐다.

5,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증자가 말하길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자에게 묻고, 많으면서도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가득 찼으면서도 텅 빈 듯이 하며,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여도 따지지 않았으니, 예전에 내 친구가 이렇게 하였다.”

  <해설> 犯而不校의 범(犯)은 자신에게 잘못을 가하는 것, 교(校)는 보복을 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예전의 내 친구가 안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으나, 꼭 안연인지는 분명치 않다. 안연이 덕행에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한 것이리라.
 
6,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증자가 말하길 “육 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받을 만하고, 사방 백 리나 되는 나라의 정치를 맡을 만하며, 큰 일을 당하여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군자일까? 참으로 군자일 것이다.”

  <해설> 6척(六尺)이라 함은 지금의 6척이 아니다. 고대의 척(尺)은 지금보다 길이가 짧아, 6척은 대략 지금의 4척보다 약간 긴 정도였다. 형병의 『논어주소』에 인용된 정현의 해설에 의하면, 6척은 15세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 六尺之孤는 부왕이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임금을 말한다. 百里之命은 사방이 백 리가 되는 제후국의 정치를 뜻한다. 대절(大節)은 어렵고 중요한 큰 일이다. 주자는 생사가 걸린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고주에서는 국가와 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하고 있다.
  君子人與 君子人也의 여(與)는 의문을 나타내고, 야(也)는 단정하는 말이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함으로써 강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운 고비에도 흔들림이 없고, 어린 임금을 도와, 국정을 맡을 만한 사람이라면 진정 군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7,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하길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의지가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맡은 바 임무는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어찌 무겁지 않으며, 죽은 다음에야 끝나니 어찌 멀지 않겠느냐?”

  <해설> 홍(弘)은 마음이 넓은 것이요, 의(毅)는 의지가 굳건한 것이다. 마음이 넓지 않으면 무거운 임무를 맡을 수 없으며,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인(仁)은 군자가 평생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사람처럼, 한 순간도 낭비하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8,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시에서 일어나, 예에서 서며, 악에서 이룬다.”

  <해설> 주자에 의하면 학문을 하는 순서라고 한다. 시(詩)는 그 말이 이해하기 쉽고, 또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런 까닭에 학문은 시로부터 시작하여, 예에서 꾸미고 절제하는 것을 배우고, 악을 통해 도덕에 화순(和順)함으로써 끝난다고 한다. 
 
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알게 할 수는 없다.”

  <해설> 사람마다 그 자질이 각기 달라,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며, 어떤 이는 전혀 배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계씨 9).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정치와 행정은 배움을 갖춘 군자(지식인)의 전유물이다. 군자는 자신의 배운 바 학덕을 모두 발휘하여 백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여 학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생업에 종사한다. 생업에 종사함으로써 천하 만민을 먹여 살린다. 백성은 그 학문이 얕기 때문에 정사를 논할 수 없으며, 또한 군자가 펴는 정치의 이유를 이해하기도 힘들다. 이런 까닭에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 까닭을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자의 해설에 의거했다. 다산도 같은 입장이다.
  정현(鄭玄)은 민(民)은 명(冥)이라 하면서 “백성은 따르게 해야지, 그 이유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해석한다. 만일 그 이유를 알게 하면 어리석은 자가 혹시 가볍게 여기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이러한 정현의 해석을 성인(聖人)의 본마음이 아닐 것이라고 정자(程子)를 인용하여 비판한다. 성인의 마음이 어찌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않겠느냐마는 단지 백성의 자질이 거기에 이르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 주자의 주장이다. 주자의 견해는 가르치는 데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有敎無類―위령공 38)과도 일치한다.
  한편 청(淸)의 환무용(宦懋庸)은 『논어계(論語稽)』에서 民可 使由之. 不可 使知之로 끊어 읽어 “백성에게 그 가(可)한 것은 따르게 하고, 불가(不可)한 것도 또한 알게 하여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10,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용기를 좋아하면서 가난함을 싫어하면 난을 일으키게 되며, 남이 어질지 않다고 하여 그를 너무 심하게 미워하면 난을 부르게 된다.”

  <해설> 용기는 훌륭한 미덕이나, 절제하지 못하면 난의 원인이 된다(勇而無禮則亂―태백 2). 용기를 좋아하면서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원망하면, 혁명이나 반란을 꿈꾸게 되며, 남의 잘못을 너무 심하게 미워해도, 그 용납하지 못함이 난의 원인이 된다.
  원(元)의 허겸(許謙)은 이 장과 관련하여 『독사서총설(讀四書叢說)』에서 어질지 못한 자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나 다만 시세(時勢)를 살펴야 한다. 시세가 어질지 못한 자를 능히 제압할 수 있는 형편이라면 어찌 난이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시세가 능히 어질지 못한 자를 토벌할 형편이 아닌데도 너무 심하게 미워하면 난을 부르지 않은 적이 드물다. 한(漢)나라 때 환관(宦官)의 발호가 그런 것이고, 당(唐)나라의 말로(末路)도 또한 그런 류(類)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 용기와 난에 대해서는 태백 2, 양화 8, 23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11,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비록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다.”

  <해설> 재(才)는 재능이고, 미(美)는 기예의 아름다움이다. 교(驕)는 교만한 것, 인(吝)은 인색한 것이다.
  교만하고 인색한 것의 폐단을 강조한 말이다. 교만함은 자신에게 후(厚)한 것이고, 인색함은 남에게 각박한 것이다. 교만하면 덕이 진보하지 않으며, 인색하면 덕이 넓어지지 않는다. 군자는 모름지기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하는데(躬自厚而薄責於人―위령공 14), 그 반대이니 족히 볼 것이 있을 리 없다.

12,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삼 년을 공부하고서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는 자를 쉽게 보지 못하겠다.”

  <해설> 지(至)는 도(到)로 이르는 것이다. 곡(穀)은 벼슬길에 나아가 받는 녹(祿)이다. 不至於穀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다. 주자는 지(至)를 지(志)로 써야 한다고 하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뜻에 큰 차이는 없으나, 주자의 주장은 청(淸)의 유학자들로부터 원문의 자구를 함부로 수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서는 청(淸)의 이공(李塨)의 『논어전주(論語傳注)』에 의거했다.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서도 벼슬에 유혹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다면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태는 오늘날이나 그 옛날이나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은 곡(穀)을 선(善)의 오자(誤字)로 해석하여 “삼 년을 공부하고서도 선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찾기 어렵다.”라고 풀이한다. 송(宋)의 장식(張栻)도 『남헌논어해(南軒論語解)』에서 곡(穀)을 선(善)으로 보았으나, 三年學不至於穀 不易得也로 끊어 읽어 “삼 년을 공부해서는 선(善)에 이르지 못한다. 쉽게 얻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라는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13,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목숨을 걸고 도를 좋아한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아니하며,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물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내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리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해설> 독신(篤信)의 대상은 학문이다. 학문을 독실하게 믿지 못한다면 좋아할 수 없다. 守死善道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좋아하는 것이다. 도에 목숨을 걸 정도가 되어야 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방(危邦)은 고주의 포함(包咸)에 의하면 난(亂)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 위태로운 나라다. 난방(亂邦)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그러한 나라이다. 난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갈 생각을 말아야 하고, 만일 난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 머무르고 있다면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설사 그러한 위태로움과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욕(辱)만 돌아올 뿐이다. 
  자기의 학덕을 인정하고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그러한 세상(天下有道)이라면 세상에 나아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지만(見), 그렇지 못한 세상(無道)이라면 오히려 일신에 욕만 초래할 뿐이니 은거하여 학덕이나 수양한다(隱).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고 있으면, 마땅히 벼슬길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빈천하다면 자신의 학덕이 부족한 탓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때는, 마땅히 은거하여, 학덕의 수양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벼슬길에 나아가 부귀를 누리는 것은, 지조가 없는 것이니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참고> 공야장 1, 20, 헌문 1, 4, 위령공 6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그 정사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설> 그 지위에 있지 않은 자가 그 정사를 논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며, 주제넘은 짓이다. 공자는 그것을 경계한 것 같으나, 오늘날의 민주 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신주에는 정자(程子)의 “그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직책을 맡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임금이나 대부가 물어 올 경우 대답하여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라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 군자가 학덕을 수양하는 목적이 결국 백성을 평안케 하는 정치에 있는 만큼,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공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자 역시 망설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참고> 헌문 27에서도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고, 헌문 28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증자가 말하고 있다.
 
15, 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盈耳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태사 지의 연주로 시작하여 관저의 합창으로 끝날 때까지 그 음악이 아름답게 귀에 가득찼도다.”

  <해설> 사(師)는 태사(太師)로 악사장(樂士長)이며, 지(摯)는 당시 노나라 악사장의 이름이다. 시(始)는 연주의 시작이요, 난(亂)은 연주의 마지막이다. 당시 음악은 악사장의 연주로부터 시작하여  시(詩)의 합창으로 끝을 맺었는 데, 이것을 각각 승가(升歌), 합악(合樂)이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시(始)는 승가를, 난(亂)은 합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저(關雎)는 『시경』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시이다. 양양(洋洋)은 아름답게 가득차는 것이다.
  당시 노나라의 음악이 훌륭했음을 나타낸 말이다.
  시(始)와 난(亂)의 의미를 놓고 고래로 해석이 분분하나, 여기서는 청(淸)의 유태공(劉台拱)의 『논어병지(論語騈枝)』의 주장을 따랐다.

16, 子曰 狂而不直 侗而不愿 悾悾而不信 吾不知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뜻은 높으면서도 올곧지 않으며, 미련하면서도 성실하지 않으며, 어리석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자, 이런 자들은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설> 광(狂)은 뜻만 높은 것이며, 직(直)은 곧은 것이다. 통(侗)은 미련한 것, 원(愿)은 성실한 것이고, 공공(悾悾)은 능한 것이 없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인격 상의 결함이 있다고 하여 모두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뜻이 높은 자들은 대개 곧기 마련이며, 미련한 자는 성실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래도 신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도 못하다면,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으니,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다.

17, 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듯,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는 듯 해야 한다.”

  <해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짐은 무겁고 길은 머니, 죽은 뒤에나 끝난다고 증자도 말하였다(任重而道遠 … 死而後已―태백 7). 다 배웠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부족한 듯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18, 子曰 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 而不與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높고 크시도다. 순임금과 우임금께서는 천하를 가지셨으면서도, 자신은 직접 관여하지 않으셨도다.”

  <해설> 외외(巍巍)는 높고 큰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禹)는 하(夏)나라를 세운 시조로, 황하의 치수 사업에 공이 있어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禪讓)받았다고 전해진다. 여(與)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다.
  순임금과 우임금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훌륭한 인재에게 정사를 맡겨 천하를 잘 다스린 것을 기린 말이다.
  고주에서는 不與를 不與求로 보아, 순과 우가 천하를 얻으려고 몸소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얻은 것(전설에 의하면 순은 요로부터, 우는 순으로부터 선양받아 왕이 되었다)을 찬양한 말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하안의 이러한 주장은 유보남(劉宝楠)이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위(魏)나라 사람인 그가 위(魏)가 한(漢)으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한 것을 순과 우의 선양을 빌어 꾸며대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 인용된 동진(東晋)의 강희(江熙)의 주장에 의하면, 여(與)는 함께 하는 것으로 공자가 순임금, 우임금과 세상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말이라고 한다. 

  <참고> 위령공 4에서도 순임금에 대해 비슷한 내용으로 찬양하고 있다.

19, 子曰 大哉 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 其有成功也. 煥乎 其有文章.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위대하시도다! 요의 임금되심이여. 높고 크게 우뚝 솟았도다! 오직 하늘만이 위대한데, 요임금만이 본받으셨구나. 넓고 넓도다! 백성들은 무어라 형용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높고 크도다! 그 공을 이루심이여. 빛나도다! 그 문물제도여.”

  <해설> 칙(則)은 법(法)으로 본받는 것이고, 탕탕(蕩蕩)은 넓고 우원(迂遠)한 모양이다. 명(名)은 말로 형용하는 것이요, 환(煥)은 밝게 빛나는 모양이다. 문장은 문물제도를 말한다.
  요의 성군(聖君)됨을 하늘에 빗대어 찬양하고 있다. 

  <보충> 유교 문화권에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요와 순은 그 실재(實在)가 의심되는 전설 상의 인물이다. 순에게서 선양(禪讓)받은 우(禹)임금이 세웠다는 하(夏)나라조차 아직 그 실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중국 역사에서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은(殷)나라부터이다.
  그러나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이미 요순에 대한 전설이 민간 사이에서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요에 대해 4번, 순에 대해 7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그 중 후세에 첨가되었다고 생각되는 요왈편을 제외하면, 요에 대해 3번, 순에 대해 6번이다. 춘추시대의 정치 사회적 혼슀에 요와 순 같은 성군의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순의 전설의 핵심은 군주가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德治)와, 임금이 그 지위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덕이 있는 자에게 물려준다는 선양(禪讓)이다. 공자 당대에 덕치에 관한 전설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논어 안에 보이는 요와 순에 관한 내용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선양에 관한 전설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듯하다. 만일 그것이 확립되어 있었더라면, 덕이 있는 군자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공자가 그것을 인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논어 안에는 요순의 선양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문헌상으로 선양의 전설이 처음 언급된 것은 『묵자(墨子)』이며, 이후 『맹자(孟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순임금에게는 어진 신하가 다섯 있어,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무왕이 말하길 “내게는 훌륭한 신하가 열 사람 있다.”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요순 시대 이후, 이 때야말로 인재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부인이 있었으니 아홉 사람일 뿐이다.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가졌음에도 은나라를 섬겼으니, 주나라의 덕은 가히 지극하다고 할 뿐이다.” 

  <해설> 予有亂臣十人의 난(亂)은 치(治)이다. 한 글자가 본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쓰이는 이른바 반훈(反訓)이다. 당(唐)은 요임금, 우(虞)는 순임금의 별칭이다.
  唐虞之際 於斯爲盛에 대해서는 고래로 해석이 엇갈리고 있으나, 여기서는 제(際)를 하(下)로 보아, 요순 이후 이 때(무왕 때)에 이르러 인재가 가장 많았다라고 풀이한 유보남의 『논어정의』를 따랐다.
  순임금의 다섯 신하는 우(禹), 직(稷), 설(契), 고요(皐陶), 백익(伯益)이라고 한다. 무왕의 열 신하는 태사(太姒), 주공(周公) 단(旦), 소공(昭公) 석(奭), 태공(太公) 망(望), 필공(畢公), 영공(榮公), 대전(大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남궁괄(南宮适)이라고 전해진다. 부인은 문왕의 비(妃)인 태사(太姒)를 말한다.
  
21, 子曰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임금은 내가 따라갈 수가 없구나. 자신이 마시고 드시는 것은 검소하게 하시면서도 귀신에 대한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셨다. 평소 때 입는 의복은 검소하게 하셨으면서도 제례 때의 의복은 더없이 아름다우셨다. 자신의 궁궐은 초라하게 하셨어도 치수에는 힘을 다 기울이셨도다. 우임금은 정말 내가 따라갈 수가 없도다.”
  
  <해설> 간(間)은 간측(間廁)으로 곁에 끼어든다는 뜻이다. 비(菲)는 박(薄)으로 엷은 것이다. 치효(致孝)는 효를 다함이니,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의복(衣服)은 상복(常服)으로 평소에 입는 옷이다. 불(黻)은 제례 때 입는 수놓은 의복이고, 면(冕)은 구슬이 달린 관(冠)이다. 모두 제례 때 입는 것이다. 구혁(溝洫)은 치수를 위해 만든 크고 작은 수로이다.
  우임금이 자신에게는 소홀히 하면서도 백성을 위한 정사에는 정성을 다한 것을 기린 말이다.
  주자는 간(間)을 하극(罅隙), 즉 남의 허물을 틈타 비방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우임금 또한 공자가 흠모하는 성군(태백 18)임에 비추어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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