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가 죽으면 누가 손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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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가 죽으면 누가 손해일까?
  • 임병구
  • 승인 2013.10.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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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임병구 / 인천교육연구소장, 인천해양과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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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가 죽으면 주인이 손해다. 짖지 못하니 도둑이 창궐한다. 이 쉬운 세상 이치를 복잡하게 뒤섞어 놓으면 주인이 자신의 정체를 잃는다. 심지어 도둑 편을 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
전교조 교육을 거부하자는 학부모 모임이 생겼는데 그 이유가 이념교육을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 사회같이 분단 상황에 놓여있는 특수한 경우, 이념에는 색깔이 따라 붙는다. 어떤 이념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만 다른 이념은 그 색깔로 인해 매도당하기 일쑤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은가?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에는 ‘의식화’ 교육이 문제라고 했다. 그 의식화 교육은 프레이리가 주창했던 본디 의미를 거세당한 채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교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의식화가 되는 것이 나쁘다면 학생들을 ‘무의식’ 상태로 내버려 두자는 말이냐는 항변조차 무기력했다. ‘의식화=불순사상주입’이라는 공안당국과 언론의 주술을 반복 학습하면서 교육이 스스로를 깨어 있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의미는 위축되거나 사상되었다. 교실에서의 가르침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과정으로 축소되었고 학생들은 대상화되었다. 세계를 다면으로 인식하면서 입체적 시각을 지니도록 하려는 수업은 무모한 교사들만이 시도해보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3.
그 사이 ‘위험한’ 이념으로부터 안전한 영역이 있다는 믿음이 유포되었다. 교과서대로만 가르치면 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어떤 교과서도 이념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시작은 이명박 정부에서 비롯되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꾼다고 그 교과서가 이념이 없는 청정교과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념에 경도된 이들이 교과서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 무리수를 둔 데서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교과서 논쟁은 가일층 폭발 직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현대사가 배출한 문제적 인물이다. ‘건국의 아버지’가 ‘피의 화요일’ 발포로 학생들을 비롯해 ‘국부의 자식인 백성’을 살해하는 장면을 어떻게 가르쳐야 탈이념 교과서가 될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은인 대통령’이 여자들이 낀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은 사실에서 어떤 내용을 지워야 탈이념적인 교육이 될까? 교학사 교과서는 이념을 핑계 삼아 문제적 인물들의 흑역사를 세탁하고 있다. 이념 때문에 눈이 가려지는 게 아니라 특정 집단이 이기에 눈멀어 교과서를 분칠하고 교육을 뒤흔들고 있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4.
박정희가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면 국가 자원 ‘몰아주기’ 탓이다. 자원이 골고루 배분되지 않았으니 소외 계층이 당한 설움은 역사에 빚으로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와 다른 방향으로 그 계층을 다독였다. 아버지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여성이 지닌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 이념 논쟁에 지친 우리 사회의 중간지대를 선점했다. 그녀의 빨간 색은 우리 사회 이념 구도를 재편해 정상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회심의 선택지였다. 빨간 색은 냉전 시대 공산 진영을 상징하는 기표였다. ‘레드 콤플렉스’나 ‘빨갱이’라는 말이 여전히 음습하게 통용되는 사회에서 집권여당이 채택한 빨간색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이념에 고착된 현실을 탈피해 차원이 다른 인식 세계를 열어 가겠다는 신호였다. 편중에서 평등으로, 자본과 노동이 균형을 이루도록, 자유로운 사상 토론이 가능한 사회로 가려면 빨간색이 담고 있는 이념적 함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상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빨간색이 반영된 정책이었고 국민들은 이념의 덫을 풀고 지지를 표명했다. 이념이 비로소 자기 자리로 돌아와 무색무취한 의미로 쓰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5.
빨간 색이 아무 죄가 없듯이 양심을 따르는 이념에는 본디 색깔이 없다. 빛이 분산되어 빨간색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파란색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다르지 않다. 인간이 어떤 성향을 지니는가도 배운 바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경험을 투과하더라도 이념이 다른 학생이 나올 수 있는 게 교육이다. 특정한 이념을 지닌 학생을 불량품으로 치부하면서 교육이 실패했다고 한다면 교육은 제품을 찍어내는 공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그래서 교과서를 다양하게 만들어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선택하게 한 후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서로 배우게 하는 제도가 생겼다. 작금의 교과서 논쟁은 이제 막 생성되는 교육 내용의 다양성을 죽여 과거 시점으로 되돌리려는 짓이다. 시대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여러 교과서는 우리 사회가 교육적으로 진보해 온 성과다. 거기에 국가가 개입해 손목을 비틀어 자구를 수정하라고 강요하는 광경은 이념의 잣대를 떠난 희한한 사건이다. 게다가 ‘틀린’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주입하라고 할 때 교사는 양심에 의거해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색깔과 이념은 그런 행동에 대해 사회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념이 먼저 움직이게 하는 건 아니다.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들이 필자로 참여한 교과서도 있다. 그들이 이념 때문에 교과서를 썼다고 단정하면서 다른 이념을 교과서에 쏟아 붓는 일이야말로 더 이념적이면서 훨씬 위험한 일이다.
 
6.
게다가 전교조를 죽여 미래 세대가 빨간 이념에 물들지 않도록 하겠다는 정치적 계산까지 끼어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학교의 영향력은 형편없이 줄어들고 있다. 교과서는 가장 많이 팔리면서도 가장 인기 없는 텍스트다. 졸업과 동시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데 입시용 지식 외에 얻을 가치가 없어서다. 그나마 교과서를 벗어난 수업이 학교가 버텨내는 힘이 되어 왔는데 그 핵심 원리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념이 어쩌니저쩌니 말이 많으므로 이념이라는 말을 사용해 보자면 교사가 자신이 지닌 이념을 일방적으로 전수하면 학생들은 등을 돌린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살아갈 삶의 원리로서의 이념을 찾도록 안내하는 수업이라야 학생들이 반색한다.
‘일베’가 학교 교육을 대신해 역사와 사회를 가르치고 있는 한심한 현실에 대해 학교와 교사는 책임이 크다. 어떤 생각일지라도 수업과 학교생활을 통해 소통하면서 타인들과 나눌 때 기형적 사고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남학생들이 여성가족부가 조리퐁 과자를 없앴다고 믿으며 여성들도 군대에 보내 개고생을 시켜야 한다고 거품을 무는 현상은 어디서 왔을까? 누군가 이념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퍼 나르는 사이에 학교는 이념딱지가 붙는 게 두려워 반 쪽 생각만을 가르쳤다. 여성이 남성과 성적으로 어떻게 다른 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사고를 지녀야 하는 지 체득하게 하려면 평등사상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상의 뿌리는 빨간 빛깔이다.
학생들이 시사 이슈인 동양그룹 사태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할까?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고 보수만 챙기거나 거수기 노릇만 했던 사외 이사 제도가 취지대로만 작동했어도 참화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립학교 학생들은 우리 학교 이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되물을 것이다. 개방 이사 제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왜 극렬하게 반대했는지, 사립학교 비리가 왜 개선되지 않는 지 설명할 수 있어야 바른 교사다. 거기에 필요한 교사의 덕목은 이념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한 판단력 정도다. 그게 못마땅해 문제를 삼으려다 보니 이념 문제로 비틀어 뒤섞어 버린 것이다. 백번 양보해 이념 문제라 해도 사외 이사나 개방형 이사 제도는 사회를 민주화해 나가는 필수 장치들이다. 그 뿌리를 들춰보면 역시 빨간 빛깔이 배어 있다. 빨간 빛깔이 싫다고 다 뽑아버리겠다면 교사는 이념의 굴레에 얽히는 게 두려워 입을 닫아야 마땅한가?
 
7.
교사가 영향력이 없는 사회는 불길하다. 교사들 중에 일부는 전교조를 구성하고 있다. 굳이 이념적으로 보자면 왼 쪽에서 기둥을 떠받치고 있다. 그게 못마땅해 전교조의 어깨 힘줄을 끊어 낸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우경화는 일본에서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지금도 아이들은 ‘장애새끼’, ‘게이새끼’ 따위 비어를 입에 달고 산다. 한 쪽으로 경도된 학교는 정상성이라는 신화에 매여 소수자와 약자를 사회 밖으로 추방한다. 밀려난 이들은 이를 갈고 그렇게 생겨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미래세대의 몫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전교조는 통일 문제를 앞장서 제기해 이념적이라는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럼 이념을 떠나서 탈북자와 이주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게 인간적인가? 적어도 교사라는 자리에 서서 학생들에게 말할 때 북한주민을 동포로 대해야 한다는 건 기본 양식에 속한다. 최소한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헌법 정신을 구현하려는 교육자의 자세다. 위법한 사실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통일을 바란다고 아예 낙인을 찍어 몸은 교단에 있으나 생각은 교단 밖으로 쫓아낸다면 빈 깡통 같이 몸만 남은 교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골치 아픈 고민거리에는 접근하지 말고 월급만 타먹는 직업인이 되라고 한다면 그 길을 가는 영혼 없는 몸뚱이가 과연 교사일까?
 
8.
그래도 전교조 교사가 죽어야 한다면 죽는 길은 수월하다. 교과서와 지도서를 끼고 순응하며 직장 삼아 학교에 다니면서 주어진 여가에 취해 지내면 그만이다. 학생들의 비명에 귀 막고 세상에 눈 감고 매월 17일만 기다리다가 정년을 맞으면 여생까지 편안히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교사들이 모였고 교육 모순을 해결하려다 보니 정권과 불화했던 게 전교조의 역사다. 교육 문제에 칼을 대려다 실핏줄 한 가닥 한 가닥 이어진 사회 모순에 까지 칼을 휘둘러 세상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다친 이들을 끌어 모아 전교조를 친다면 순순히 받아 삭힐 수 있지만 색깔이나 이념으로 덧씌운 증오에는 분명 배후가 있다. 전교조를 제물 삼아 국면을 바꾸려는 음모는 무슨 빛깔을 띠고 있을까?
 
9.
개가 짖는 게 시끄럽다고 개를 나무라면 도둑은 숨는다. 개가 짖지 않고 침묵할수록 위험은 가까워진다. 정권이 전교조를 죽이겠다는 데 전교조를 죽여 그 입을 막으면 과연 손해 보는 건 누구일까? 주인의 손을 물지도 않았는데 입 막으라 다그치는 손은 시커먼 손이다. 시커먼 손에게 개를 맡기면 결국은 주인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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