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노는' 학생들은 교복 줄이러 많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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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노는' 학생들은 교복 줄이러 많이 왔죠."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1.02 0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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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시장에서 수선집 '또와집' 꾸려오고 있는 김기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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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던 옷이 유행에 밀리면 어떻게 할까. 새로 하나 사 입을까, 아니면 고쳐 입을까. 요새처럼 불황에는 선뜻 사기가 참 난감하다. 할 수 없이 할인매장을 찾아가기도 하겠지만, 고쳐 입는 이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처럼 경제상황에 맞춰 옷을 고쳐 입는 이들도 있지만, 70~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학생들 가운데는 이른바 ‘노는’ 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학생이 교복을 ‘수선집’에 옷을 맡겨 줄여 입었다. 남학생들은 바짓단과 통을 고치고, 여학생들은 허리와 치마폭을 줄였다. 그들이 즐겨 찾던 곳이 있다. 동인천 ‘양키시장’ 수선골목. 지금은 사람이 거의 찾지 않지만 한때 좁은 골목을 여전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양키시장에서 34년 동안 수선집을 꾸려온 ‘또와집’ 주인장 김기순씨(66). 김씨를 찾아가게 된 동기는 인천시립박물관 <안녕하세요, 배다리>展과 관련이 있다. 재봉틀 앞에서 일하고 있는 김씨 사진을 처음 봤고, 전시회 문을 연 날 때마침 시장이 쉬는 날이라 박물관을 방문한 김씨에게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별 거 없는데, 참….” 김씨는 인터뷰 요청을 어색해하면서 어렵사리 시간 날 때 찾으라고 허락해주었다. 지난 26일, 셔터문이 내려진 가게가 많은 어둑한 골목길 한 귀퉁이에 있는 ‘또와집’, 한겨울 골목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막은 골목에 있는 가게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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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안녕하세요, 배다리'展에 있는 수선집 '또와집' 모습. 이위정 작가 작품이다.

도착하자마자, 김씨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그러고는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보온병과 커피바구니를 든 커피아줌마가 배달을 왔다. 김씨는 기자에게 커피를 시켜주고, 본인은 율무차를 먹었다. 가게 안에는 두 사람이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온돌장판이 뜨끈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김씨는 가게 문을 연 지 내년 4월이면 만 34년이 된다. 지금 가게를 하고 있는 곳에서는 24년을 했고, 그 전에는 바로 앞에서 10년을 했다. 손님이 많이 찾느냐는 물음에 김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울에는 손님이 없어요. 조금 바쁘다면 봄, 가을이죠. 옛날에 비하면 아예 놀다시피 하구요. 예전엔 사람이 많아서 괜찮았는데, 이젠 시장이 다 죽었어요. 전에는 이 시간이면 엄청 바쁜 시간이거든요. 동인천에 학교가 참 많았어요. 학교가 다 떠나고 없어져서 손님이 거의 없어요. 요샌 학교에서 아예 교복을 다 줄여서 만들어주잖아요. 예전에는 교복을 줄여입는 학생 손님이 많이 왔어요. 요샌 단골손님 덕에 사는 거죠. 통이 넓은 바지를 다 좁게 입잖아요.”

단골손님 중에는 멀리서 오는 사람도 있다. 여기 살다가 서울로 이사 간 손님이 자기 애들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인천여상, 중앙여상 등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은 안 왔다. 김씨는 지금은 주안역 지하상가에 수선집이 많으며, 수선 가격이 여기보다 세도 잘 된다고 귀띔해 준다.

그는 줄이고 늘리는 걸 잘 한다. “고치는 건 다 고치죠. 오래된 외투는 길이를 줄일 수 있어요. 컬러는 기술이 더 있어야 하니까 손을 못 대요. 젊어서 양재학원을 다니면서 여성복을 많이 고쳤는데, 지금은 나이가 드니까 고치기 힘들어요. 애당초 복잡한 건 안 하게 됩니다. 기술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점퍼는 지퍼를 많이 달고, 단추는 없어요. 마이깡을 달아주죠. 청바지 마이깡 같은 거 하구, 점퍼는 지퍼 달구… 고장 난 건 고리만 달면 입을 수 있어요. 지퍼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고리만 빠져도 끼우면 입을 수 있어요. 얘는 오버로크(휘갑치기)라고 바지통 길면 잘라내잖아요. 그러면 올 풀리지 말라구 오버로크 쳐주는 거예요.

미싱(재봉틀)은 살 때도 중고로 샀다. 새 물건으로 사기에는 비싸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재봉틀의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다. “재봉틀은 통은 간 지 3년 됐고, 미싱 전체는 이쪽으로 와서 바로 샀으니까 20년 됐을 거다. 봉재공장에서 망해서 철거하는 걸 중고로 파는데 그렇게 샀어요.” 가게는 작지만 실은 색색별로 다 있다. 어떤 색깔의 옷이 올지 모르니까 기본적으로 색은 많이 필요하다. 솔기가 터진 옷을 가져오는 손님도 많은데, 단골손님 같은 경우에는 서비스로 해주고, 많이 터진 건 돈을 조금 받는다. 김씨는 손님이 맡긴 청바지를 꺼내 설명한다. “기장(길이) 줄이고, 품 줄이고, 청바지 허리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도 해요. 자 봐요, 가져오면 이런 건 견본으로 가져오면, 헝겊을 대서 늘려요. 여기까지 뜯어서 옆을 좀 늘리고, 이쪽에서도 늘리고… 1인치 반 늘린 거예요. 통도 팍 줄였어요. 바지를 견본까지 일곱 개죠. 모두 2만 4천원이에요. 허리만 늘리면 4천원이에요. 두 개만 허리 고쳤고, 나머지는 통을 줄였죠. 기장을 줄이는 방법에 따라 가격이 달라져요. 2천원, 3천원 합니다. 아무래도 손이 더 가면 비싸죠. 실이 똑같아야 한다면 이렇게 잘라서 붙여줘요. 표시가 나지 않도록 하려면 잘라서 속으로 집어넣어야 해요. 감쪽같죠,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박음질하듯 경쾌하게 들린다.

그의 집은 가게에서 4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집이 가까워 일을 접지 못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찾아와 옷을 맡기고, 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또래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5,6년 전부터 학생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복잡했는데, 지금은 생각에만 있을 뿐 참으로 아득한 일이 되었다. 그래도 양키시장에서 수선집은 많은 편이다. 곳곳에 셔터문 내려진 곳이 많아도 아직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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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로크(휘갑치기) 기계와 스팀다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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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가게에 있는 기계들은 아주 튼튼하다. 오버로크 기계도, 스팀다리미도 성능이 좋다. 예전에는 줄이고 늘리는 건 물론이고, 감(옷감)을 가져오면 옷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즘엔 복잡한 건 손대기 싫어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김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손수 남방이며 자켓을 만들어 입혔다. 양재학원에 다녀서 익힌 솜씨를 한껏 발휘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1968년도에 전주에 있는 양재학원을 다니면서 기술을 익힌 때가 아득하기만 하다.
 
그는 뭐든 잘 할 수 있었지만, 월급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양재학원을 졸업하고 양장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시다(주수)를 시켜요. ‘나도 만들 수 있는데’ 했더니 시다부터 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 시다로 들어갔더니 5백원 주더군요. 몇 십 년 전이니까 꽤 오래됐죠. 1968년도 12월 15일에 졸업하고 30일에 올라왔어요. 전라북도 순창면 순창읍에서 살았어요. 지금은 고추장 만드는 고장이에요. 12월 말에 올라와 양장점에 들어갔더니 시다를 시키고 월급도 짜, 다시 남학생들 교복 만드는 델 들어갔어요. 월급 3천원 주더군요. 그러다보니 양장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거기에 있느라고 못했어요. 계속 교복 만드는 데 있었으니까. 학원은 전주 노라노양재학원에 다녔어요.”

그가 양키시장 안에 가게를 열게끔 한 사람은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언니였다. 언니는 양장점을 소개해줘서 그때부터 직장인이 된 셈이다. 그때 남자옷 여자옷 등 바느질 하는 건 다 배웠다. 1975년도에는 결혼도 했다. 아이들이 4살, 6살 때도 일하러 나왔다. 애들은 아직 어린데, 4살 6살인데 일하느라 잘 돌보지 못했다. 지금은 21살 때 인천으로 올라와 45년째 살고 있다.

김씨가 처음에 가게 시작할 때만 해도 이곳에는 양복점도 많았고, 수선집으로 많았다. 아침 9시에 나오면 밤 10시가 돼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사도 잘 되고 손님이 많으니까 힘들어도 재미있었다. 그날 그날 처리를 못하면 쌓아놓고 가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일했다. “외국 물건이 많으니까 다 양키시장이라고 한 거죠. 외제를 쌓아놓고 팔았어요. 손이 다 터져요. 수선하면 손이 찢어져요. 저녁에는 바셀린을 터진 데 바르면 괜찮아져요. 장갑 끼고 자고. 나으려면 며칠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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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동안 재봉틀 앞에서 살아오면서 후회한 적이 없을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단골손님들이 찾아와 마음에 들게 고쳐줬다고 칭찬해주면 일할 맛이 더 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할 생각이다. 그는 가게가 다 낡았고, 시장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재개발이 언제 될지, 과연 될는지 모르겠다. 2014년 지나고 나면, 인천시에 돈이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송림초등학교 주변이 먼저 된다는 말도 있고 잘 모른다.

김씨는 아이들한테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다. 아이들도 엄마가 만들어주는 옷이 예뻐서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와도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어 좋아했다. “우리 아들이 누군가 저하고 똑같은 옷 입은 거 보면 이상하대요. 새싹유치원 다녔는데, 한 번은 남방이 좀 커서 와이셔츠를 만들어줬는데 하늘색인데 입지 않더라구요. 우리 집에 이사 온 아저씨가 입은 남방하고 똑같다면서 안 입더라구요. 한 번은 점퍼를 사줬더니, 같은 반에 같은 옷을 입은 애가 있다면서 안 입더라구요. 저는 아무도 없는 옷을 입는다는 게 인식이 됐어요. 옷을 만들어줘서 그런 것 같아요. 조끼도 만들고 바지도 만들어줬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비싸고 안 비싸고를 떠나서 누군가 입으면 싫다고 하더라구요. 딸도 원피스, 바지, 치마를 만들어 입혔더니 다 예쁘다고 하데요. 멜빵바지도 예쁘게 만들어 입혔어요. 옷감은 중앙시장에서 많이 팔았어요.” 김씨는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다.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처녀 때는 내 원피스도 만들고, 감이 남으면 원피스도 긴팔도 만들고, 반팔로 만들었다 붙여서 입기도 했어요.

김씨는 단골손님이 참 반갑다. 학교 다닐 때 다니던 사람인데, 친정이 여기니까 올 때마다 몇 개씩 맡겼다 찾아간다. 양키시장 안에 수선집이 왜 많게 되었을까. “여기 수선하는 데가 예전에 양복점 하던 분들이 많이 해요. 우리는 예전부터 수선을 했어요.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양복점 하던 분들이 수선으로 돌려서 해요. 예전에는 학생들이 여기서 옷을 사고, 여기서 수선했어요. 예전에는 옷가게가 훨씬 더 많았어요. 지금은 수선골목이라 할 만큼 많죠.

“검정색, 흰색, 곤색 실을 많이 써요. 청바지 실은 표시만 하니까 많이 쓰죠. 청바지에 실이 보이지 않아야 할 때는 검정색으로 박아주고, 단 박을 때는 청바지 실을 써요.”

박물관 전시회 보니까 어떠냐고 물었다. “뭐라고 할까. 내 모습을 보니까, 그래도 내가 거의 평생에 걸쳐 한 걸 찍으니까 추억 하나 있는 것 같아요. 박물관에서 사람이 나와 사진 찍고, 놀다 갔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왔어요. 우리 딸이 인터넷으로 보니까 다 나와 있더래요. 테이프 찍을 때 사진을 다 찍어 왔더라구요. 딸이 서울서 직장 다니고 있어서, 잠깐 다니러 오니까 전시회 끝나기 전에 박물관에 가서 본다고 했어요. 아들도 다 봤대요. 잘 했다고 하더라구요. 내가 싫어하니까, 말 주변이 없으니까 누가 온다고 하면 문 닫고 가고 그랬거든요.(웃음)”

김씨는 사람들을 보면 옷부터 보인다. “어이구, 저 옷 좀 줄여야겠다, 친구들 보면 통 좀 줄여 입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친구들은 옷을 고쳐달라고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러면 잘 고쳐서 다음 모임에 가지고 간다. 언제 그만 둘 거냐라는 친구도 있었다. 고쳐달라고 가져오기도 한다. 언제 그만둘 거냐, 이제 그만둬도 되지 않냐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은 더 일할 생각이다.

‘또와집’에 있는 물건에는 다 손때가 묻었다. 바늘도 종류가 많고 옷감 종류에 따라 바늘 치수가 달라진다. 줄자가 효율적이긴 하지만, 나무 자도 많이 쓴다.

인터뷰하는 동안 골목바람에 가게에 친 비닐이 약간 펄럭인다. 김씨는 가게 안이 춥다고 전한다. “발도 시리고, 얼어요. 여기 불이 있으니까 견디는 거죠. 오늘은 안 추우니까 괜찮고, 내일은 춥다니까 바람이 덜렁거리죠. 비닐도 갈아줘야 해요. 먼지 앉거든요. 두꺼운 비닐이 재생으로 만들어 어두워요. 사람이 잘 안 보이고 뿌얘요. 사람들은 비닐을 왜 어두운 걸 치냐고 해서 올해는 얇은 걸 쳐봤어요.”

요즘 김씨는 오후 여섯시, 일곱시에 퇴근한다. 예전에 일이 많을 때는 밤 열시, 열한시에 했다. 애들이 학교 다닐 때는 토요일 밤에 가서 운동화 빨고 바빴다. 돌이켜보면, 애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엄마가 들어갈 때까지 손수 밥도 차려먹은 까닭이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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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수선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예전에 선인재단 있죠. 백인엽이 만든 학교. 뭣 때문에 사람들이 다 잘린다고 했어요. 우리 아저씨 고향이 전남 곡성인데, 시골로 내려가려고 하잖아요. 예전에 기능직으로 있었어요. 사람 수를 자른다고 하니까, 누가 벌어야 먹고 살잖아요. 그때 언니가 이리로 오라고 해서 길 건너로 이사오게끔 해주더라구요. 처음 시작할 때 형부가 미싱을 사줬어요. 이 미싱은 아니고, 처음에 시작할 때 사줬죠. 벌어보니까 월급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죠. 지금은 정년하고, 제물포캠퍼스에 계약직으로 있어요. 3월 1일부터 출근하면 12월 17일에 끝났어요. 지금은 집에 있어요. 돌이켜 보면, 고생했죠. 그래도 솜씨가 있으니까 일하는 거니까, 원래 배운 거니까 일하자 그런 거죠.”

바쁜데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김씨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안 바빠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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