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동에 라이브클럽 낸 가수 이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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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동에 라이브클럽 낸 가수 이용복
  • 강창대 기자
  • 승인 2013.07.21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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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능력 차별 없어야 선진국이고 진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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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자신이 운영하는 라이브 클럽 '쥴리아'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 이용복 씨

7, 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온 기억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동네에 가게도 흔하지 않던 시절, 먼 심부름 길을 다녀오면서 달짝지근한 막걸리 맛을 생애 처음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40줄 언저리에 있는 세대에게는 공감을 살 만한 이야기다.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 씨가 데뷔 40여년 만인 2011년에 발표한  ‘막걸리 추억’은 이런 추억을 담고 있다. 

“이 곡은 개그맨 최용준 씨의 이야기를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최용준 씨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변사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변사는 무성영화 시절 대화나 줄거리를 설명하던 사람인데, 그 맥을 잇겠다고 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죠.”

가수 이용복이 인천 연수동에 ‘이용복의 쥴리아’라는 이름의 감성 라이브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벌써 1년2개월이 지났다. 작년 4월 연수 푸르지오 4단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5월부터 용담로 111번지 아시스타워 3층에 '이용복의 줄리아' 를 낸 것이다. 그 전에는 양평에서 카페를 운영했었다. 그는 한 때 잘 나가는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 1985년에는 가수 활동을  접고 녹음실을 운영해 2000년까지 운영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의 이름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한국의 레이찰스. 레이찰스(Ray Charles Robinson, 1930년~2004년)는 가스펠과 블루스를 접목시킨 노래로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흑인 가수다. 2005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레이>(Ray)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요즘 세대에게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더 유명하지만, 70년대에는 스티비 원더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었죠. 시각장애인 가수로는 레이찰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저에게 ‘한국의 레이찰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어요. 그런데 저는, 노래풍이나 보이스칼라로 보자면, 중저음의 레이찰스보다 고음인 스티비원더와 더 가깝습니다.”

이용복 씨가 시력을 잃게 된 것은 8살에 겪은 사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수로 데뷔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0년 무렵이다. 이후 큰 인기를 끌면서 1971년에는 신인가수상을 받았고, 72년과 73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휩쓸었다. 특히, 기타 실력이 뛰어나 가수 양희은 씨의 데뷔앨범에서 김민기 씨와 더불어 기타 반주를 맡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기타 실력은 오롯이 독학으로 일궈낸 성과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잘 안 들어주셨어요. 그래서 누나들이 쓰던 고무줄을 상자에 걸쳐놓고 현을 만들어서 튕겨보았더니 소리가 제법 예쁘더군요. 기타 현이 여섯 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고무줄 여섯 줄을 걸치고 손가락으로 눌러가면서 멜로디를 연주했죠. 아버지가 그걸 보시고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기타 하나를 사주시더라고요.”

그가 기타를 익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연주를 잘 듣고 이를 따라하는 것이었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기타를 시작한 친구가 있었어요. 하루는 그 친구가 ‘세븐코드’라며 화음을 연주하더군요. 그래서 잘 듣고 음정을 외웠죠. 다른 기타연주를 유심히 들으며 세븐코드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혼자서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는 연주곡은 죄다 따라 연주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유심히 듣고 연구하며 무언가를 스스로 터득해 나가는 그의 태도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한 것 같았다. 이런 도전과 성취가 그에게 적지 않은 활력이 되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친구 하나가 우쿨렐라(기타보다 작은 악기로 4현으로 연주)를 가져왔더라고요. 저에게 그 악기를 주면서 자기는 연주를 잘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 고무줄로 연주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기타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우쿨렐라를 잡고 하루 만에 마스터를 했죠.” 

녹음실 운영하며 대중음악 발전에 힘쓰기도
 
70년대 화려한 가수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순간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정작 그가 가수 활동을 멀리하게 된 것은 녹음실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거 없는 얘기지만, 80년대에 들어서고 당시 영부인이 시각장애인 가수가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불편해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방송국 PD들이 제가 출연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었죠. 그래서 후배들이 이를 항의하며 시위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런데, 가수 활동이 뜸해진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녹음실을 열고 이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거든요.”

이용복 씨가 운영하던 녹음실은 당시 가요계 큰 별들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음반을 취입해 히트를 기록한 가수로는 이치현과 벗님들을 비롯해, 이광조, 김수철, 부활, 임종환 등이 있다. 80년대 내로라는 가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에게 인천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활발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인간적이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양평은 한가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죠. 미국의 도시와 비교하자면, 엘에이(LA)에서 뉴욕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뉴욕 사람이 엘에이에 가면 답답해하죠, 너무 조용하고 느리니까. 엘에이 사람이 뉴욕에 가면 빠르고 활기가 넘치니까 정신이 없어요. 인천은 뉴욕 같은 느낌이에요.”

장애인식 여전히 부족한 점 많아

이용복 씨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70년대에 비교하자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식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될 만큼 장애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심했다. 

“한 번은, 방송국에서 사회자가 저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다음에 소개할 사람은 상식을 벗어난 분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대에 올라 이렇게 대꾸했죠. 제가 운전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다면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만큼 장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겁니다.”

우리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참 많은 것이 바뀌어 왔다. 이처럼 장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을까? 이점에 대해 이용복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물론, 장애인만큼 장애를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그래서 승마나 스킨스쿠버다이빙, 스노쿨링, 골프 등 여러 활동에 도전했습니다.”

시각 장애를 갖고 이런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스킨스쿠버다이빙은 물밑 풍경을 즐기기 위한 스포츠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물론, 물 속 풍경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무중력의 편안한 느낌은 즐길 수 있죠.”
“골프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홀컵의 지름이 10.8cm인데, 이곳에 공을 집어넣는 건 정말 어렵죠. 그래서 한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씩 스윙을 연습하기도 했어요. 손에 물집이 잡혔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서서히 감이 잡히더라고요.”
“승마도 나름 어려움이 있어요. 평보나 속보 정도는 옆에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이동하면 괜찮지만, 구보를 하게 되면 말머리를 이리저리 틀면서 직접 운전을 해야 하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자꾸 말의 배를 차니까 말이 앞다리를 들며 일어서더군요. 그래서 한 번 낙마한 일이 있었죠.”

이용복 씨는 장애인식을 바꾸기 위해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기회가 닫는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장애인식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문득, 그에게 장애란 무엇일지 궁금했다.

“장애는 장애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돼요. 될 수 있으면 그런 한계를 이겨나가야겠지만, 장애 때문에 안 되는 게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별반 능력의 차이가 없는 부문도 있습니다. 그런 분야에서는 오히려 장애인이 더 잘 할 수도 있어요. 저는 이런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일생을 통해 그 가능성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가 달라졌으면 하는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 올림픽, 장애인 아시안게임 등처럼 장애인만 따로 모아서 하는 행사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의 올림픽, 하나의 아시안게임에서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같이 겨룰 수는 없겠지만, 비장애인 육상경기와 장애인 육상경기를 한 행사 안에서 실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장애인도 능력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요. 스티비 원더는 팹시콜라 CF에도 출연했었어요. 반면, 저는 70년대 굴지의 가수였음에도 한 번도 그런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이런 점에서 사고의 유연성이나 여유가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인식을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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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라이브클럽 '이용복의 쥴리아'에 마련된 라이브 무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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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이용복의 쥴리아'에는 약 5,000여 장의 LP 음반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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