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육열은 더 이상 생산성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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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육열은 더 이상 생산성을 갖지 못한다
  • 이정숙
  • 승인 2014.03.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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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인천교육 미래찾기(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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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육열은 더 이상 생산성을 갖지 못한다

이 정 숙 (인천교육연구소, 동수초교)


한국인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경제적 여건이 훨씬 좋은 선진국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한국의 이러한 교육열을 부러워한다지 않던가. 아니, 외국이나 미국대통령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교육열이 엄청 높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교육열이 높다는 것이 마냥 자랑스러운 덕목이 아니라는 것도 한국에서 그 높은 교율열에 휘둘려 멍이 들다보면 금방 알게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놀라워 한다는 교육열이 어디를 향해 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교육열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그 방향이 감지되지 않던가. 그 높다고 하는 것이 진정, '교육에 대한 열기' 가 맞는가? 그 높다는 열기의 정체는 진정한 '교육열'인가? 진정한 교육열은 또 뭘까? 우리에게 ‘진정한 교육’이 존재했던가? 혹시 우리가 그 진정한 교육이란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사회적 합의가 있었는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달린다. 그저 시험보고 점수를 높이는 행위에 매달리는 것을 설마 교육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아닐진데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의 교육열은 그것이 희망이나 삶의 질을 담보하고 있기 보다는 부모가 자신의 대리만족을 위한 신분상승이나 욕망을 위한 방향으로 읽혀 질 때가 있다. 부모는 막노동을 할지라도 자식만은 부자로 존경받고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 지극히 부모로서의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얼핏 생각되지만, 그 열망이 지나쳐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한풀이’에 투영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종종 포착되기 때문이다.


종종 아이들에게 왜 공부를 하냐고 물으면 ‘부모님 때문’ 이라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꿈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진로를 고민하기 보다는 부모를 위해서 대학이나 학과를 결정하는 일이 빈번하다.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관계없는 대학에 가서 힘들어 하거나 적응을 아예 못해 하차하거나 타과로 늦게 편입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문제를 가진 부모의 성향이라기보다는 동양인들의 가족중심 사고로 인한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 한국인들 역시 공부를 하는 목적에 있어서도 자기 개인보다는 가족을 의견을 중시한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부모에 대한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소질보다는 남들을 의식하여 뒤쳐지지 않으려는 체면이 중요시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욕망으로 비롯된 병리적인 과잉의 교육열로 인해,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 학원에 그것도 모자라 과외까지 받는데 이르렀으며, 급기야 아이들끼리의 과열경쟁으로 이어지고 스스로를 점수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리기에 이른다. 그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학교란 곳은 그림의 떡 같은 살벌한 지식들이 자신들과 아무 상관은 없지만 사회에 나가기 위해 마지못해 버텨내야 하는 관문으로 인식하게 된다. 아이들끼리의 이러한 과열 경쟁과 포기의 극단적 선택은 미처 어른이 되기도 전에 계층과 계급을 나누고, 주류에 끼려는 안간힘과 함께 소외 현상을 초래하며, 피로와 삭막함을 체화시킨다. 더구나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말이다.


여기에 불안한 사회를 감지한 부모들은 자신이 가진 철학을 토대로 한 낭만적이거나 이상적 판단을 보류한 채, 교육을 경쟁의 서바이벌의 코드로 인식하게 되면서, 자식을 전쟁터에 살아남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교육이란 명목에 지출하는 비용은 날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져만 간다. 그 과열된 투자는 삶의 행복이 보류된 채,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돈과 능력과 체력과 삶 자체를 계속 소모시켜버려 너도 나도 기진맥진 하게 되어 버리게 만든다. 결국 욕망과 기진맥진이 뒤엉킨 이러한 교육열은 다시 그 거대한 사회의 병리적 에너지를 흡수해 성장한 비정상적인 괴물을 눈덩이를 굴리듯 더 거대하게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된다.


이 소모적 괴물은 사회적 문제 뿐 아니라 교육자체의 패러다임까지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교육자들조차 무엇이 진정한 교육인지를 가늠하고, 비판하기란 힘들다. 그렇다보니 ‘교육’이 그저 점수를 높이는 것이 아님을, 경쟁보다는 배려를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말로는 미래 사회를 위한 교육적 덕목으로 드는 근사한 창의성이니 독창성이니 하는 것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들조차도 실은 경쟁과 이익창출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려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열은 이제 더 이상 생산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조리가 빚어내는 현상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어쩌지 못해 외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한 때에는 이러한 과잉의 교육 에너지가 한국이란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나도 내 아이를 내 욕망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경쟁하도록 하는 게 왜 나쁜 것인가. 그러면 사회에 밑바닥인생, 찌질한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 두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회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여 교육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이 엄청난 덩어리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 버렸다. 감히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 어쩔 수 없는 에너지를 생산적인 곳으로 물꼬를 트려는 노력이 없이 그저 눈덩이만 굴리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 온 힘을 다해 벼랑의 끝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 갈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태껏 누군가 하겠지 하고 ‘보류’한 일들이 이렇게 커져 버린 게 아닌가. 늦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내고 방향을 모색하면서 그 이상한 덩어리를 녹여내는 작업을 조금씩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덩어리를 녹여내는 일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으로 생산성을 갖도록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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