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거리엔 쪽 지고 치마저고리 입은 기생이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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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거리엔 쪽 지고 치마저고리 입은 기생이 많았어."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2.15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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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째 대를 이은 '초가집칼국수' 주인장, 신경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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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한 다음 날 생각나는 음식은 뭘까. 쭈욱 국물을 들이키면 속이 편안해질 것 같은 메뉴는? 몇 가지 떠오르는 음식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건 칼국수다. 그렇다면 인천에서 칼국수를 맛있게 하는 곳은 어딜까. 중구 용동에 가면 '칼국수거리'가 있다. ‘거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칼국수집이 많지 않지만, 이곳에서 58년째 대를 이어온 집이 있다. 바로 초가집칼국수. 주인장 신경현 할머니(82)는 시어머니(고 김덕순씨)한테 물려받은 기술로 여전히 손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70~90년대에 비해 거리가 한산하기 짝이 없다는 할머니는, 지금은 골목이 완전히 죽었다면서 그래도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 있어 고맙다.
 
 
'칼국수거리' 이 골목에서 ‘초가집칼국수’가 가장 오래 됐다고 들었습니다. 가게는 언제 문을 열었나요.
“시어머니가 6·25전쟁 직후 시작했다. 조선일보 편집실에 계시던 시아버지가 피난 가서 방공호에 숨었는데, 하필이면 폭탄이 방공호에 떨어져 시동생과 함께 시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어 장사를 시작하셨다. 당장 달린 자식들과 먹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막막하셨겠나.”
 
“시어머니는 공부는 안 하셨어도 머리가 좋은 분이었다. 딸을 신흥학교 선생님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여자가 고등학교만 나와도 알아줬다. 시어머니는 자식들 공부시키랴, 먹고 살랴 고생을 많이 하셨다. 다행히 장사는 아주 잘 됐다. 원래, 이 자리에 초가집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때 초가집을 없어졌다. 그때는 왜, 시골이나 도시나 초가집을 없앤다고 난리를 죽이지 않았나. 우리는 이 자리에 개와집(기와집)을 짓고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 1986년도에 소방도로 낸다고 헐렸다. 25평이던 가게가 확 줄었다. 소방도로라고 냈지만,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집만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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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칼국수는 바지락이 듬뿍 들어가 해장하려는 손님들이 좋아한다.
 
 
시어머님한테 칼국수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가게를 물려받으셨을 때 이 동네 풍경은 어땠나요? 여기 가게 위치가 신포동과 배다리 중간이라 사람이 아주 많았을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게를 시작했다. 그때, 여기 용동은 기생촌이었다. 요아래, 윗길로 다 기생이 많았다. 머리에 쪽 지고 치마저고리 입은 기생들이 길에 많이 다녔다.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칼국수를 파신 게 아니고, 처음에는 녹두부침개를 부쳐서 팔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기생들이 없어지기 시작하자 칼국수를 만들어 파셨다. 그때가, 1957,8년도라고 하니, 벌써 58년이다 됐다. 내가 시집 왔을 때, 시어머니는 칼국수를 팔고 계셨다.”
 
“난 스물셋에 결혼하고, 딸을 넷 낳았다. 아들을 낳으려고 했는데, 낳고 보면 딸이고, 딸이고… (웃음). 시어머니 음식솜씨가 참 좋았는데, 특히 총각김치를 잘 담그셨다. 그냥 총각무를 소금에 절이셨고, 고춧가루는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 참 맛이 좋았다. 별 양념을 안 했어도 그것만 찾는 손님이 많았다. 지금은 입맛이 많이 바뀌어서 좋아할 사람이 많지 않을 거다. 몸에 좋기는 정말 좋아도 말이다. 난 애들 셋 낳도록 7년 동안 신흥동 친정에서 살았다.”
 
“셋째 딸이 다섯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시고모가 부산에서 극장을 하고 있어서 나는 매점을 하고, 남편은 기도여서 표를 받았다. 돈을 참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편찮으신 바람에 남편은 혼자 인천에 올라와 병간호를 하다가 시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나는 아이들과 1979년 12월에 부산에서 올라왔다. 그때부터 이 칼국수집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그게 35년째다. 세월 참 빠르다. 처음에는 얼마나 막막하던지, 말도 못하게 힘들었다. 지금도 사람이야 두고 하지만, 반죽을 하고 밀고 썰고… 엄청 바쁘고 힘이 들었다.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반죽은 지름이 150센티미터나 되게 둥글게 미는데, 그걸 미는 게 참 힘들다. 그걸 차곡차곡 접어서 냉장고에 뒀다가 손님이 오면 썰어서 내간다. 금방 썰어야 더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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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칼국수'집은 주로 단골손님들이 찾는다. 가게 안 모습.
 
 
요즘 사람들은 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직접 밀고 썬 손칼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죠. 특히 한 잔 한 사람들이 속을 풀러 많이 올 것 같은데요.
“칼국수는 1년내내 찾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여름이 괜찮다. 콩국도 나가니까, 다른 계절보다 사람이 많이 온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반죽하고 손수 써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처음 손목이 얼마나 아프던지… 하지만 기술적으로 하니까 이젠 괜찮다. 슬슬 밀고, 힘으로만 하면 힘든데 요령으로 하니까 괜찮다. 일반 주부들은 평소에 일을 해도 명절 때만큼 많이 안 하니까, 명절 때는 몰아서 해 힘이 든다. 늘 하면 요령이 생겨서 할 만하다. 우리는 곰표 밀가루에다 콩가루를 섞어서 반죽을 한다. 그래야 고소하고 시원하다.”
 
1970~90년대에는 이 동네에 극장을 비롯해 잘 되는 가게가 엄청 많았죠. 그때는 정말 바쁘셨겠어요.
“맞다. 크라운제과 앞으로 해서 이쪽으로 학생들이 정말 많이 다녔다. 바글바글, 정말 복잡했다.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워졌다. 지금은 하루 종일을 내다봐도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저쪽 윗길로는 조금 다니는 것 같더라. 지금도 밖을 봐라, 누가 다니나. 인천에서도 여기 중구가 가장 많이 죽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죄다 연수동으로 갔다. 지하상가에도 사람들이 우르르우르르 몰려다녔는데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시에서는 이쪽을 살려서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한다고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마다 마트가 여기저기 워낙 많으니까 사람이 여기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신포동은 차 세울 데가 없다. 지금은 여자고 남자고 몽땅 차를 가지고 다니는데, 차 세울 데가 없는 데는 사람들이 안 간다. 마트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차 세울 데가 있으니까 언제나 사람이 바글바글 몰린다.”
 
언제부터 사람이 부쩍 줄어들었나요. 그래도 칼국수거리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지 않나요.
“이 골목길에 사람이 안 다니기 시작한 건 10년은 더 되는 것 같다. 동네가 서서히 죽어가더니 어느 날 뚝 발길이 끊어져 썰렁해졌다. 이 동네를 자주 다니던 분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젊은 사람들은 여기보다 갈 데가 얼마나 많나. 칼국수집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동네방네 어디든지 칼국수집이 없는 데도 없다. 배고프면 가까운 데서 먹지, 여기까지 올 일이 없다.”
 
“여기가 ‘칼국수거리’ 된 지는 7,8년 됐다. 우리가 옆으로 칼국수집이 하나 생겼다가 저 아래로 내려갔고, 큰우물집도 그 다음에 생겼고… 지금은 서너 집 있다. 아치 생겼다고 사람이 는 건 아니다. 누가 아치를 보고 일부러 찾아오나. 그저 예전에 오던 분들이 고맙게도 찾아온다. 우리는 곰표 밀가루에다 콩가루를 섞어서 반죽하고, 바지락을 듬뿍 넣는다. 바지락 값이 아무리 비싸도 써야지 어쩌겠나. 술 먹은 사람들은 우리 칼국수를 먹고 시원하다면서 속 풀러 많이 온다. 깍두기, 김치도 맛있다고 좋아한다. 지금 주방에서 일하는 김복순씨는 32년 됐는데 일을 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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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표 밀가루에 콩가루를 넣어 반죽한 다음, 지름이 150센티미터나 되게 밀고, 접어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썰어서 끓여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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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락값이 올라도 아끼지 않는다. 면발을 팔팔 끓는 국물에 넣는 모습.
 
 
사람이 많이 다니던 골목길이 정말 한산해졌네요. 이 동네는 요즘 어떤가요.
“지금 우리 동네는 빈집이 많다. 인천시에서 여기를 살린다고 하지만 뭐로다 살리겠나. 다 빈집인데, 동네가 죽었다. 윗골목에 있는 신신예식장은 정말 잘 되던 때가 있었다. 나도 거기서 결혼했다.(웃음) 골목길에 한복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결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하지만 몇 년 전에 거기가 요양원으로 바뀌었고, 사람은 더 없어졌다. 그 옆에 있는 애관극장도 예전에는 참 사람이 많았다. 우글우글,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가보니 옛날같지 않고 정말 좁아졌더라. 자리도 꽉꽉 차지 않더라. 최근에 <관상> <변호사(변호인)> 다 봤다. 또 노래하는 여자 나오는 것도 봤는데…, 제목이 뭐더라. 이 동네에 극장이 정말 많았다. 동방극장, 키네마, 인형극장, 지금은 애관극장 하나밖에 없다. 인형극장 있던 자리도 요양센터가 됐다. 노인네들만 많이 사니까 생기는 게 다 요양센터다. 어느 동네든 젊은 사람들이 오가야 살아난다.”
 
할머니 고향이 어디세요. 어린시절이 궁금합니다.
“나는 안성에서 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들어가 말 운수업을 했는데, 정말 돈을 잘 벌었다. 그 당시 차라고는 군인차 트럭밖에 없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그야말로 자루에 쌓아뒀지. 해방이 되면서 조선으로 나왔다. 우리 식구가 다 만주에 가서 살았는데, 만주에는 일본 학교밖에 없었다. 조선말 쓰면 여학교 못 보낸다고, 얼마나 악질을 부렸는지 모른다. 우리 식구는 내가 다섯 살에 만주에 가서 열네살에 신흥동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45살에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그때부터 인천에서 살았다. 거의 평생을 인천에서 산 거나 다름없다.”
 
6·25전쟁 때 이 주변 풍경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그때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디나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전동도 지금과 그때와 다르고… 초가집이 쪼르르 있었다. 도원동에도 넓은 들판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보니까 집들이 가득 찼더라. 그전에는 들판에서 탈곡도 하고 그랬는데, 확 바뀌었더라. 배다리가 정말 복잡했다. 한복집도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별로다. 난 일하느라 그렇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간간이 돌아다녀보면 여기저기 참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 동인천역 근처에는 학교가 참 많았다. 축현학교도 없어졌지, 여고도 없어졌지… 학교가 하나둘 없어지면서 동인천이 싹 죽었다. 지금은 모두 연수동으로 갔다. 학교가 없어지니 학부형이 왜 살겠나. 그래도 난 아직 건강하니까 장사를 더 할 거다. 요샌 나이를 암만 먹어도 일해야 하는 시대다.(웃음)”
 
 
 
인터뷰가 끝날 즈음, 젊은 사람 셋이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할머니께 인사를 한다. 할머니도 활짝 웃으면서 젊은이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만두 한 접시, 칼국수 두 그릇을 시킨다. 초가집칼국수 맛이 좋아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자주 찾는다는 이승준씨(27)는 대를 이어오는 단골손님이다. “초가집 칼국수를 좋아한다. 할머니 때부터, 부모님, 나까지 3대에 걸쳐 할머니 칼국수를 찾고 있다. 이곳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당연히 들어오고, 일부러 찾아올 때도 있다. 친구들도 맛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멀리서 찾아왔다는 중년의 부부는 “입맛 없을 때 여기 칼국수를 먹으면 입맛이 돈다. 날이 쌀쌀하지만, 오늘도 일부러 왔다. 한 끼 먹으려고 참 멀리도 왔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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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용동 골목이 이제는 한산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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