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산 진달래축제 때는 일찍부터 손님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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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 진달래축제 때는 일찍부터 손님 많아."
  • 김영숙 기자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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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 '우리옥' 백반집, 고모 이어 61년째 꾸려오는 방영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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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끝날 즈음에 강화에는 음식점이 없었어요. 음식 솜씨 좋은 고모(고 방숙자씨)가 밥을 해서 몇 사람씩 먹이다 보니 음식점이 된 거죠.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자”라는 말에서 ‘우리옥’이 됐어요.” 음식점을 연 지 올해로 61년 된 ‘우리옥’은 입소문을 타고 음식이 맛있고 값싼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모 뒤를 이어 35년째 가게를 꾸려오고 있는 방영순씨(74)는 손님들이 콩비지와 무짠지를 무척 좋아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방영순씨 고모가 해주는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강화군수, 문화원장 등 다양했다. 고 방숙자씨가 음식점을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개성에서 온 사람들이 인삼을 심기 시작하면서 강화에는 인삼농사를 짓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때 은행도 들어와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다보니 음식점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으로 고 방숙자씨는 음식점을 열게 된 것이다.
 
“고모는 지금 살아계셨으면 108세 되셨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고모가 우리를 쭉 기르셨다.” 방영순씨에게 고모는 엄마나 다름없었다. 방씨는 결혼해서도 고모와 가까이 살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가게를 시작했다. 마흔이 다 돼서 시작해서 현재 35년째다.
 
기자가 10년 전에 우리옥에 들러 백반을 먹었다고 말하자 방씨는 활짝 웃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2층 건물이 아니었다. “예전 집은 5년 전에 도시계획에 걸려 헐렸다. 터는 그대로인데, 방향을 틀어서 지금 이 건물로 다시 지었다”며 “예전 집이 더 예뻤는데, 그렇죠”라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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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옥은 손수 농사 지은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손님상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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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좋아하는 무짠지와 순무김치.
 
 
 
 백반값이 오천원이어도 밑지지는 않아
농사지은 걸로 음식재료 쓰는 까닭
 
우리옥 백반값은 오천원이다. 밑지는 장사 없다지만, 뭐든 비싼 요즘 과연 남는 장사일까. 방씨는 많이 남지는 않지만 아직 밑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또 워낙 오랫동안 찾는 사람들이 있어 값을 올리는 건 그리 간단치가 않다. 싸고 맛있어서 오는 손님들에게 값을 올리면 박대하는 것같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 농사지은 걸로 음식재료를 쓰니까 괜찮다.
 
우리옥에서 쓰이는 음식 재료는 모두 방씨 남편이 농사를 지어 댄다. 고춧가루, 배, 무, 순무, 파, 감자… 가게에서 필요한 재료는 거의 다 댄다. 그런 이유로 우리옥 백반값이 비싸지 않다.
 
손님들은 백반을 많이 찾고, 대구찌개랑 병어찌개도 시원하다며 좋아한다. 방씨는 변함없이 찾아주는 손님들이 고맙다. “사실 음식 맛은 거기서 거기인데, 손님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드셔서 맛있는 거죠. 다 기분 좋은 양반들이 왔다가 음식을 먹으니 맛있는 거예요. 왜, 기분 좋으면 다 맛있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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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맛집'이라며 누군가가 만들어 주었다.
 
 
 
1973년 강화대교 생기기 전,
얼음덩어리에 배가 이리저리 밀려다녀
 
방씨는 강화토박이로서 강화가 무척 살기 좋다고 말했다. 강화대교가 생기기 전 뭍을 어떻게 다녔는지도 알려주었다. “강화대교는 1973년인가 그때 생겼어요. 우리 아이 날 때쯤이었는데, 그전까지는 배를 타고 다녔죠. 엠뽀드라고 해서 사람들이 이 배를 많이 타고 다녔어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면 도착하는 곳에 버스가 서 있고, 또 배를 타고 여길 오면 여기에 또 버스가 서 있었어요. 6·25전쟁 전에는, 겨울이 되면 강에 얼음이 많이 끼었어요. 강이 얼음덩어리로 차 있어 바다에 배를 대기가 쉽지 않았고, 얼음덩어리에 배가 이리저리 밀려다녔어요. 그러니까 한겨울에는 배가 자주 다니지 못했어요.”
 
그는 예전에 비해 강화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도 했다. “예전에는 직조공장이 여기저기 아주 많아서 사람도 많았어요. 그 공장들이 다른 데로 옮겨간 게 아니라 아예 사라진 거죠. 강화에는 직조가 유명했어요. 강화도에서 나는 옷감으로 청와대 커튼도 짜가고, 엠블리 넥타이라는 것도 미군부대에 납품하고 그랬어요. 인조도 많았죠. 하지만 점점 공장이 사라지면서 사람이 줄어들었어요”라며 “강화대교만 있을 때는 강화에 오려면 대여섯 시간 걸렸는데, 지금은 다리가 더 생기기도 했지만 교통이 많이 좋아졌죠”라면서 바람 쏘이기에 강화만큼 좋은 데도 드물다고 말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인천, 서울, 대전 등지에서 강화를 찾으면서 우리옥도 찾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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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건 싫다며, 옆으로 돌아앉은 방영순씨.
 
 
강화에서 나는 것만 갖고도 3년 먹고도 남아
강화섬에서 나는 쌀도 맛이 좋아
 
그는 또 강화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전했다. 병원, 은행도 많이 생겼고, 교통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공기가 좋다. 또 강화는 땅이 좋아 농산물이 많이 나는데, 육해공군이 다 있다. 고기 생선 채소 등등, 그의 강화 자랑은 끝이 없다. “강화에서 나는 것만 갖고도 3년 먹고도 남는다고 하잖아요. 강화섬쌀이라고, 쌀도 맛있어요, 하하.”
 
가게는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열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쉬는 날은 없다. 손님이 날마다 많은 건 아니지만, 멀리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서다. 봄 가을에는 외지 사람들이 산에 많이 오니까 바쁘다. 마니산, 고려산, 진강산, 혈구산 등 강화에 있는 산을 찾는 손님들이 오가다 들른다. 특히 고려산 진달래축제 때는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이 온다.
 
우리옥 가게 벽은 손님들이 다녀간 낙서가 빼곡하다. “언제 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토요일 일요일은 예약하고 많이 오세요. 손님들은 제철음식으로 올라가는 나물도 좋아하지만, 일년 열두달 상에 오르는 콩비지는 고소해서 참 좋아하죠. 강화특산물인 강화순무를 좋아하는 분도 많고, 연세 드신 분들은 어디 가서 맛볼 수 없다며 무짠지를 좋아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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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한 마디'.
 
 
아침 7시 30분이면 가게 문 열어
규칙적인 생활과 즐거움 마음이 건강의 비결
 
방씨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할 생각이다. “일하니까 건강한 것 같아요. 집에서 가게까지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규칙적이고, 움직이니까 건강한 거죠. 또 사람들과 대화를 하니까 늙지 않아요. 집에만 있으면 얼마나 우울하고 힘들겠어요”라며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 여섯시면 가게에 도착해요. 7시 반부터 손님을 받구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니까 힘들지 않아요. 게다가 남편이 다 농사지은 재료를 다 갖다주니까 좋죠. 애들도 결혼해서 다 자리잡았으니 고맙구요. 다행히 애들 아주 어렸을 때는 장사를 하지 않아, 애들을 돌볼 수 있었어요. 부모는 어느 정도 뒷받침해줘야 하지만 애들이 잘 따라줘서, 공부도 잘하고… 다들 자리잡고 잘살아요. 애들한테 고맙죠. 결혼할 때도 지들이 알아서 다 해갔지, 졸업하고 취직하고 지들이 알아서 해갔지. 그러니까 잘해가진 않았지만, 지 분만큼만 해갔어요. 그러면 된 거죠.(웃음)”
 
그는 또 일흔이 넘은 자신이 아직까지 일을 할 수 있어 무척 즐겁다. “60세에서 75세까지를 신중년이라고 하잖아요. 텔레비전에서는 인생에서 제2막을 가지라고 말하던데… 건강하면 단 돈 10만원이든 20만원이든 벌어야 해요. 그러려면 건강이 최고죠. 지금 내가 장사를 하니까 기자 양반이 와서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고… 즐겁잖아요.(웃음) 몸을 계속 놀리면 바빠서 우울할 새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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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도시개발로 기와집이 헐리고, 그 터에 새로 우리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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