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붐의 원조, 강화 찬우물 高香막걸리"
상태바
"막걸리붐의 원조, 강화 찬우물 高香막걸리"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1.08 05: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기청정기 등 400개 발명특허품 낸 최진순 회장을 만나다
 
IMG_7631.JPG
 
 
“나는 발명가지, 사업가는 아니다. 항상 연구하고 좋은 걸 만들려고 노력한다.” 강화군 냉정리에서 (주)찬우물 고향막걸리를 운영하면서, 국제발명대회 8회 연속 수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진순 회장(75). 최 회장은 젊은 시절에 섬유업, 전자 부문 관련 회사를 운영하다가 7년 전에는 고향 강화에 내려와 우리 전통주 찬우물(고향高香 막걸리)막걸리를 '발명'했다. 최 회장은 현재 400개가량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기도 한 발명가다.
 

303m를 뚫으니까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거야.
"찬우물은 찬물이지. 길상면에 가면 온수리라고 있는데, 거기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데고, 여기는 냉정리라고 해서 찬물이 나오는 거야. 여기는 303미터를 뚫었는데도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찬물이 나오는 거야. 그 물로 술을 만드는 거지. 벌써 100미터만 뚫으면 대개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데 여기는 얼마나 차가운지 정말 손을 대지 못할 정도지. 아마 지형이 특수한 모양이야."

강화대교 없을 때는 연안부두에서 배 타고 다녔지.
"강화에서 나고 자랐어. 인천 송도고등학교 나왔고, 총동창회장을 몇 년 했지. 그 당시에는 송도고, 인천고, 동산고, 인천공고 정도밖에 없었지. 바다 건너갔으니까 유학을 간 거지. 그 당시에는 연안부두에서 배 타고 왔어. 교통수단이 배밖에 더 있어? 강화대교는 그 다음에 생겼지. 겨울에는 한강에 물이 얼잖아. 그 얼음덩이가 강화 앞바다로 내려오는 거야. 그러면 강화바다가 다 얼음바다지. 인천서 배를 타고 올 때, 얼음을 뚫고 오려면 힘든 거지. 그럴 때는 버스를 타고 배 타기 전까지 와서, 배 타고 건너가서, 거기서 또 버스를 타고 간 거지"
 
 
IMG_7603.JPG
 

아버지께서 섬유공장을 하셔서 섬유공학과를 갔어.
"아버지께서 강화에서 섬유공장을 하셔서, 내가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갔어. 졸업하고 공장을 쭈욱 했지. 3남 가운데 셋짼데, 다 번창하고 일으켰지. 막상 결혼하고 나니 좋지는 않았지. 형들도 있고, 고부갈등도 있었고... 어느 날 어머니가 처를 구박하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혔지. 나야 아침에 나가면 하루 종일 공장에서 자고, 밥도 공장으로 가져가 먹구. 그런 식으로 열심히 일해서 공장이 커졌는데, 막상 처한테 하는 걸 보고 심정이 달라졌지. 그냥 나가겠습니다, 하고 나온 거야"

할 줄 아는 게 직물밖에 없었지.
"67년도에 결혼해서 68년에 애 낳고, 69년도에 본가에서 나온 거지. 나왔지만 막상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구. 직물밖에 없었지. 그전엔 내가 깡패마냥 건달 생활을 많이 했어. 운동을 하다보니 성격이 모가 나 있었지. 그래도 운동을 해서 뭘 한 번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하는 거야. 태릉 지나가면, 그전에는 논밭은 있어도 그걸 일구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어. 그래서 풀이 한 길 이상 된 땅주인을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땅을 100평 외상으로 샀어. 뒤에 불암산이 있는데, 비가 한 번 오면 거기서 내려오는 모래가 온종일 파도 못 팔 만큼 모래가 많이 내려왔어. 말 그대로 ‘불암’, 바윗덩어리 산이거든. 그 모래를 파서 양회만 사서 손으로 벽돌을 찍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어. 처는 처가에 데려다 놓고. 판초우의라고, 군대우의를 두 개 사서 연결하면 텐트가 됐거든. 연탄불에 라면과 밥을 먹으면서 집을 지은 거야. 돈은 한 푼 없는 상태에서, 다 외상이지. 그래서 나중에는 짓긴 다 지었는데, 지붕 할 돈이 없는 거야. 처가에 처음 내려가서 만삭이 돼서 일주일 남겨놓고 나왔거든. 애를 낳았는지도 몰랐지. 애를 낳았는지도 모르고, 막상 가니까 집에서 난리가 난 거지. 패물 다 내놔라, 해서 안 줄 수 있나. 거기서 하룻밤 자고 패물만 가지고 올라온 거지. 막상 패물을 팔려니까 금방엘 갔는데 들어가질 못하겠어. 꼭 도둑질한 물건 같았어. 처형을 찾아가 이것 좀 팔아달라고 해, 같이 가서 팔았지. 20만원정도 되는 돈으로 집을 다 지었어".

섬유공장과 전자회사를 같이 하게 됐어.
"돈 조금 남은 걸 가지고 공주 쪽 유구에 갔어. 그 곳은 인견, 섬유공장이 많았거든. 거기에 못 쓰는 기계를 많이 내놨다는 소릴 듣고 간 거지. 기계를 다 뜯어서 내놓은 데 가서 사정을 말했지. 이만저만하니 기계 좀 주쇼 했더니, 젊은 애가 살려고 하는구나 싶은지 아무 말 없이 주더라구. 갖다 쓰고, 나중에 돈 벌면 갚으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걸 갖다 태릉에서 섬유공장을 한 거야. 섬유공장을 꽤 크게 했지. 잘 돼갔는데 석유파동이 나서 섬유가 하향곡선을 탄 거지. 그때 친구 하나가 프레스공장을 하는데, 돈이 없어 기계를 다 못 돌려. 돈을 조금 조금 준 게, 나중에 못 받게 되니까 나중에 그걸 인수하게 된 거지. 섬유공장하고 두 개를 같이 한 거야. 그런데, 되려고 하니까 서울에 시그메텍스라고 미국 큰 회사가 모토로라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지. 거기서 부품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기 시작했지. 승용차 트렁크 하나만 실으면 천만원이 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수금을 해오게 된 거야."

공기청정기 음이온 발생기를 특허받고 시중에 팔게 됐어.
"공장 처음에 시작하면서 먹지 못하고 힘이 드니까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하혈을 하기 시작한 거야.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타나질 않는 거야. 나랑 똑같은 사람이 몇 명 있었어. 이건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한 일만 하지 않으면 낫는다는 거야. 돈 조금 버니까 싹 없어졌어. 그걸 하면서 부품공장을 하면 도저히 안 되겠다, 완제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1983년도에 당뇨가 심해지기 시작한 거야. 그때 당뇨에는 공기청정기 음이온이 좋다는 걸 들은 거야. 공기청정기 음이온 발생기를 전 세계를 다녀봐도 아주 획기적인 거였어. 얼마나 좋냐면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 말로 도저히 좋다는 걸 말할 수가 없어. 병이 나아야 좋은 거거든. 장기적으로, 1983년도에 특허를 내서 10년 만에 성공한 거야. 1990년도 초부터 공기청정기가 나오기 시작했지."

시중에는 우리 공기청정기가 70~80퍼센트 있었어.
"우리나라에서는 공기청정기라는 자체가 없어. 정화기는 있었어. 정화기는 공기 중에 먼지를 걸려주는 거고, 공기청정기는 공기 속에 있는 균을 없애서 깨끗한 공기를 내주는 거지. 난 청정기를 한 거지. 청정기 이름이 없을 때 만든 거지. 전세계 발명품대회가 미국, 스위스, 독일에서 1년에 한 번씩 대회가 있었어. 거기에 나가서 금상을 계속 받은 거지. 그러면서 특허를 계속 낸 거지. 한 번 출품 낸 건 그 다음해에 못 내거든. 자꾸 만들고 만들어서 열세 번을 전세계 발명대회에서 금상만 받은 거야. 공기청정기가 굉장히 뜬 거지. 전세계로 수출을 하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섬유공장은 그만두고 공기청정기를 한 거지. 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대기업 세 군데서 우리랑 똑같은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거야. 공기청정기는 청풍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줘서 나가질 않는 거야. 70~80퍼센트가 우리 거였으니까. 그러면서 음이온이 인체에 해롭다는 등 별별 소리가 다 나오기 시작했어. 그래서 심장수술을 세 번 했고, 눈까지 먹었어. 계속 할 수 없으니까 셋째 딸한테 맡기게 됐지. 사위도 대기업 기획실에 다녔는데, 나와서 같이 했지. 나는 사람을 써도 50명 이상을 쓰지 않았는데, 애네들은 젊으니까 욕심도 있고 사람을 몇 백명씩 썼지. 공장이 굉장히 커진 거지."
 
 
IMG_7602.JPG
 
 
 
IMG_7641.JPG
 

청풍도 힘들어지고,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마음먹었지.
"그때 나는 당뇨성 시신경 마비야. ‘아이닥터’로 발명특허 금상을 받은 게 있었어. 그걸, 나는 이것만 가지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전 세계를 다니면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스포츠카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걸 보면 참 보기좋더라구. 나도 언젠가는 타겠다 했는데, 눈이 안 보이니까 목표가 없잖아. 그래서 목표를 눈 뜨는 걸로 삼고. 그 다음에 애들한테 스포츠카를 사오라고 했지. 장님 뭐 더듬듯, 날마다 차를 더듬었어. 만져보고, 그러고 들어와서 저 차를 타기 위해 눈을 떠야 한다. 눈 운동을 계속 한 거야. 한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니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 거의 6개월 만에 눈을 떴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기 시작한 거지. 이제는 고향으로 가자고 마음먹었지. 청풍 회사가 갖은 모략으로 애들이 감당을 못하는 거야. 걔네들 이름으로 했다가 내 이름으로 돌려줘 이게 안 되는 거야. 빌딩만 서울에 다섯 개나 갖고 있었어. 그걸 다 팔아도 빚을 다 못 갚는 거야."

명색이 발명가인데 봉이 김선달처럼 물을 팔 수는 없고, 뭘 할까 고민했지.
"나는 막상 고향이라고 왔지만 할 게 없는 거야. 2006년에 내려왔으니까, 이제 7년 된 거지. 막상 내려와 보니 할 게 없어. 사람이 있나, 사람을 모집해도 사람을 데려오고 데려다 줘야 하구 출퇴근을 시켜줘야 해. 기숙사가 있어야 해. 도저히 안 되겠구. 여기는 찬우물이니까, 냉정리니까 여기 물만 파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파기 시작했어. 100미터를 파도 200미터를 파도 안 나와. 물은 조금씩은 나오지. 그걸 갖고는 안 되지. 280미터 되니까 물이 나오기 시작해. 계속 파라, 해서 303미터를 판 거야. 그 다음부터는 온종일 퍼내도 물이 마르지 않는 거야. 그러면 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한 거지. 술밖에 없어. 봉이 김선달처럼 물을 팔 수도 없는 거구. 그래도 발명가고, 기네북에도 올라가 있는 사람인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 하자 그렇게 생각한 거지."

막걸리 시장이 땅에 떨어져 있으니 그걸 살려보자 해서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어.
"당시에는 막걸리시장이 최하위로 떨어져 있을 때야. 막걸리는 사람이 먹질 않아. 머리 아프고, 트림 나고, 배 아프고. 그렇게 나쁘게 생각한 거야. 소주 맥주만 먹고, 그 가운데 백세주가 막 잘 나갈 때야. 내가 시작을 하면 그걸 시작할 수는 없고, 막걸리가 땅에 떨어져 있을 때 살려보자, 그게 발명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때부터 전국을 다녔어. 막걸리공장을 할 수 없겠더라구. 막걸리가 빚다가 떨어지면 다 구더기가 돼. 현장이 깨끗하지 못하면, 균 속에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거야. 여기서는 옛날 방법으로는 안 되겠는 거야. 일본을 가본 거야. 균사체 하나로 술을 만들더라구. 균을 트렁크에 하나 사서 들어왔어. 하나씩 만들어보니까 그게 유산균이야. 그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막걸리에 유산균이 많이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요구르트보다 많다, 막걸리가 막 먹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공장이 많이 생긴 거지. 그렇다가 내 막걸리가 유산균이 많다 이럴 필요가 없는 거지. 그렇게 막걸리공장이 온 거야."
 
 
IMG_7647.JPG
 
 
 
 
 
파스퇴르법 저온숙성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그렇게 하는 데는 없어. 여름에는 사나흘이면 막걸리를 만들어. 우리는 20일 만에 술이 나와. 딴데서는 이것저것 집어넣고 보면 20도가 되면 끓기 시작하고, 30도가 되면 끓어넘치기 시작하지. 그쯤되면 술이 다 된 거라구. 성숙되지 않은 술을 만들어 차에 타서 쿨렁쿨렁해서 그때부터 발효가 되기 시작하는 거지. 우리는 27도에 고정을 시켜서, 자동으로 찬물이 들어가 식혀주니까 발효가 안 되는 거지. 발효꼭지점만 찾은 거지. 우리는 완전한 발효를 한 다음 술을 만들어 절대로 머리 아프고, 배 아프고, 설사하지 않아. 이게 다른 데랑 큰 차이지. 그게 파스퇴르법 저온숙성이야."

내 몸이 실험대상이야.
"돈이라는 건 쫓으면 도망 가. 돈을 좇지 말고 목표를 설정해서, 목표를 향해서 계속 연구하면 자연적으로 돈이 들어오게 돼있어. 요즘은 나이가 있으니까 건강 쪽으로 연구하고 있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으니까 머지않아 제품이 나올 거야. 내 몸이 실험대상이야. 당뇨 걸린 지 50년이 됐어. 지금 실험한 게 지난 20일부터 실험하는데, 지금 보름째야. 인슐린 30단위를 맞아, 약을 먹는데… 지금은 인슐린을 안 맞아도 돼. 8단위까지 내려왔거든. 오늘 내일로 안 맞아도 되게끔 조절하는 거야. 이달 말까지 약까지도 끊을 수 있겠다, 40일 만에 당뇨는 약을 안 먹어도 되겠다고 노력하는 중이야. 혈압도 많이 떨어졌어. 먹는 걸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뭘 먹는지는 지금 말할 수는 없고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지".

지금까지 특허 받은 게 400가지야.
"발명은 생활 속에 간편하게 만들어 놓는 게 발명이야. 컵 있잖아, 손잡이를 만든 게 발명이야. 발명은 어렵게 생각하면 무지무지 어려워. 일상 속에서 좀 더 편하게 해보는 거 그게 발명이야. 지금 특허 받은 게 400가지야. 나는 딴사람들은 특허를 팔아먹거든. 그건 발명가가 아니야. 발명가는 완제품을 만들고, 계속 업그레이드 시켜줘야 해. 그게 발명이야. 팔아먹으면 장사꾼이지. 나는 장사꾼이 되려고 발명하는 게 아니니까 안 파는 거지. 누가 만들더라도 아무 소리 안 하지. 그건 신경 쓸 필요없어. 그게 나라가 발전하는 거지. 좀 더 나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욕심이 있어서 그걸 하려면 안 돼. 욕심을 부리면 안 돼. 내가 돈에 욕심이 나면 특허만 팔아도 얼마든지 벌 수 있어. 돈이란 건 내가 노력해서 만든 게 돈이지."
 
 
IMG_7655.JPG
 

우리 ‘고향’ 막걸리는 높을 고(高), 향기 향(香)이야. ‘높은 향이 난다.’는 뜻이지.
"네 고향, 내 고향이라고 했을 때는 특허가 안 나와. 우리 고향은 높을 고(高), 향기 향(香)이야. ‘높은 향이 난다.’ 한문이 들어가니까 특허가 되는 거야. 고향 자체가 특허지. 한글로 스면 네 고향, 내 고향인 줄 알지만, 한문으로 쓰면 특허가 되는 거야. 고향 하나로 두 가지 이상 효과를 보는 거지. 우리 막걸리는 술병마다 내 얼굴이 들어가 있어. 천원짜리 팔면서 얼굴을 집어넣는 건 나를 보고 술을 먹으라는 말이야. 만약에 네 얼굴을 보고 배탈이 난다든지 배가 아프면 욕을 해도 된다, 자신이 있는 거지. 또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고향이지. ‘높은 향기가 난다.’ 생각이 달라진다. 고향 한글에 한문을 써놓는 거지."

인삼막걸리는 인삼을 다려서, 그 물로 술을 만들어.
"인삼막걸리는 인삼을 믹서에 갈아 대추 넣고 집어넣어 팔아. 어떤 뿌리식물은 균이 들어가게 돼있어. 머리가 아프게 돼있다. 우리는 인삼을 홍삼으로 만들지. 홍삼을 72시간을 약 다리듯 다려서 그 물로 술을 만든 게, 우리 인삼막걸리다. 딴 사람을 절대 쫓아가면 안 돼, 색다르게 해야지. 사자발쑥도 쑥을 다려서 그 물로 만들지. 다려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야지. 어떤 막걸리도 다 만들어보고, 만들 수 있어서 주문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만들어줘. 보통막걸리와 인삼막걸리는 고정적으로 잘 나가니까 두 가지만 만들어."
 
 
IMG_7612.JPG
 
 
 
IMG_7621.JPG
 
 
IMG_7615.JPG

 
이제는 건강을 위한 걸 만들어야겠어.
"3년째 브렌디를 만들고 있어. 독일에 양주 만드는 데를 찾아가, 그 기계로 양주 만드는 공장에 가보니 향이 아주 잘 나와. 거기서 사진 찍어서 여기 와서 만들었지. 3년 전부터강화 포도로 브렌디를 만들었어. 향이 참 좋아. (술을 따라준다.) 냄새를 맡고 먹어봐요. 40도예요. 증류해서 나온 거야. 술은 목넘김이 좋아야 해요. 양주도 오래될수록 목넘김이 좋은 거예요. 30년산보다 이게 목넘김이 더 좋아. 시중에서 아직 안 팔고, 3년 됐으니까 이제 팔아도 돼. 그동안 만들어 묵혀 놨으니까. 과일로 만든 건 블렌디, 꼬냑은 오크통에 넣어서 색깔이 나오는 거구, 곡식으로 만들었을 때 위스키가 되는 거구… 지금 우리는 다 만들어놨어. 술에 대한 건 다 만들었으니까, 이제부터는 건강을 위한 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실험대상이 돼서 만들고 있어.

한 달만 지나면 자신하고 약도 안 먹어도 된다. 그렇게 하려니까 굉장히 노력을 해야 해. 내가 막걸리를 만들어도 내가 먹을 막걸리를 만드는 거지. 양주를 만들어도 내가 먹을 좋은 원료료 만드는 거지. 구하기 쉽고, 남들 다 할 수 있는 걸 어떤 상태에서 그걸 연구해서 만드는 거지. 다 만들어놓고 이상이 없다고 하면 누구든지 만들어도 되는 거지. 만들어라, 그러는 거지. 나는 누구든지 들어와봐라, 맛보라고 시음장을 해놨었어. 지금은 사람들이 안 오고 관리하기 힘드니까 폐쇄했어. 어떤 때는 관광차가 많이 와서 가득찼었지"

당뇨 환자라도 우리 막걸리는 마셔도 괜찮아.
"아는 사람은 먹어라. 직원과 일하면서 지장은 없으니까 하나라도 더 팔려고 발버둥치진 않아. 이 막걸리로 우리나라에 막걸리붐이 일어나는 거니까. 당뇨환자는 막걸리를 마시면 안 되지만, 우리 막걸리는 마셔도 상관없어".


최 회장은 무슨 이야기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한 시간이 짧기만 하다. 발명으로 일관된 노익장의 ‘발명 인생’을 어떻게 한 시간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청결하고 위생적인’ 막걸리 공장도 직접 다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최 회장 앞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조차 무례하게 느껴진다. 아울러 나이 드신 분들을 찾아가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일이 ‘행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 회장이 곧 내놓을 발명품은 뭘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